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자리는 <미술가 열전> 머리말에 적었다 
 

16세기 초 이탈리아는 정치적 소요가 심해 각 지역들은 서로 상이한 양상으로 혼란을 겪게 된다.
따라서 16세기 중엽 피렌체 미술은 궁정미술이 전부였다.
도시의 체제가 너무 독재적이어서 율리우스 2세의 로마에서와 같은 인문주의적 예술이 꽃필 수 없었으며, 또한 너무 세속적이어서 미켈란젤로의 말년 작이나 후기 로미 매너리즘 회화 같은 정신적인 작품들이 나올 수 없었다.

16세기 중엽의 피렌체 회화를 알기 위해선 바자리의 저서를 읽어야 한다.
그의 저서 외에도 첼리니가 쓴 금세공사의 조각가의 예술에 관한 논문이 있으며, 베네데토 바르키가 쓴 <교훈집> 등 여러 권의 책이 있지만 이것들은 바자리의 저서를 통해 알 수 있는 것들을 보충해주고 확인해주는 정도에 그칠 뿐이다.
바자리의 <예술가 열전>만이 유일하게 이론적 관점에서 중요하게 취급된다.

바자리는 <미술가 열전> 머리말에 적었다.

우리의 미술은 단지 모방일 뿐이다.
자연의 모방이 대부분이고 그 다음으로 사람은 스스로 높이 오를 수 없기 때문에 그 자신보다 더 낫다고 판단되는 사람들이 제작한 작품을 모방하기도 한다.

이 말에 깔려 있는 바자리의 주장하는 바는 화가에게는 자연에 대한 묘사보다도 다른 화가의 작품을 연구하고 배워야 한다는 점이다.
이에 대해 바자리는 자신의 취향으로 볼 때 지나치게 자연적인 양식을 가진 티치아노에 관해 언급하면서 적었다.

고대와 현대의 걸작들을 그려보지도 않고 연구해보지도 않은 사람은 자연으로부터 모사해 낸 것을 개선시키지도 못할 뿐더러 미술이 자연을 능가할 수 있도록 그것에 우미와 완벽함을 줄 수도 없다.
미술이 자연을 능가할 수 있다는 생각이 바자리의 굳은 신념인 듯 <미술가 열전> 전편을 통해 여러 차례 반복되고 있다.
따라서 화가의 유일한 희망은 가능한 한 자연을 충실히 따르는 데 있다는 레오나르도의 견해와는 상당히 거리가 있음을 보여준다.
실제로 바자리는 도메니코 폴리고의 전기에서 미와 자연주의를 다음과 같이 대비시켰다.

화가가 실물 그대로 그렸다고 하는 얼굴이, 예를 들어 코는 휘고, 한 입술은 작고 또 다른 입술은 크며, 다른 부분들도 기형적인 모습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화가가 대상 모델의 표정을 잘 잡았기 때문에 실물과 흡사한 얼굴 초상 몇몇을 본 적이 있다.
반면 많은 대가들은 묘사하고자 하는 대상과 자신들의 그림이 유사한가 하는 문제를 전혀 고려하지 않고 예술을 한다는 입장에서 절대적으로 완벽한 초상화와 그림들을 그려내기도 한다.
모름지기 초상화를 완벽한 인물상으로 나타내려면 어떻게 그려야 하는가 하는 걸 생각하지 말고 그림의 상이 실재 인물과 흡사하게 보일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한다.
가령 어떤 초상화가 아름답기도 하고 실물과 비슷하기도 하다고 하자.
그렇다면 그것은 희귀한 작품이라 불릴 것이며 그 초상화를 그린 화가는 진정으로 우수한 예술가라고 평가받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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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odernity의 이해 
 
근대modern의 의미는 중세 초기 모데르누스modernus란 말에서 유래했는데
이는 '현존하는 것 that which is present' 혹은 '우리 시대의 of our time'라는 뜻이며 좀더 넓은 의미로는 '새로운 new or novel'이란 뜻이다.
어원적으로 근대는 라틴어 모도modo에서 왔고 이는 '바로 지금 just now'이란 의미이다.
모더니즘이란 말로 근대성modernity에 대한 개념이 명료하게 확립된 건 19세기에 들어서였으며 과학과 물질의 발달과 더불어 계몽주의에서 비롯했는데
계몽주의의 바탕에는 이성과 자유에 대한 중산층의 신념이 깔려 있었다.

예술에 있어서 근대성에 대한 자각은 프랑스 작가 스탕달Stendhal(본명은 Marie-Henri Beyle, 1783-1842)의 아방가르드avant-garde 정신에 대한 강조에서 비롯했다.
스탕달은 작가와 예술가를 근대성의 투사들로 보았는데
투사란 앞장을 선 용기 있는 사람들로 이를 훗날 아방가르드라고 불렀다.
호스트 윌드마 잰슨Horst Woldemar Janson과 안토니 잰슨Anthony Janson은 공저 <미술의 기본 역사 A Basic History of Art>에서 "근대에 왜 투사들이 요구되었을까?"라고 자문하고 다음과 같이 대답했다.
"왜냐하면 시대가 새로운 것들을 천천히 받아들여 현재에 유효하게 하는 것이 아니라 미래에서야 유효하게 하기 때문이었다."

근대성에 대한 정의는 19세기 중반에 좀더 구체적으로 내려졌는데
프랑스 시인 샤를 보들레르Charles Baudelaire(1821-67)에 의해서였다.
미술사에서 그 시기를 말하면 회화에서는 마네와 모네를 중심으로 인상주의 스타일이 성행할 때였고, 조각에서는 로댕이 독보적인 존재로 위상을 떨칠 때였다.

보들레르는 말했다.
"근대성은 일시적인 것,
우발적인 것,
예술의 절반으로 나머지 절반은 영원하고 불변하는 것이다."

도시에 미의 근원이 존재한다고 말한 보들레르는 예를 들어 기관차같은 기계적 고안물들을 유기적인 것 대신 미의 상징들로 간주했다.
그는 근대성과 모더니즘 사이의 분리를 강조하면서 계몽주의로부터 비롯한 이성과 진보에 대한 신뢰를 독려했다.
그는 모더니즘이 미래를 지향하는 데 비해 근대성은 발전하는 현재에 관심을 기울이는 것으로 보았다.
예술에 있어서 모더니즘은 새로운 스타일을 창조하는 자유와 시대의식, 그리고 예술을 통해 사회에 변화를 주는 것이었다.
예술가들은 새 스타일과 새 사회를 건설함으로써 세계를 변화시킬 의무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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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존인물 예수는 어떻게 생겼을까? 

 
우리가 떠올리는 예수의 모습은 영화나 그림에서 본 모습들 가운데 하나일 것이다.
대부분의 성화에 나타난 예수의 공통점은 큰 키에 건장하고 미남이라는 것이다.
예술가들이 어디서 그처럼 잘생긴 모델들을 구해왔는지 궁금하다.
16세기 이탈리아의 예술가이자 전기작가 바자리Giorgio Vasari(1511-74)에 의하면 레오나르도 다 빈치는 <최후의 만찬>을 그릴 때 거리를 헤집고 다니면서 예수와 제자들을 위한 모델을 찾았다고 한다.

실존인물 예수는 어떻게 생겼을까?
유대인들의 규정에 의하면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는 설교자는 키가 크고 건장해야 한다.
예수의 키가 작다거나 허약했다는 기록이 따로 없는 한 그 역시 큰 키에 건장한 모습이었을 것으로 짐작된다.
하지만 잘생긴 얼굴이란 근거는 없다.
예수의 얼굴에 관한 유일한 언급을 요한복음서에서 본다.
"당신은 아직 나이가 쉰도 안 되었는데 아브라함을 보았단 말이오?"
(요한복음서 8:57)

서른서너 살 된 예수가 자신은 아브라함이 있기 전부터 있었다는 의미의 말을 하자 사람들은 위와 같은 말로 질책했다.

예수가 나이에 비해 늙은이처럼 보인 이유는 무엇일까?

그의 얼굴에는 근심의 그늘이 드리워져 있었고 주름이 졌던 것 같다.
그것은 그만큼 고뇌하는 시간들이 많았기 때문이리라.
위의 말에서 그의 생애가 편치 않았음을 알 수 있다.

그는 유대교의 모든 짐을 대신 졌기 때문에 고뇌할 수밖에 없었다.
유대교의 짐이란 구약성서에 나오는 613가지나 되는 마땅히 지켜야 할 하나님의 법을 말한다.
하나님의 백성이 되기 위해서 유대인들은 그토록 많은 제제를 받았던 것이다.
힘에 겨운 일임에 틀림 없다.
613가지나 되는 율법에는 구레나룻을 잘라서는 안 된다는 규정까지 있다.
법을 어기지 않는 결백한 유대인이 되기 위해서는 지나칠 정도로 생활에 간섭을 받아야 했다.
예수는 그러한 간섭으로부터 사람들을 자유롭게 해주기 위해 그 짐들을 대신 지고 율법학자들과 신학적 논쟁을 벌어야 했다.

여기서 신학적 논쟁이란 오늘날처럼 고상하게 의견을 교환하는 일이 아니었다.
목숨을 건 투쟁이었다.
논쟁에서 지면 정죄를 받아 중의회에 회부된다.
신성모독죄가 적용되면 돌팔매로 목숨을 빼앗기고 만다.
검사와도 같은 율법학자들과 논쟁을 한다는 것은 검사보다 더 법에 정통해야 할 뿐 아니라 검사의 책략까지도 알아채야 하는 일이다.
여간 긴장되는 일이 아니다.
예수의 얼굴에 근심이 없고 주름이 생기지 않았다면 오히려 이상한 일이다.
자신을 변호하는 일이란 늘 이맛살이 찌푸려지는 일이 아닐 수 없다.


이 글은 나의 저서 <예수 이야기>에서 발췌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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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비드의 야심과 나폴레옹의 꿈>(미술문화)에서  
 
백발의 뷔란트는 웃으면서 말했다
 
1808년 10월 나폴레옹 황제는 자신이 점령한 곳 바이마르를 방문했다.
황제는 궁정 고문 뷔란트와 기독교에 대화하던 중 예수가 과연 역사적인 인물인지 의문시된다고 말했다.
그러자 백발의 뷔란트는 웃으면서 말했다.
"전하, 예수가 역사에 존재했느냐 아니냐 하고 묻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을 저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율리우스 카이사르가 존재했는가 또는 전하께서 살고 있는가 어떤가를 의심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어리석다고 생각됩니다."

유대의 역사가 플라비우스 요세푸스Flavius Josephus가 서기 93년경에 쓴 <유대 고대사>는 유대의 첫 역사책으로 그 책에는 "이른바 그리스도라 하는 예수의 형제 야고보"에 관한 기록이 있다.
예수가 역사적으로 존재했음을 말해주는 대목이다.

사제는 재판을 위해서 최고회의를 소집하고 이른바 그리스도라 하는 예수의 형제 야고보와 몇몇 다른 사람들을 출두시켰다.
그는 이들을 율법을 어긴 자들이라고 고소하고 돌로 쳐 죽이라고 판결했다.

예수의 동생 야고보는 62년에 처형당했는데 동일한 이름을 가진 예수의 제자, 즉 세베대의 아들 야고보와 혼돈해서는 안 된다.
세베대의 아들 야고보는 44년에 이미 처형당했다.
요세푸스는 예수의 이름이 여호수아Jehosuah로 아주 흔한 이름이라고 했다.
헤브라이어 여호수아의 애칭이 예수아Jeschua이며 이를 그리스어로 표기하면 예수Jesus가 된다.

요세푸스 당시는 초대 교회의 세력이 확장되고 있을 때였다.
따라서 그가 의도적으로 기독교인들에게 물리하지 않도록 기록했을 가능성이 있으므로 전적으로 신뢰할 수는 없지만 예수에 관한 드문 역사적 기록이라서 문맥을 정돈하면 다음과 같다.

이때쯤 지혜로 충만한 사람(우리가 그를 인간이라고 부르는 것이 허용된다면) 예수가 살았다.
그는 말하자면 전혀 믿기 어려운 일들을 행했는데 즐겨 지혜를 얻고자 하는 사람들의 스승이었다.
많은 유대인과 많은 이방인이 그에게 나아갔다.
그는 그리스도(메시아)였다.
우리 가운데서 계획된 고소로 빌라도는 그에게 십자가형을 선고했다.
물론 전에 그를 사랑했던 이들이 오늘날 그에게 충성하지 않는 것은 아니었다.
그는 하나님이 보낸 많은 선지자들이 그에 대한 수천 가지 올라운 일들을 선포했던 대로 사흘만에 다시 살아나서 그들에게 나타났다.
지금까지도 그의 이름을 따라 그리스도인이라 불리우는 사람들이 사라지지 않고 있다.

요세푸스의 또다른 저서 <유대인 전쟁> 슬라브어 번역본에는 예수의 신문과 처형에 대해 추가로 언급되고 있는데,
그 내용이 기독교의 전통을 닮고 있어 언급 의도가 의심스럽기는 하지만 흥미로워서 옮기면 다음과 같다.
본디오 빌라도는 예수가 자신의 아내의 병을 고쳐주었기 때문에 그에게 감사하는 마음으로 유죄판결을 내리기를 거절했으나 그 대신 율법학자들에게 예수를 그들의 뜻대로 하도록 허락했고
그래서 그들이 예수를 십자가에 못박았다는 것이다.
요세푸스가 전하는 내용이 다소 의심스럽다 하더라도 예수가 실존했다는 데는 의심의 여지가 없는 것 같다.

로마의 역사가 타키투스가 110년경에 쓴 <연대기>에도 예수가 실존인물이라는 기록이 남아 있다.
타키투스는 64년에 네로 황제가 로마 시에 불을 질렀다는 혐의에서 벗어나려고 기독교인들에게 책임을 전가하여 그들을 박해했다고 회고하면서 이런 기록을 남겼다.

... 그리스도인christian이란 이름을 가진 사람들이 있었다.
이 이름은 티베리우스 황제 때 본디오 빌라도 총독에 의해 처형당한 그리스도Christos에게서 유래했다.

한편 예수의 생애에 관해 아주 구체적으로 기록한 네 사람이 있는데 바로 공관복음서와 요한복음서의 저자들이다.
공간복음서는 동일한 견해에 따라 씌어졌다고 해서 부르는 말로 마태, 마가, 누가의 복음서들을 지칭한다.
가장 먼저 마가가 60년경에 복음서를 썼고,
요한이 가장 늦은 90년에 썼으며,
그 사이에 마태복음서와 누가복음서가 씌어졌다.

네 사람은 우리가 궁금증을 쉽게 풀 수 있도록 예수의 생애를 시기적으로 일목요연하게 정리하지는 않았다.
전하는 내용들도 제각기 달라 우리를 혼란스럽게 만들기도 한다.
제자들은 각자의 편집의도에 따라 예수의 생애에 관련된 에피소드들을 수집했는데 그들의 편집의도란 신앙적인 관점에서 그의 생애를 이해하려는 것이다.
그러므로 복음서 저자들의 신앙적 관점들을 이해하지 못한다면 복음서에서 접하는 예수의 생애는 오류투성이가 되고 말 것이다.
네 복음서들을 비교하여 재편집하면서 읽는다면 보다 객관적인 이해를 얻을 수도 있다.

하지만 그 과정에서 우리 자신 역시 또다른 신앙적인 관점에서 그의 생애에 접근하고 있다는 것을 느끼게 될 것이다.
한 사람의 생애에 대한 믿음 없이 그 사람의 생애를 지식의 대상으로서만 이해하려고 한다면 종교의 진면목을 놓치게 된다.
복음서 저자들과 마찬가지로 우리도 개개인의 신앙적 관점을 갖고 예수의 인생에 다가가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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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시에 대한

한국시에 대한 최병현 교수의 시론이 또한 절묘해 옮김니다.

한국시

한국 현대시의 경우 시적인 절제poetic discipline는 어쩌면 한용운으로부터 시작할는지 모른다.

"나는 서정시인이 되기에는 너무도 소질이 없나봐요.
즐거움이니 슬픔이니 사랑이니 그런 것은 쓰기가 싫어요."

내가 의미하는 시적인 절제란 파운드나 엘리엇 등 서구의 고전적 현대시인들이 강조해 온 시인의 언어적 정서적 단련과 별반 다르지 않다.
물론 한용운이 파운드나 엘리엇처럼 어떤 고전적인 기질classical temper을 가졌다고 말하기는 어렵겠으나 그가 처한 당시의 한국적인 상황을 생각해 볼 때 그나름대로 상당한 성취요 성숙한 자세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김소월의 시는 그것이 지닌 자연스런 리듬에도 불구하고 단조롭고 지루한 감을 주고 있다.
이유는 시적인 절제라는 관점에서 볼 때 필요이상으로 감정을 풀어놓는데turning loose of emotion 있지 않을까?

"죽어도 아니 눈물 흘리오리다."

얼핏 들으면 대단한 결심이요 철저한 자제를 표현하는 것 같지만,
시적인 차원에서 생각해 볼 때 상당히 물컹한 백도 복숭아 같은 표현이 아닐 수 없다.

시는 이상적인 것일수록 지성과 감성간에 어떤 적절한 균형을 형성하고 있다.
셰익스피어의 시가 대표적인 일례일 것이다.
극단적인 셰익스피어를 상상할 수 업을 것이다.
중용은 윤리에만 국한되는 문제가 아니라 예술에도 적용되는 원리이다.
논어는 이 원리를 애이불상이란 말로 표현하고 있다.
감성의 독성을 중화시킬 지적인 긴장은 소월 시에 있어 가장 아쉬운 요소가 되고 있다.
한용운은 어쩌면 자신의 고백과는 달리 '즐거움'이니 '슬픔'이니 '사랑'이니 하는 말을 어느 다른 시인보다도 가장 많이 사용한 시인일는지 모른다.
그러나 그의 서정은 감정의 홍수가 제방을 무너트릴 정도는 아니다.

그렇다면 한용운은 시적인 절제를 이해했을까?

그가 시사하고 있는 시적인 절제란 단순히 감성과 지성의 균형을 의미하는 것에 불과한 것이 아닐까?

시적인 절제는 감성과 지성의 훈련인 동시에 또한 언어와 표현의 정확성에 대한 열정을 의미한다.
이 같은 절제를 즐기는 시인에게 있어 시는 "영감에 찬 과학 inspired science"일 수밖에 없다.
단어 하나 하나가 폭탄과 같은 위력을 가질 수도 있고 한 줄의 공백도 바다와 같은 여백으로 변할 수 있다.
파운드는 시작을 대리석을 조각하는 것에 비교한 바 있다.
끌과 망치로 깎고 두들겨 돌과 같이 단단한 시를 생산한다는 것이다.

한국시 가운데 차돌처럼 단단한 시가 있는지, 있다면 줍고 싶다.
십년 동안에 삼백줄밖에 안 썼다고 말한 하우스만의 자랑은 시적인 절제의 관점에서 볼 때 시적인 자랑일 뿐 아니라 도덕적인 자랑이다.

만일 한국시의 시적인 절제가 몸과 마음을 삭발한 한용운으로부터 시작되었다고 말할 수 있다면,
한국시의 모더니즘은 턱수염을 기른 이상으로부터 시작한다고 해도 좋을 것이다.

"이런 시는 그만 찢어버리고 싶더라."

이상의 '이런'은 '산유화'에서 소월의 '저'만큼이나 중요하다.
마리엔 무어Marianne Moore의 'I, too, dislike it'을 연상시킨다.
두 시 다 시에 대한 애증을 적중하게 표현한 점에서 모두 인상적이다.
시를 모던하게 만드는 것은 시인이 가진 자의식self-consciousness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
자의식은 항상 시 속에서 호르몬처럼 아이러니를 분비한다.
그리고는 아이러니는 현대인의 모순된 의식과 부조리를 반영한다.
이상의 한국문학에 대한 공헌은 당시 한국문학에 있어 단순한 자의식의 구조를 복잡하고 미묘하게 설계한 사실에 있다.

마치 서구인들의 그것처럼, 그러나 시에 있어서 복잡하거나 지적인 것은 시와는 속성이 다른 이물질일 경우가 많다.
그것은 미치고 싶은 시인을 승천하지 못하도록 발목을 잡기 때문이다.

한국인의 정서와 신명을 가장 잘 표현할 수 있는 시는 과연 어떤 것일까?

그리고 현대시는 과연 한국인의 정서와 신명을 표현할 수 있는 이상적인 형태를 갖춘 것일까?

왜 어떤 가락이나 리듬은 쉽게 가슨에 닿고 어떤 것들은 어색하고 낯설게만 느껴지는 것일까?

아리랑은 우리가 전통적으로 불러왔기 때문에 낯익은 것일까 아니면 우리에게 체질적으로 맞는 것이기 때문에 낯익게 느껴지는 것일까?

태어난 지 채 백년도 못되는 한국 현대시, 만일 처음으로 되돌아가 다시 시작한다면 우리의 현대시는 과연 어떤 모습이 될 수 있을까?

우리 현대시 속에 발견되는 특성은 과연 필연적인 것이었을까?

우리 현대시는 근본적으로 민족적 전통과 외부세계의 영향이란 두 개의 흐름이 탄생시킨 일종의 변증법이다.
지키고자 하는 열정과 새롭게 변화시키고자 하는 의욕 사이에서 발생한 고질적인 갈등과 화해이다.
이것이 어찌 문학만의 현상이리요만, 가변적인 세계 속에 불변의 세계를 세우고자 하는 것은 시를 포함한 모든 예술의 목표일 것이다.

그러나 헤라클리투스의 강물적인 입장에서 보면, 계곡에서 흘러온 냇물이건 화산이 토해낸 용암이건 별 의미가 없다.
흘러가다 보면 섞이게 되고 섞이다 보면 본래의 모습을 잃어버리기 때문이다.

인간이 꿈꾸는 불변은 환상일 뿐이다.
변화만을 제외하고서 불변하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죽음조차도 죽게 된다.
이렇게 볼 때 헤라클리투스의 강물에 띄운 나의 시들이야말로 너무도 덧없고 부질없는 것 같다.
종이배나 다를 바 없는 이들이 일으키는 몇 개의 하얀 거품, 그것이 내가 평생 일궈온 것이려니 생각할 때 이 문제에 대한 나의 탄식과 노래는 내 시를 관통하는 큰 물줄기가 될 수밖에 없다.
떠내려가면서 바라보는 세계는 아름답다. 슬프도록 아름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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