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자의 도
노자는 말로서 나타낼 수 있는 도, 명칭을 붙일 수 있는 명은 참으로 훌륭한 도나 명이 될 수 없다고 했다.
항구적인 의미를 지닌 것은 말로서 나타낼 수 없으며 명칭을 붙일 수 없다고 했다.
다만 사람이 생각하기를 무nothing를 만유everything의 기초에 두고 유를 만유의 분화로 볼 뿐이다.
그러나 원래는 유와 무가 동일하고 나타난 표상에서 모습을 달리할 뿐이다.
유를 무가 전개한 것으로 보고 무를 기초로 해서 유를 보는 시각인 것이다.
일본인 킴바라세이고는 저서 <동양의 마음과 그림>에서 노자의 사상과 불교의 심리학을 같은 맥락에서 이해했다.
눈을 감고 거기에 나타나는 세계를 더욱 가치있는 인식의 대상으로 삼는 의향과 노자의 영원불변한 무에 대한 인식을 동일한 것으로 보았다.
캄바라세이고는 무를 수학적 무로 보지 않고 수없이 많은 유를 산출하는 가능성으로 보았다.
판연히 유와 구별이 되고 유와 대립하는 무가 아니라 시시각각으로 그것이 놓여 있는 위치에서 유로 전환하는 경향에서 충실한 상태에 있는 무로 보았다.
그는 무 자신은 시현함이 없이, 그러면서도 항상 시현하는 게 본래의 무,
즉 살아서 움직이는 무로 해석했다.
무의 형상에 관해 <도덕경>에는 다음과 같이 적혀 있다.
무는 눈에 보이지 않기 때문에 평편하고,
귀에 들리지 않기 때문에 드물고 조용하며,
손에 잡히지 않기 때문에 희미하고 미세하다.
이 셋을 그 이상 구명할 수 없으며 혼합해서 하나가 되어 있다.
윗부분이라고 해서 더욱 밝지도 않고 아랫부분이라고 해서 더욱 어둡지 않다.
뭐라고 명장할 수는 없으나 그런 대로 연속하여 늘 만물의 상태로 되돌아간다.
이를 가리켜서 상태가 없는 상태, 형상이 없는 형상이라고 한다.
혹은 한 마디로 뭔지 모르는 불확실성이라고 한다.
무가 평편하고, 드물고 조용하며, 희미하고 미세하다는 것은 무가 감각적인 요소를 구비하고 있다는 말이다.
무가 감각적인 요소를 전혀 구비하지 않았다고 해서 무를 어둡다고 말할 수 있느냐 하면 어둡지는 않다는 것이다.
무는 밝지도 어둡지도 않지만 늘 활동하여 정지하지 않고 한없이 형성을 지속한다.
그 상태는 상태가 없는 상태이고 그 형상은 형상이 없는 형상이다.
무는 나타남이 없이 늘 나타나며 연속적으로 활동하는 것이 무의 형상이다.
무는 눈에 보이지 않으면서 보이고 귀에 들리지 않으면서 들리는 것이라고도 말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