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의 섹스 행위를 주제로 
 

신의 섹스 행위를 주제로 그림을 그린 화가가 있다.
그가 오스트리아의 표현주의 화가 귀스타브 클림트Gustave Klimt(1862-1918)이다.
그는 1907년에 <다나에 Danae>를 그렸는데 여인이 요염한 몸부림을 치며 자위행위 하는 모습이다.
다나에는 아르고스Argos 왕의 유일한 딸로 그녀의 아버지에 의해 성에 갇혀 사나운 개들의 감시를 받았는데 왕의 운명이 아들을 가질 수 없을 뿐 아니라 손자에 의해 살해될 것이라는 계시를 받았기 때문이다.
다나에와 사랑에 빠진 제우스는 비를 통해 다나에를 임신시켜 그녀로 하여금 아들 페르세우스Perseus를 낳도록 해 운명의 계시가 이루어지게 했다.
클림트는 이런 신화를 주제로 자아도취에 빠져 애욕적인 모습을 한 여인을 그리면서 제우스가 내린 비를 신성한 빛이 쏟아지는 장면으로 대신하며 초자연적인 영감을 묘사했다.

다나에와 페르세우스
페르세우스는 메두사를 퇴치한 영웅이다.
아르고스의 왕 아크리시우스는 딸 다나에가 낳은 아들, 즉 손자가 자신을 살해할 것이라는 신탁을 알게 되자 딸을 청동 성채에 가두었다.
다나에를 사랑한 제우스는 금빛 소나기의 형상으로 그녀를 찾아 갔으며 다나에는 제우스의 아들 페르세우스를 낳아 길렀다.
아크리시우스가 이 사실을 안 것은 4년이 지난 후였다.
그는 딸을 가두고 손자를 바다에 던졌다.
다나에는 아들과 함께 바다를 표류했고 두 사람은 세리포스 섬에 사는 어부 딕티스에 의해 구조되었는데 딕티스의 형은 폴리덱테스의 통치자였다.
촐리덱테스는 다나에를 사랑했지만 그녀는 그의 사랑을 거절했다.
폴리덱테스는 잔치를 열고 세리포스의 귀족들을 한자리에 모으면서 말을 한 필씩 갖고 오게 했다.
페르세우스는 자신이 머리가 뱀인 괴물 고르곤 세 자매의 머리를 베어 말을 살 것이라고 공언했다.
폴리덱테스는 페르세우스가 농담한 것인줄 알았지만 불가능해보이는 그 일을 집행하게 되었다.

페르세우스의 일에 헤르메스(신들의 사자로서 로마 신화의 머큐리에 해당한다)와 아테네(아테네의 수호신으로 지혜, 예술, 전술의 여신으로 알려졌다)가 도와주기로 했다.
헤르메스에게서 둥근 칼을 받은 페르세우스는 고르곤이 있는 곳으로 날아갔다.
고르곤 세 자매 가운데 메두사만은 불멸하지 않는 존재이지만 누구든지 그녀를 똑바로 바라보게 되면 그 자리에서 돌이 되었다.
페르세우스는 메두사를 직접 바라보지 않고 방패에 비친 모습을 보았다.
또 다른 신화에 의하면 아테네가 페르세우스의 손을 인도했다고 전해지며 페르세우스는 메두사의 목을 베어 가죽부대에 담았다.
페르세우스가 세리포스로 날아와 고르곤의 머리를 꺼내 보여주자 폴리덱테스와 섬의 귀족들이 돌로 변해버렸다.
페르세우스는 메두사의 머리를 아테네에게 바쳤다.
다나에와 페르세우스는 아르고스로 돌아왔다.
게임에 참가한 페르세우스가 원반을 던지게 되었는데 아크리시우스 왕이 그 원반에 맞아 죽었다.
그리하여 신탁이 이루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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플라톤의 철인정치는 공자와 맹자가 존경했던 3황5제 

플라톤의 철인정치는 공자와 맹자가 존경했던 3황5제와 같은 이들이 표방한 덕치주의와 같다.

플라톤의 저서 <공화국 Republic>은 서양철헉의 입문서이다.
철학을 이 책을 읽고 이해하는 것으로 시작한다.
플라톤의 공화국은 고대 그리스인이 상상할 수 있는 가장 이상적인 국가를 말한다.
물론 인구가 적은 도시국가에서나 꿈꿀 수 있는 이상적인 나라이다.

플라톤은 왕의 아들, 귀족의 아들, 상인의 아들 가리지말고 한데 모아 합숙시키면서 동일한 교육을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소위 말하는 교육 균등의 자유를 허락하는 것이다.
교육의 내용은 체육, 철학, 음악이다.
그때만 해도 이 셋만 배우면 이상적인 인간이 될 수 있다고 보았다.

채육은 오늘날 우리가 아는 체육뿐 아니라 나라를 방어할 수 있는 군사훈련도 포함된다.
육체를 단련시켜서 튼튼한 몸을 만드는 것인데 플라톤은 의사가 필요없을 정도의 튼튼한 체력을 갖추는 것이 목적이다.

음악 역시 오늘날 우리가 아는 음악이 아니라 시, 예술, 문예가 포함된다.
주 목적은 용기, 절제, 미덕을 갖게 만들고 철학을 공부할 수 있는 바른 정서를 갖추게 하는 것이다.
철학을 일찌감치 가르치지 않고 바른 정서를 갖춘 후에야 가르치는 이유는 일찍 가르치면 하룻강아지 범 무서운 줄 모르고 아무하고나 논쟁을 하겠다고 덤비기 때문이다.
이렇게 교육을 동등하게 제공하지만 학생들의 실력에는 차이가 생기기 마련이다.
해서 시험을 치루어 우수한 학생과 그렇지 못한 학생들을 구분한다.

첫 번째 시험에서 낙방하는 사람은 상인이 된다.
두 번째 낙방하는 사람은 군인이 된다.
두 시험 모두 패스한 사람은 철학적인 사고를 가진 사람들로 장차 나라를 이끌 지도자들이다.
이들이 정부관리인 수호자들이 된다.

플라톤의 공화국에서는 철인정치가 이루어지는데 가장 우수한 인재들에게 나라를 맡기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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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대세계의 종말과 기독교 미술 
 

이탈리아 르네상스 작가들 로렌조 기베르티Lorenzo Ghiberti와 조르지오 바자리Giorgio Vasari는 콘스탄틴 대제의 등극과 더불어서 고대세계가 종말을 고했다고 했다.
기독교는 급격히 확산되었으며 392년 테오도시우스Theodosius 황제에 의해 로마
제국의 공식 종교가 되었다.
그리스와 로마의 영향이 두드러진 세계에 등장한 기독교 미술은 서양미술사의 가장 중요한 유산으로 남게 된다.
기독교 미술이 성행하기 시작한 것은 3세기의 첫 50년 이탈리아와 로마 제국 동쪽에서였다.
로마제국 내 크리스천은 3세기에 이방인들의 미술 양식을 사용해 만남의 집Meeting-Rooms(혹은 Churches)과 무덤을 장식했는데 그리스와 로마 미술의 영향을 받았다.

다음의 연대를 참고하는 것이 기독교 미술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된다.

로마 공화국과 제국
로마 공화국: 기원전 510~27년
로마 제국: 기원전 27년~기원후 395년
서 제국: 395~476년
동 제국: 395~1453년

주요 로마 황제들
아우구스투스Augustus: 기원전 27년~기원후 14년
티투스Titus: 79~81년
트라잔Trajan: 98~117년
하드리안Hadrian: 117~217년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Marcus Aurelius: 161~180년
카라칼라Caracalla: 211~217년
디오클레티안Diocletian: 284~305년
콘스탄틴Constantine: 306~337년

로마가 네 왕국으로 나뉘져 서로 으르렁거렸는데 콘스탄틴 대제가 이들과의 전쟁에서 승리하고 황제에 즉위한다.
그는 정치적 이유로 기독교에 호감을 가졌고 313년 기독교를 공인하는 칙령을 발표했다.
기독교는 더이상 지하에서 숨어지내지 않아도 되었다.
콘스탄틴에 의해 팔레스타인의 폐허에 훌륭한 성당, 수도원 등 여러 종류의 건축물들이 세워졌다.
콘스탄틴, 콘스탄틴의 어머니 성녀 헬레나Santa Helena, 유독시아Eudoxia, 유스티아누스Justianus 황후 등의 노력과 협조로 예수님의 탄생, 생애, 사망으로 인해 성지가 된 지역들이 특색 있는 건물들로 창건되었다.
시온의 산, 베들레헴의 들, 요단 계곡, 유대 사막 등 여러 지역에 수도자와 크리스천들이 거주했으며 순례자들이 사방으로부터 왔기 때문에 맹렬한 이교도들의 습격이나 박해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성지는 이 기간에 많은 성인들의 땅이 되었다.
팔레스타인은 614년 파사의 코스로스 2세Chosroes II에 의해 황폐케 되는 수난을 겪게 되고 628년 헬라구리우스Helagurius가 복구사업을 펼쳤지만 십 년 후 성지는 이슬람교도 아랍인들의 손아귀에 들어가게 된다.
콘스탄틴(혹은 콘스탄티누스) 대제가 어느 해 태어났는지는 알 수 없지만 280년대 후반인 것 같으며 2월 27일 현재 유고슬라비아의 모에시아Moesia 북쪽 비잔티움Byzantium으로 통하는 나이수스Naissus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군인 지휘관 플라비우스발레리우스 콘스탄티우스Flavius Valerius Constantinus였고 그의 아네이거나 혹은 첩concubine(다처주의에서 제2부인 이하를 말 함)은 헬레나Helena였다.

콘스탄틴 대제
293년 콘스탄틴이 소년이었을 때 아버지는 시저Caesar의 작위를 받아 서 로마 황제Augustus 맥시미안Maximian의 제2인자 대리인이 되었다.
이때 아버지는 맥시미안의 의붓딸과 결혼하기 위해 헬레나와 헤어졌다.
콘스탄틴은 동로마 제국에서 성장했는데 동로마의 황제는 니코메디아Nicomedia의 디오클레티안Diocletian이었다.
콘스탄틴은 소년시절부터 가이사랴의 주교 유세비우스를 알고 있었고 디오클레티안과 함께 팔레스타인을 경유해 이집트에서의 전쟁을 참관했다.

303년 디오클레티안이 기독교를 탄압하기 시작했으며 기독교는 동로마의 주요 문제거리가 되었다.
당시 기독교가 빠르게 확산되고 있었는데 콘스탄틴 가족 중에도 크리스천이 있었던 것 같다.
콘스탄틴의 어머니 헬레나가 독실한 크리스천이었으며 콘스탄틴의 의붓여동생 아나스타시아Anastasia도 기독교의 영향을 받았다.

305년 두 황제들 디오클레티안과 맥시미안 모두 퇴임했고 대리인 황제들이었던 칼레리우스Galerius(311년에 사망)와 콘스탄틴이 황제가 되었다.
나중에는 맥시미누스 다이아Maximinus Daia와 세베루스Severus가 각각 동로마와 서로마의 황제가 되었다.
갈레리우스의 요청으로 콘스탄틴은 아들과 함께 영국으로 가서 전쟁을 했으며 아버지는 306년에 욕York에서 사망했다.
군인들에 의해 갑자기 황제로 옹립된 콘스탄틴은 로마에서 모반한 서로마 황제 맥시미안의 복잡한 동란에 끼어들게 되었고 황제 대리인 세베루스는 리치니우스Licinius로 교체되었다.
아들의 배척을 받은 맥시미안이 가울Gaul에서 콘스탄틴과 합세해 아들로 하여금 310년에 스스로 목숨을 끊게 만들었다.

콘스탄틴은 307년에 맥시미안의 딸 파우스타Fausta를 둘째 주인으로 맞았으며 312년에 이탈리아로 진군해 로마 근처 밀비안 다리에서 처남 맥센티우스와의 전투에서 승리했다.
리치니우스는 맥시미누스 다이아를 무찌르고 동로마의 황제가 되었지만 316년의 전투에서 발칸스Balkans 지역을 콘스탄틴에게 빼앗겼다.
콘스탄틴은 324년 리치니우스와의 두 번째 전투에서 아드리아노플Adrianople과 크리소폴리스Chrysopolis까지 추격해 멸했다.
콘스탄틴은 337년 사망할 때까지 유일한 황제로 군림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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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것이 언제였느냐 또는 무엇이냐고 물을 수 없는 역사 
 

역사를 되돌아보는 건 조상들이 과거에 무엇을 했고, 어떤 고통을 받았으며, 또 어떤 즐거움을 누렸는지 알아보는 일이다.
역사를 공부하는 사람에게는 "그것이 언제였느냐?" 하는 궁금증이 생기지만 그런 궁금증을 해결해 줄 사람이 없는 이유는 너무 오래 전의 일인 데다 그에 대한 기록이 불충분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스위스의 유명한 사학자는 역사란 시작으로부터 공부하는 학문이 될 수 없다고 했다.
그리고 "그것이 무엇이냐?"는 질문 또한 역사를 공부하는 사람이 제기할 수 있는 물음이지만 그 질문에 대한 명쾌한 답이 아직 없는 이유는 불충분한 자료 때문이다.

예를 들어2만 년 전에 제작된 것으로 추정되는 조각 한 점이 발굴되었고 이를 프랑스 보르도에 살던 Gravettian의 것으로 추정한다.
오늘날의 정황에서 보면 매우 표현적인 작품이다.
아주 못생겼고 기괴한 형상의 이 누드 조각을 보고 "무엇이냐?"고 묻는다면 대답은 "글쎄"일 것이다.
섣불리 그것은 여신을 상징한 것이라고 말한다든가 인류의 멸망을 막고 종족을 보존하기 위해 남자를 여성적 모습으로 재현해서 사람들에게 경각심을 주려는 Gravettian의 문화라고 말하고 싶지만 이는 어디까지나 짐작일 뿐 증명할 수 있는 말이 못된다.
역사지식이 되지 않는다.
이 누드 조각은 여태까지 발견한 남자를 상징하는 조각들 중 가장 표현이 현저한 형상이며 사내가 여자의 몸을 하고 있어 흥미거리로서 어쩌면 이것은 남자를 여성적으로 상징했다기보다는 여자의 누드에 못생긴 사내의 얼굴을 부착한 우리가 발견한 첫 번째 조각일 수도 있다.
말하자면 그렇다는 것이다.

역사를 공부할 때 언제 그리고 무엇이냐 하는 질문은 의당 생기겠지만 그것들에 대한 답을 우리가 찾을 수 있을 거라고 기대해서는 안 된다.
적당히 알 수밖에 없으며 그런 정도에서 만족해야 하는 것이 역사를 공부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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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장 오래된 예술품? 
 

가장 오래된 예술품?으로 독일의 지역 Neanderthal에서 발견된 구석기시대 묘비가 있는데 약 3만 5천 년 전에 제작된 것으로 추정된다.
아프리카 동굴 속에 그려진 벽화들 중에는 무려 2만 7천 년 전에 제작된 것들도 있고, 오스트랄리아에 있는 동굴벽화는 적어도 2만 년 전에 제작된 것으로 추정한다.
앞으로 구석기시대에 제작한 벽화들이 세계 도처에서 더 발굴될 텐데 그렇게 되면 새로운 형태의 벽화와 좀더 오래된 것들이 우리의 궁금증을 어느 정도 풀어줄 것이다.

우리의 궁금증을 다소 풀어주는 대부분의 오래된 예술품들은 프랑스 남서쪽과 스페인 북쪽에 있는 동굴에서 발견되었으며 그것들은 작은 형상의 돌, 뼈다귀, 야성을 상징한 흙으로 빚은 조각, 장식적 물체들로 연장, 무기, 그리고 벽과 천장에 그려진 그림들로 주로 동물들을 주제로 한 것들이다.
미술책에 나오는 라스코Lascaux 동굴벽화는 1940년 소년들에 의해서 우연히 발견된 것으로 아직까지는 유럽인 최초의 사실주의 그림이다.
벽에 그려진 소와 사냥장면은 원시인이 기억을 더듬어 상황을 재현했음을 짐작할 수 있다.
그들에게 재현하려는 의지가 있었음을 또한 알 수 있다.

벽화를 보면 사냥꾼이 뻗어있는데 아마 사냥하던 중에 거대한 들소의 날카로운 뿔에 받혀 죽은 것으로 보인다.
땅바닥에는 그가 사용하던 창이 놓여져 있고 다른 창 하나는 그가 들소의 배를 찔렀으므로 배에 꽂힌 채 땅에 넘어져 있다.

"그것이 무엇을 상징하느냐?"고 묻는다면 사냥에 실패한 사냥꾼의 죽음이라고 대답해야 할 것이다.
이 장면은 죽은 사냥꾼의 동료에 의해서 그려졌을 텐데 동료는 이 그림을 기억을 되살려 그리면서 들소를 더이상 두려워하지 않겠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들소를 그리면서 두려움을 떨쳐냈을 것이다.

또 한가지는 원시인들에게 동굴은 가장 안전한 장소였을 것이다.
동굴은 그들에게 성소나 다름 없었을 것이다.
들소를 벽에 그린 데서 사냥에 필승하려는 저의를 알 수 있을 것 같다.
그리고 거대한 들소는 실재보다 작게 그린 데서 과학적 관찰을 알 수 있으며 큰 것을 작게 그리고 작은 것을 보고 큰 것을 생각할 수 있다면 이는 과학이 아니겠는가!

동굴은 원시인들에게 가장 안전한 지성소나 다름 없었으므로 종교와 과학이 동굴에서 동시에 출발했다고 말할 수도 있다.

다음으로 궁금한 점은 그들이 어떻게 아름다운 색으로 칠했으며 그 색이 여태까지 보존되었느냐 하는 것이다.
그들은 동물의 기름에 색이 있는 돌을 빻아 섞어서 그것을 벽에 짖이겨 발랐다.
동굴은 통풍이 잘 되어 있어 채색이 보존될 수 있었다.
학자의 말에 의하면 원시인들이 동굴에서 이런 그림을 그릴 때 프랑스 인구가 약 2만 명이었을 것으로 추정한다.
세계인구는 약 1억이었을 것으로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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