김은호는 이상범과 함께 친일미술전의 총화격인 반도총후미술전의 위원으로
김은호는 이상범과 함께 친일미술전의 총화격인 반도총후미술전半島銃後美術展의 위원으로 활동하기도 했다.
반도총후미술전은 1942년 11월에 첫 전람회를 열었는데, 조선미술가협회가 주최했고 총독부 정보과와 국민총력조선연맹이 후원했으므로 선전보다 명실상부하게 중시된 전람회였다.
총후미술전은 말 그대로 총을 쏘는 전쟁을 지원하는 전람회였다.
따라서 작품은 일본군이 용감하게 싸우는 전쟁화와 전쟁을 총지휘하는 천황을 찬양하는 내용이 될 수밖에 없었다.
그 동안 선전을 통해 유명해진 작가들이 이 전람회에 참여할 것을 요청했을 때 거절하기란 어려웠을 테지만 게중에는 기꺼이 자발적으로 참여한 작가들도 있었다.
이 전람회에 김은호와 이상범이 위원으로 참여했고 김기창, 김인승, 심형구, 장우성 등이 초대작가로 참여했다.
이 전람회는 1944년까지 3회 계속 되었다.
전람회는 11월 초순에 열렸으며 동양화부를 아예 일본화부로 지칭하여 출품작들의 명제도 ‘방공훈련’, ‘폐품회수반’, ‘총후의 백성’, ‘징병제도를 맞이하며’ 등으로 전람회의 성격에 맞춘 것들이었다.
이상범은 화필보국畵筆報國을 위해 전람회 수익금을 국방기금으로 헌납한 1940년의 조선남화연맹전에 김은호, 김기창 등과 함께 참여했으며 예술보국한 공로로 1944년 제5회 조선예술상을 받았다.
이들 외에도 일제의 침략전쟁에 참여할 것을 독려하는 그림을 그린 화가들이 있었는데 지성열이 1939년에 중국 전장 사생전을 그렸고, 송정훈이 중일전쟁에 종군하여 그린 그림으로 전람회를 열었으며, 1940년 심형구는 <흥아興亞를 지킨다>라는 제목으로 보초를 서는 군인을 그린 유화를 제19회 선전에 출품하여 이런 종류의 작품으로 처음 입상했다.
심형구는 이어서 정세와 관련하여 미술이 취해야 할 바에 대해 논설을 스는 등 노골적으로 친일을 했으며 종군작가로 활동하기도 했다.
이들은 자기반성 없이 해방 후에는 화단을 주도했으며 국전의 초대작가, 운영위원, 심사위원으로 참여하면서 일제 때의 기득권을 계속해서 누렸다.
일찍 타계한 심형구를 제외하고 이상범, 김은호, 김인승, 박영선, 김기창 모두 3·1문화상을 수상했으며 서울시문화상, 예술원상, 문화훈장 등을 골고루 수상했다.
월간 『소국민少國民』 표지에 삽화를 그린 화가들도 있었다.
이것은 국민학생용 잡지로 조선총독부 기관지 『경성일보』가 1943년 12월에 창간했다.
이 잡지는 조선어를 사용하지 못하게 한 민족말살책동에 따라 일본어로 발간되었는데 전시국가 총동원체제에 따라서 어린이마저 전쟁터로 내보내려는 저의를 여실히 드러냈다.
이 잡지의 표지화와 삽화를 주로 일본인 화가들이 그렸지만 조선인 화가로는 정현웅, 이건영(1922~), 조병덕(1916~) 등이 그렸다.
정현웅은 『신시대』, 『소년』 , 『여성』 , 『조광』 , 『춘추』 등 일제시기에 발간된 여러 잡지에 표지화와 삽화를 그려 재능을 인정받았는데 『소국민』에도 게재했다.
그는 『소국민』에 <공정대空珽隊>, <하늘은 우리들이 정복할 곳이다>, <힘쓰는 어린 독수리 - 소년비행단>, <비행기의 정비> 등을 게재했고 연재소설 『불타는 십자성』에 삽화를 제공했다.
<공정대>는 도판의 설명대로 “하늘에서 낙하한 공정대원들이 버마의 한 적진 비행장에 난입한 뒤 귀대하기 위해 수송기에 올라타는” 장면이었다.
정현웅은 서울의 제2고보(현재 경복고)를 졸업하고 독학으로 서양화를 공부했으며 1927년 열여섯 살 때 제6회 선전에 출품하여 일찍 재능을 나타냈고 그 후 계속해서 선전에 출품했다.
1936년 『조선일보』의 베를린 올림픽 금메달리스트 손기정 선수의 사진에서 일장기를 지운 일은 이상범과 함께 공모한 것으로 알려졌다.
해방 후 정현웅은 1945년에 조선미술건설본부의 서기장, 이듬해 조선미술동맹의 아동미술부 위원장, 1947년에 월간 『신천지』 발행인, 1950년에는 서울미술동맹 사무국장 등을 역임했다.
1950년 9월 26일 월북한 그는 1950~57년 물질문화보존연구회 제작부장을 지내면서 안악 3호분 등의 벽화보존과 모사작업에 몰두했으며 1957년부터 1966년까지 미술가동맹의 출판분과위원장을 지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