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시에 대한
한국시에 대한 최병현 교수의 시론이 또한 절묘해 옮김니다.
한국시
한국 현대시의 경우 시적인 절제poetic discipline는 어쩌면 한용운으로부터 시작할는지 모른다.
"나는 서정시인이 되기에는 너무도 소질이 없나봐요.
즐거움이니 슬픔이니 사랑이니 그런 것은 쓰기가 싫어요."
내가 의미하는 시적인 절제란 파운드나 엘리엇 등 서구의 고전적 현대시인들이 강조해 온 시인의 언어적 정서적 단련과 별반 다르지 않다.
물론 한용운이 파운드나 엘리엇처럼 어떤 고전적인 기질classical temper을 가졌다고 말하기는 어렵겠으나 그가 처한 당시의 한국적인 상황을 생각해 볼 때 그나름대로 상당한 성취요 성숙한 자세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김소월의 시는 그것이 지닌 자연스런 리듬에도 불구하고 단조롭고 지루한 감을 주고 있다.
이유는 시적인 절제라는 관점에서 볼 때 필요이상으로 감정을 풀어놓는데turning loose of emotion 있지 않을까?
"죽어도 아니 눈물 흘리오리다."
얼핏 들으면 대단한 결심이요 철저한 자제를 표현하는 것 같지만,
시적인 차원에서 생각해 볼 때 상당히 물컹한 백도 복숭아 같은 표현이 아닐 수 없다.
시는 이상적인 것일수록 지성과 감성간에 어떤 적절한 균형을 형성하고 있다.
셰익스피어의 시가 대표적인 일례일 것이다.
극단적인 셰익스피어를 상상할 수 업을 것이다.
중용은 윤리에만 국한되는 문제가 아니라 예술에도 적용되는 원리이다.
논어는 이 원리를 애이불상이란 말로 표현하고 있다.
감성의 독성을 중화시킬 지적인 긴장은 소월 시에 있어 가장 아쉬운 요소가 되고 있다.
한용운은 어쩌면 자신의 고백과는 달리 '즐거움'이니 '슬픔'이니 '사랑'이니 하는 말을 어느 다른 시인보다도 가장 많이 사용한 시인일는지 모른다.
그러나 그의 서정은 감정의 홍수가 제방을 무너트릴 정도는 아니다.
그렇다면 한용운은 시적인 절제를 이해했을까?
그가 시사하고 있는 시적인 절제란 단순히 감성과 지성의 균형을 의미하는 것에 불과한 것이 아닐까?
시적인 절제는 감성과 지성의 훈련인 동시에 또한 언어와 표현의 정확성에 대한 열정을 의미한다.
이 같은 절제를 즐기는 시인에게 있어 시는 "영감에 찬 과학 inspired science"일 수밖에 없다.
단어 하나 하나가 폭탄과 같은 위력을 가질 수도 있고 한 줄의 공백도 바다와 같은 여백으로 변할 수 있다.
파운드는 시작을 대리석을 조각하는 것에 비교한 바 있다.
끌과 망치로 깎고 두들겨 돌과 같이 단단한 시를 생산한다는 것이다.
한국시 가운데 차돌처럼 단단한 시가 있는지, 있다면 줍고 싶다.
십년 동안에 삼백줄밖에 안 썼다고 말한 하우스만의 자랑은 시적인 절제의 관점에서 볼 때 시적인 자랑일 뿐 아니라 도덕적인 자랑이다.
만일 한국시의 시적인 절제가 몸과 마음을 삭발한 한용운으로부터 시작되었다고 말할 수 있다면,
한국시의 모더니즘은 턱수염을 기른 이상으로부터 시작한다고 해도 좋을 것이다.
"이런 시는 그만 찢어버리고 싶더라."
이상의 '이런'은 '산유화'에서 소월의 '저'만큼이나 중요하다.
마리엔 무어Marianne Moore의 'I, too, dislike it'을 연상시킨다.
두 시 다 시에 대한 애증을 적중하게 표현한 점에서 모두 인상적이다.
시를 모던하게 만드는 것은 시인이 가진 자의식self-consciousness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
자의식은 항상 시 속에서 호르몬처럼 아이러니를 분비한다.
그리고는 아이러니는 현대인의 모순된 의식과 부조리를 반영한다.
이상의 한국문학에 대한 공헌은 당시 한국문학에 있어 단순한 자의식의 구조를 복잡하고 미묘하게 설계한 사실에 있다.
마치 서구인들의 그것처럼, 그러나 시에 있어서 복잡하거나 지적인 것은 시와는 속성이 다른 이물질일 경우가 많다.
그것은 미치고 싶은 시인을 승천하지 못하도록 발목을 잡기 때문이다.
한국인의 정서와 신명을 가장 잘 표현할 수 있는 시는 과연 어떤 것일까?
그리고 현대시는 과연 한국인의 정서와 신명을 표현할 수 있는 이상적인 형태를 갖춘 것일까?
왜 어떤 가락이나 리듬은 쉽게 가슨에 닿고 어떤 것들은 어색하고 낯설게만 느껴지는 것일까?
아리랑은 우리가 전통적으로 불러왔기 때문에 낯익은 것일까 아니면 우리에게 체질적으로 맞는 것이기 때문에 낯익게 느껴지는 것일까?
태어난 지 채 백년도 못되는 한국 현대시, 만일 처음으로 되돌아가 다시 시작한다면 우리의 현대시는 과연 어떤 모습이 될 수 있을까?
우리 현대시 속에 발견되는 특성은 과연 필연적인 것이었을까?
우리 현대시는 근본적으로 민족적 전통과 외부세계의 영향이란 두 개의 흐름이 탄생시킨 일종의 변증법이다.
지키고자 하는 열정과 새롭게 변화시키고자 하는 의욕 사이에서 발생한 고질적인 갈등과 화해이다.
이것이 어찌 문학만의 현상이리요만, 가변적인 세계 속에 불변의 세계를 세우고자 하는 것은 시를 포함한 모든 예술의 목표일 것이다.
그러나 헤라클리투스의 강물적인 입장에서 보면, 계곡에서 흘러온 냇물이건 화산이 토해낸 용암이건 별 의미가 없다.
흘러가다 보면 섞이게 되고 섞이다 보면 본래의 모습을 잃어버리기 때문이다.
인간이 꿈꾸는 불변은 환상일 뿐이다.
변화만을 제외하고서 불변하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죽음조차도 죽게 된다.
이렇게 볼 때 헤라클리투스의 강물에 띄운 나의 시들이야말로 너무도 덧없고 부질없는 것 같다.
종이배나 다를 바 없는 이들이 일으키는 몇 개의 하얀 거품, 그것이 내가 평생 일궈온 것이려니 생각할 때 이 문제에 대한 나의 탄식과 노래는 내 시를 관통하는 큰 물줄기가 될 수밖에 없다.
떠내려가면서 바라보는 세계는 아름답다. 슬프도록 아름답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