플라토닉 러브 
 

'플라토닉 러브 Platonic Eros'와 '소크라테스 러브 Socrates Eros'란 말을 만든 사람은 피치노Marsilius Ficinus(1433-99)였다.
그는 플라톤의 저서 <향연>에 대한 주석을 쓰면서 이 말을 사용했고 그 밖의 글에서도 사용했다.
'플라토닉 러브'란 플라톤에 의해 설명된 에로스를 의미하며 피치노는 신성한 사랑의 뜻으로 이 말을 사용했다.
그는 다른 사람을 사랑하는 것을 창조주에 대한 사랑의 준비로 보고 이것이 인간의 욕망 가운데 있는 참된 내용이며 또한 실재 목표로 인식했으며 이러는 중 신성한 선과 아름다움의 광휘가 나타난다고 보았다.
그는 참된 사랑이나 우정은 늘 상호 관련이 있다고 보았다.

두 사람의 참된 관계는 인간의 본질적인 것에서 발견되는 교감으로 창조주에 대한 각자의 본래 사랑에 기초한다.
따라서 두 친구 사이의 사랑이란 있을 수 없고 반드시 셋의 사랑인데 두 인간과 창조주의 사랑인 것이다.
이같은 플라토닉 러브는 16세기 이탈리아와 유럽 문학에 막대한 영향을 주었다.
많은 서정시인들이 자신들의 사랑을 피치노가 말한 플라토닉 러브로 반영했으며 투스칸Tuscan의 시인들과 페트라르카F. Petrarch XII(1304-74)에게도 예외는 아니었다.

에로스의 개념은 17세기와 18세기에 와서 주로 심리적인 작용으로 인식되었으며 주로 소설과 시 그리고 격언에서 언급되었다.
이웃에 대한 사랑과 창조주에 대한 사랑은 문제가 없었지만 성적 사랑은 도덕적으로 많은 문제를 야기시켰는데
결혼 이전의 성적 사랑은 비난을 면치 못하였다.

내친김에 에로스를 철학의 중요한 개념으로 사용한 플라톤에 관해 잠시 언급하려고 한다.

플라톤은 <향연>에서 에로스에 관해 장황하게 언급했는데
그에게 에로스는 미에 대한 사랑, 즉 이상적인 형상이었다.
플라톤은 철학적 훈련을 통해 교육을 받기 전까지는 그 누구도 이상적인 것을 욕망하지 못한다고 했다.
그에게 미는 질료적 실재와 이상적 실재 사이에 교량적인 역할을 하는 것이었다.
성적 사랑 자체는 사랑의 형상들 중 가장 저급한 것이지만 그럼에도불구하고 남자가 여자에게 끌리게 하는 것은 미로서의 이상적인 사랑의 씨앗이다.

사랑에 대한 개념은 르네상스 네오플라톤주의에 와서 다양하게 변했다.
이는 플라톤의 사유들을 총괄해 새로운 형식으로 가톨릭적 중세로 전달한 플로티누스Plotinus(203-270)에 의해서였다.
그는 사랑을 창조주, 마귀, 열정 세 가지 형상으로 분류한 후 창조주의 사랑을 천상의 아프로디테(에로스)와 지상의 아프로디테로 구분했다.
천상의 아프로디테는 이데아들의 사랑과 지성적 세계의 영혼에 대한 영감을 준다.
지상의 아프로디테는 결혼에 거하며 감관세계의 영혼이다.
마귀의 사랑은 개별적인 인간의 영혼으로 예증된다.
열정은 절도있는 사람에게 미에 대한 사랑이며 또한 추한 물질계 안에 전적으로 거하는 자들에게는 성적 즐거움에 대한 사랑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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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시오도스가 언급한 에로스

 
에로스의 역사를 혹은 기원을 알아본다.
이 말은 플라톤으로부터 네오플라톤주의자들은 물론 초대 기독교와 이탈리아 르네상스 때까지 널리 통용되었다.
에로스는 성적 열정으로부터 배움에 헌신하는 것에 이르기까지 다양하지만 궁극적인 대상은 아름다운 것들이었다.
창조주가 자신이 창조한 것들을 관조하는 장점이 창조의 미이며,
세상의 미를 느끼는 것이 세상을 에로스하는 것이고,
이는 곧 창조주를 사랑하는 행위이다.
이같은 형이상학적 개념으로 확고해지기 전의 에로스의 의미를 그리스 고전에서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호메로스가 에로스란 말을 사용했는데
그는 창조주를 지칭해서 이 말을 사용했던 것이 아니라 일반 명사인 사랑, 욕망의 뜻으로 사용했다.
하지만 헤시오도스Hesiod(기원전 700년경)의 <신통기 Theogony>에는 에로스가 원시시대 세 신들 가운데 하나로 등장하며 나머지 두 신들은 혼돈과 대지이다.
에로스에게는 대를 이을 자식이 없어 신들의 계보에는 빠졌지만 그는 두 동료 불멸의 신들보다 훨씬 권력을 휘둘렀다.
그는 사지가 무력해졌으며 신들과 인간 모두의 이성에 무력해졌다.

헤시오도스가 언급한 에로스는 이성의 적인 권력에 자신을 부속시킨 것으로 되어 있다.
이 점은 소포클레스Sophocles(기원전 496-406년경)의 <안티고네 Antigone>에서 발견되는데 안티고네가 죽을 수밖에 없는 운명인 이유로 크레온Creon이 그녀가 오빠의 시신을 장사지낸 사실을 알렸을 때 들려오는 합창 속에서 발견된다.
여기서 에로스는 안티고네의 비극을 알린 신으로 등장한다.
에로스는 정복하기 어렵고, 파괴적이며, 바다와 들판의 거주자들 중 방랑자의 모습으로 묘사된다.
신들과 명이 짧은 인간은 에로스로부터 도망칠 수 없으며, 그는 자신의 희생자들을 미치게 내몰고 정의를 악으로 전환시킨다.
이상이 그리스 신화에 나타난 에로스의 모습이다.

고대 그리스인은 이성애, 동성애, 자식에 대한 어버이의 사랑, 부모에 대한 자식의 사랑, 부부의 사랑, 형제의 사랑, 우정, 조국에 대한 사랑, 지혜에 대한 사랑 이 모든 사랑의 형상들이 에로스 혹은 필리아philia(자애 혹은 화목의 뜻이다)와 관련이 있다고 보았다.
그들은 사랑이 사람들을 하나의 굴레 안에 매이도록 할 수 있는 능력이 있다고 믿었다.
파르메니데스에 의하면 사랑뿐 아니라 동물들과 우주의 모든 원소들도 이런 힘에 의해 하나가 되는데
그에게 사랑은 여신 필연Necessity이 창조한 것이다.
그는 유일한 참된 실재를 일자the One로 보고 이것이 무한하고 분할할 수 없는 까닭은 사랑이 작용하기 때문인 것으로 보았다.

파르메니데스와 동시대인으로 그보다는 약간 나이가 어린 엠페도클레스Empedocles(기원전 5세기경)의 저작에는 사랑이 우주역사의 진로를 설명해주는 두 우주적 힘들 중 하나로 부상되는데
다른 하나는 투쟁(혹은 미움)이란 존재이다.
엠페도클레스는 일자가 되게 하는 사랑과 많은 것들로 분열시키는 투쟁 이 두 요소가 사물들 속에 내재해 있는 것이 아니라 사물들에 외적으로 작용하는 것으로 보았다.
그는 자연을 조화와 분열의 힘들 사이 긴장 속에 있는 것으로 보았다.

파르메니데스와 마찬가지로 엠페도클레스는 자연을 구형으로 보고 운동을 설명하려고 했는데
그에 의하면 황금시기에는 투쟁 혹은 미움이 밖에 있게 되고 사랑이 안방을 차지하지만 점차 미움이 침투됨에 따라 사랑은 쫓겨나고 드디어 최악의 상태에서 미움이 완전히 안방 안에 있게 되고 사랑은 구형 밖에 있게 된다고 보았다.
다음에는 왜 그런지 분명하지 않지만 그에 의하면 반대의 운동이 시작되어 황금시기가 다시 도래한다.
그러나 영원히 다시 오는 것이 아니라 과거와 같은 주기가 되풀이될 뿐이다.
엠페도클레스는 에로스를 평화와 조화를 여신 아프로디테Aphrodite(사랑, 미의 여신)에게 귀속시켰는데 그에게 아프로디테는 에로스에 대한 또 다른 명칭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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플라톤에게 소크라테스는 가장 이상적인 인간이었다
 

소크라테스가 오르페우스교로부터 많은 영향을 받았음을 플라톤의 저작 <변명 Apology>에서 본다.
신성불경죄로 고발당한 소크라테스가 재판관들 앞에서 한 변명이 이 책에 적혀 있다.

.".. 우리가 죽음을 악이라고 생각하는 건 잘못이다.
왜냐하면 죽음은 꿈이 없는 잠 - 이는 매우 바람직한 일이다 - 아니면 영혼이 다른 세상으로 옮겨가는 것일 테니 말이다.
그리고 만약 그가 오르페우스 혹은 뮤즈, 헤시오도스 혹은 호메루스와 대화할 수 있다면, 이를 위한 댓가로 모든 걸 다 지불하지 않겠는가?
그렇다.
이것이 참이라면 나는 죽고 또 죽을 것이다."

소크라테스의 말에서 그가 영혼이 불멸하다는 신념을 갖고 있었음을 알 수 있고 이것이 그가 오르페우스교에서 받은 영향이다.
이런 그의 신념이 고스란히 플라톤에게 전수되었다.
내가 그리스 고전을 알아야 서양사상 전반을 알 수 있다고 말하는 건 이런 이유 때문이다.
서양사상의 밑바닥에는 이런 이원론이 깊게 뿌리박혀 있다.
정신과 몸을 양분해서 생각한 것이다.

플라톤에게 소크라테스는 가장 이상적인 인간이었다.
인간 중의 인간이었다.
맹자가 공자를 존중한 만큼 장자가 노자를 존중한 만큼 플라톤에게 소크라테스는 가장 훌륭한 인간이었다.
플라톤은 순교자로서의 소크라테스의 죽음에 관해 <파이돈 Phaedo>이란 책에 적었다.
이 책을 쓰기에 앞서 그는 대화편의 <크리톤 Crito>을 썼는데
여기에 소크라테스의 친구들과 제자들이 소크라테스를 구하기 위해 텟살리로 도망칠 수 있도록 계획을 꾸몄다는 이야기가 있다.
소크라테스의 제자들 중에 귀족의 자제들이 많았으므로 능히 있을 수 있는 일이었다.
악법도 법이니까 지키겠다고 도망치지 않고 사형의 날을 맞아 독약을 마신 것은 다 아는 이야기이다.

소크라테스는 사람의 영혼과 몸이 분리되는 것으로 보았다.
자유분방하고 불멸하는 영혼이 몸이라는 형이하학적 물질 속에 갇혀 있는 것으로 보았다.
따라서 죽게 되면 영혼은 몸에서 빠져나와 자유로워진다고 믿었다.
그런 영혼은 앞서 인생을 살았던 오르페우스 혹은 뮤즈, 헤시오도스 혹은 호메루스의 영혼들과 더불어서 즐거운 대화를 할 수 있다고 본 것이다.
세상 밖 어디엔가에서 몸통을 지니지 않은 이런 영혼들이 모여서 지적 대화를 나눌 수 있다고 보고 그는 이런 즐거움을 최상의 즐거움으로 꼽았던 것이다.

박카스에서 오르페우스 그리고 소크라테스로 이어진 영혼불멸사상은 플라톤에게 와서 논리적으로 정연해진다.
이런 사상이 플라톤으로 하여금 실재와 환영, 이데아와 감관의 대상, 이성과 지각, 영혼과 육신 등 이원론적 논리를 만들게 했으며 이런 사상은 서양의 중심이 되었고 근대철학의 아버지 르네 데카르트에게까지 이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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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폴록과 친구들>(미술문화) 중에서 
 

드 쿠닝의 고치고 또 고친 그림

드 쿠닝은 무nothing에서 그림을 그리는 것이 아니라 이미 만들어진 이미지에서 출발점을 찾았다.
대가들의 그림들에서 그리고 상업용 포스터에서조차도 이미지를 빌려올 수 있었고 담배 광고에 나오는 여인의 립스틱 바른 입술도 빌려왔는데
그는 이런 이미지들을 고치고 또 고쳐서 자신이 원하는 이미지가 될 때까지 고쳤다.
그는 1950년부터 <여인 I Woman I>을 출발로 계속해서 여인의 이미지들을 자신의 특허와도 같은 주제로 삼았다.
그는 1950년 6월부터 <여인 I>을 최소한 50번이나 고치고 또 고쳤다.
그가 더이상 고칠 수 없었던 것은 그 그림이 트럭에 실려 화랑으로 운반되었기 때문이다.
그는 “내가 여인에 대한 주제를 계속 유지할 수 있었던 것은 고칠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고 했다.
그는 유화물감보다는 잘 흐르는 아크릴릭을 선호했으며 유화물감에 물이나 솔벤트를 섞어 사용함으로써 마르는 시간을 연장할 수 있었다.
폴록과 완전추상을 추구한 친구 화가들은 그가 인물을 그림으로써 추상표현주의를 버리고 신인간주의를 조장하려 한다고 비난했다.

<여인>에 관해 드 쿠닝의 아내 일레인은 “그가 그린 흉포한 여인은 그와 동거중인 나에게서 비롯된 것이 아니다.
그것은 세 살 때부터 그에게 생긴 이미지였다”고 말해 드 쿠닝이 어머니를 그림에서 사나운 여인으로 묘사했음을 시사했다.
하지만 <여인>은 네덜란드 여인이라기보다는 미국 여인처럼 보인다.
여인이 신고 있는 구두, 드레스, 립스틱, 메니큐어를 칠한 손톱들이 미국 여인임을 시사한다.

평론가 토마스 헤스는 <여인>에 관해 이렇게 적었다.
“시끄러운 파티에서 소녀처럼 … 그저 앉아 있거나 그냥 그곳에 있거나 또는 웃는 모습인데 이는 미국에서 흔한 일이다.”

드 쿠닝은 “나는 단지 내 생각대로 그렸을 뿐이다”라고 했는데
<여인>은 일레인의 말대로 그의 무의식 세계에 있던 어머니의 이미지가 돌출한 것인지도 모른다.

드 쿠닝은 아내 일레인과 처제를 모델로 그리거나 신문·잡지에 소개된 여인의 모습을 그렸다.
그는 운동경기에서 응원하는 소녀들이 점프로 몸을 허공에 띄우는 모습을 이그러진 형태로 그리기도 했다.
그는 캔버스에 물감을 두텁게 바르면서 평평하고 넓게 칠했는데
이는 러시아 화가 샤임 수틴Chaim Soutine의 영향이었다.
그는 1950년에 모마에서 수틴의 그림을 보고 감동했다.

그는 말했다.
“나는 수틴을 선택할 것이며 … 늘 그의 모든 그림에 매료되었다.
수틴은 그림의 표면을 재료처럼 그리며 물질처럼 보이게 구성한다.
그의 그림에는 피부 같고 변모하는 것들이 있다.”

그가 “수틴의 모든 그림”이라고 말했는데
그렇다면 <붉은 옷을 입은 여인 Woman in a Red Dress>도 포함되었을 것이며
따라서 드 쿠닝이 그린 여인의 초상화에는 수틴의 화법이 다분히 응용되었을 것이다.
그는 다양한 색을 사용했는데 색에 대한 아이디어가 생긴 것은 아이스크림을 파는 하워드 존스 레스토랑에 갔을 때였다.
그는 스물여덟 가지나 되는 아이스크림이 물감처럼 보였다고 했다.

드 쿠닝은 1963년 BBC에 방영할 목적으로 대비드 실베스터David Sylvester가 제안한 인터뷰에 응하면서 말했다.

일부 예술가와 평론가들이 내가 <여인>을 그렸다고 공격하지만 이는 그들의 문제이지 내 문제는 아닌 것 같다.
내가 생각하기에 나는 완전추상 화가가 전혀 아닌 것 같다.
오늘날 일부 예술가들은 인물화로 되돌아가야 한다고 생각하는데
‘인물화’라는 말이 웃기는 징조의 뜻이 되고 있다.
네가 붓으로 색을 찍어 어떤 사람의 코를 그린다면 생각해 봐라 이는 이론적으로 철학적으로 웃기는 일이 될 것이다.
오늘날 인간의 이미지같은 걸 물감으로 그린다는 건 웃기는 일이 되는 건 인물화를 그려야 하느냐 안 그려야 하느냐 하는 문제를 우리가 갖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인물화를 안 그리는 건 더 웃기는 일이다.
그래서 나는 나의 욕망을 따라야 한다는 데 두려움을 느끼고 있다.

<여인>은 모든 시대에 그려진 여인과 관련이 있고 난 아마 그런 데서 그려야겠다고 생각한 것 같다.
난 과거와 같은 식으로 여인을 그릴 수는 없었다.
내가 생각한 건 말할 가치도 없는 선, 색, 형상들에 대한 구성, 배열, 관련성, 명암을 제거하는 가운데 그려야 하겠다는 것이다.
난 여인의 모습을 캔버스 중앙에 그렸는데 약간 옆으로 그려야 할 이유가 없기 때문이었다.
난 두 눈, 코, 입 그리고 목이 있는 여인을 그려야겠다고 생각했다.
해부학적 구조를 생각하니 거의 혼란스러울 지경이었다.
그래서 그런 생각을 점차 버리게 되었다.
난 완성할 수 없을 것 같았으며 이제 생각해보니 멋진 아이디어도 아니었던 것 같다.
하지만 다른 예술가들이 특별히 멋진 아이디어를 갖고 있다고 생각되지 않는다.

마티스의 <붉은 블라우스를 입은 여인 Woman in a Red Blouse>을 생각해 봐라.
그게 어디 멋진 아이디어냐!
또는 입체주의자들의 그림을 생각해 봐라.
이제와서 생각하면 한 오브제를 많은 각도에서 바라본다는 게 얼마나 웃기는 일이냐.
구성주의자들의 그림도 마찬가지로 웃긴다.
그들이 그런 아이디어를 가진 것이 좋았던 건 그런 그림들이 그들을 대가로 만들었기 때문이다.
우상·비너스·누드로서의 여인은 그려지고 또 그려져왔다.
렘브란트는 주름이 있는 늙은 남자를 그리기를 원했고 그 늙은이가 그에게는 그림이었다.
오늘날 예술가들은 시대에 뒤떨어진 이유로 그림을 그린다.
그들은 그리고자 하는 대상을 꽉 쥐기를 원한다.
몬드리안을 보자.
그는 대단한 예술가이지만 그의 아이디어들과 순수 조형적인 신조형주의에 관한 이론을 보면 일종의 말도 안 되는 것이다.
몬드리안은 미래의 인생과 미래의 도시를 볼 수 있었다.
난 미래의 도시를 보는 데 전혀 관심이 없다.
난 현재 살아 있는 데에 완전히 만족스럽기 만하다.

내용은 플래쉬 라잇에 직면하듯 흘끗 보는 어떤 것에 지나지 않는다.
내용은 매우 엷은, 엷은 것에 지나지 않는다.
여인의 모습을 그릴 때 나는 작가 거트루드 스타인Gertrude Stein을 생각했는데
거트루드 스타인의 저서에 등장하는 여인으로 “날 어떻게 좋아하죠?”라고 묻는 그 여인을 생각했다.
난 이런 생각을 늘 갖고 있었는데 그림이 어떻게 달라질런지 모르기 때문이다.
여자의 모습은 어떤 식으로라도 달라질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 내용은 발생할 수 있는 거의 모든 걸 해결할 수 있다.

나는 특별한 느낌을 나타내려는 데는 관심을 두지 않았다.
이제와서 그림들을 보니 요란스럽고 사나워보인다.
그림이 우상에 대한 아이디어와 신탁 그리고 무엇보다도 들떠 떠들어대는 것처럼 보인다.
내가 그런 식으로 인생을 관찰하지 않았다면 그렇게 그리는 걸 알지 못했을 거라고 생각된다.
나는 입을 많이 잘라냈다.
첫째, 나는 모든 여인에게서 입이 나타나야 만한다고 생각했다.
아마 그건 동음이어의 익살 같았을 것이다.
아마 그건 성적이었을 것이다.
여인의 모습을 그리면서 난 입 부분을 많이 잘라내면서 입이 있어야 할 곳에 입을 그렸다.
입은 항상 아주 아름답게 그려졌고 내가 그리려는 대상에 큰 도움이 되었다.
내가 왜 입을 그런 식으로 그렸는지는 모르겠다.
메소포타미아의 우상들처럼 늘 뻗뻗하게 선 채로 자연의 힘에 놀라워하여 사람들과의 문제에는 아랑곳하지 않고 하늘을 바라보면서 입을 드러내고 히죽 웃는 그런 여인을 내가 생각했을런지 모른다.

난 의식적으로 웃는 입을 그려야겠다고 마음먹었다.
나는 손이라던가 제스처 등 나머지 부분에 대해서는 어떻게 그려야 할지 알지 못했고 여러 번 실패했다.
어떤 식으로 그려야겠다는 생각을 포기하니까 나중에는 문제가 되지 않았고 그림이 완성되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난 성공할 것이란 자세로 그렸으며 그것이 그저 환상이었다는 걸 알게 되었다.
난 어떻게 훌륭한 그림을 그려야 할 것인가에 대해선 전혀 관심이 없었다.
아주 오랫동안 난 훌륭한 그림 만들기에는 관심이 없었다.
사람들은 “이제 이건 정말로 훌륭한 그림이다” 혹은 “완전한 작품이다”라고 말할 것이다.
난 훌륭한 그림 만들기에 관해 전에는 관심이 있었지만 그건 내 성질에 맞지 않는다는 걸 알게 되었다.
난 완전함이란 생각으로 작업하지는 않았지만 내 한계가 어디까지인가에 관해서는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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윌렘 드 쿠닝, 양식이라는 건 속임수다  

김광우의 <폴록과 친구들>(미술문화) 중에서

 

윌렘 드 쿠닝Willem de Kooning은 1904년 네덜란드의 로테르담에서 태어났고 그의 부모는 그가 세 살 때 이혼했다.
1916년 그는 지방에 있는 상업미술가의 장식 조수로 일하면서 밤에는 로테르담 아카데미에서 1924년까지 수학했다.
이 시기에 그는 같은 나라 사람 피에 몬드리안Piet Mondrian으로부터 주로 영향을 받았다.
그는 1926년에 미국으로 왔는데 “나는 이곳에 예술가들이 있으리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우리는 네덜란드에서 미국에 예술가들이 있다는 말을 들어본 적이 없다.
다만 미국에 가서 열심히 일한다면 편한 인생을 살 수 있으리라고 생각했고 예술을 위해서라면 당연히 유럽으로”라고 훗날 말했다.

그가 친구 화가의 소개로 아실 고르키를 만난 건 1929년이었다.
드 쿠닝은 “나는 네덜란드 아카데미에서 완전히 훈련을 받고 이곳으로 왔지만 고르키는 그런 훈련이 전혀 되어 있지 않았다.
그는 여섯 살 때 조지아주에 있는 티플리스에서 이곳으로 온 후 미국인처럼 성장했다.
그리고 신비스러운 이유로 회화와 예술을 잘 이해하고 있었는데 그는 자연스럽게 알았던 것이다.
내가 더 잘 알고 느끼고 이해했어야 했는데 실제로는 그가 더 잘 알고 느끼고 이해하고 있었다”라고 했다.
드 쿠닝이 고르키를 위해 할 수 있었던 것은 회화 기교를 가르쳐주는 것이었다.

드 쿠닝은 초상과 인물을 주로 그렸는데 알베르토 자코메티의 후기 이미지를 고대하는 것처럼 보였다.
그렇지만 그는 자코메티와는 다르게 더욱 과격한 방법으로 이그러진 사람의 모습을 그렸으며 특히 여인을 기분내키는 대로 이그러뜨렸다.
그는 처음에 입체주의로부터 영향을 받았다.

그는 말했다.
"나는 모든 회화 경향들 중에서 입체주의를 가장 좋아한다.
입체주의 그림은 불확실한 재현의 분위기를 지니며, 시적인 구조 속에는 무엇이든 가능하고, 예술가는 직관을 나타낼 수 있다.
과거의 미술을 버리고자 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보태려고 하는 것이다.
다른 회화에서 내가 받아들이는 요소들은 입체로부터 온 것이다.
입체주의는 하나의 흐름이었지만 하나의 흐름으로 고정되지 않았다."

드 쿠닝은 초현실주의 예술가들의 자동주의 기교를 조심성스럽게 실험하면서 그런 방법에 손질을 가한 후 자신의 그림에 응용했다.
그렇게 해서 그린 그림들은 피카소가 1930년대 말에 환상적인 분위기가 나도록 그린 그림과 유사한 데가 있었다.
그는 초현실주의와 입체주의 회화방법을 개인적인 의도로 합성하면서 분석입체주의 방법으로 색을 제거하기도 했다.
그의 그림에서 꽉찬 형태는 루벤스와 렘브란트의 회화방법을 응용한 결과였다.
그는 검정색과 흰색만을 사용해 사람의 모습을 그려 더욱 인간적인 모습을 강조했는데 당시 폴록과 몇몇 화가들이 검정색과 흰색을 주로 사용하여 그렸다.

존 그래엄은 "그림을 그리기 시작하는 것은 캔버스와 물감의 논쟁이 시작되는 것과 같다"고 했는데 드 쿠닝의 그림에 어울리는 말이다.
드 쿠닝은 노력하는 예술가였다.
그는 평론가 로젠버그에게 말한 적이 있다.
"나는 절충적인 화가로서 미술사 책 어느 페이지를 열어도 그것들로부터 영향을 받았을 것이다."

드 쿠닝의 친구들은 그가 그림을 미완성으로 남긴다고 했는데 인터뷰에서 그는 말했다.
"양식이라는 건 속임수다.
양식은 반 되스부르그와 몬드리안의 지독한 아이디어들로서 그들은 양식을 강요했다.
힘의 반사적 저항력은 양식을 유지하고 그림의 내용들을 진행하는 것이다.

나는 몬드리안에게 반했다.
나는 늘 그의 주문에 반해 있었다."

드 쿠닝은 그림을 그릴 때 자꾸만 고치는 습관이 있다고 했는데 이는 조각가 알베르토 자코메티가 사물을 그리고서 자꾸 고치는 습관으로 인해 결국에는 실재보다 작게 그리게 되었다고 한 말을 상기하게 했다.
자꾸 고치는 드 쿠닝의 습관은 자코메티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그의 고유한 회화방법이 되었다.

그는 말했다.
"나는 작품에 관해 확고하게 단언하는 사람이 아니다.
나의 인생에서 확고한 형태는 적다. 난 밤새 바꿀 수가 있다.

나는 커다란 그림을 몇 주 동안 그리며 물감이 늘 젖어 있게 하는데 그래야 바꾸고 또 바꿀 수 있기 때문이다.
내 말은 같은 것을 고치고 또 고친다는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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