클레는 색과 평면적 구조로 구성하는 추상 회화를 제작하기 시작했는데 

 김광우의 <칸딘스키와 클레의 추상미술>(미술문화) 중에서



클레의 창작에 원천적인 영감을 준 것이 로베르 들로네Robert Delaunay(1885~1941)의 오르피즘Orphism이다.
오르피즘이란 명칭은 1912~13년에 발표한 들로네의 작품을 설명하기 위해 시인 기욤 아폴리네르가 붙인 명칭으로 시인은 오르피즘은 비재현적 색채 추상으로 이해하고 저서 <입체주의 화가들 Les Peintres cubistes>(1913)에서 가시적인 영역으로부터 빌려온 요소가 아닌, 전적으로 예술가 자신이 창조한 요소들로 이루어진 새로운 구조를 나타낸 미술이라고 했다.
아폴리네르는 오르피즘에 낭만적인 의미를 부여했으며 이런 점이 클레와 마케와 같은 표현주의자들에게 영향을 끼쳤다.
들로네는 색채를 점차 형태에서 분리시켜 주제가 없는 회화를 창조했는데 완전추상이었다.

클레는 들로네의 작품에 매료되어 1912년 파리에 갔을 때 그의 작업실을 방문하고 그곳에서 <창문>을 보고 당대의 가장 혁신적인 작품이라고 감탄했다.
클레는 들로네를 가리켜서 “우리 시대의 가장 탁월한 예술가들 가운데 하나”라고 적으며 들로네의 논문 <빛에 관하여 On Light>를 독일어로 번역했다.
들로네는 1906년 신인상주의와 외젠 슈브뢸의 색채 이론에 관심을 갖기 시작했으며 이후 계속 중심 모티프가 될 색채 이론의 미적 응용에 대한 연구에 착수했다.
쇠라의 점묘주의로부터 파생된 분할주의 기법을 채택하는 대신 대조되는 인접한 색채들 사이의 상호작용에 관심을 기울였고 특히 색채 공간의 분할을 위한 빛의 효과, 색채와 움직임의 상호연결을 탐구했다.

색채의 체계적 사용을 통해 과학적으로 색채를 물질화시켰으므로 쇠라의 작품은 비구상은 아니더라도 방식만큼은 추상적이었다.
그는 거의 수학적 구조를 통해 색채를 물리적으로 다루면서 조형적 조화를 꾀했다.
들로네는 <자서전>(1924)에서 적었다.
"회화는 자체의 수단과 법칙을 가져야 한다.
아폴리네르가 기술한 대로 ‘빛의 열매’인 색은 화가의 물질적 수단이며 언어인 것이다.
결국 화가는 물질적 요소들의 도움으로 작업하게 되고 모든 요소는 의지에 의해 전체적으로 다루어져야 한다.
양의 조절이 가능한 색채는 화면에 분배된다.
화면은 작업을 통해 유일한 참조가 되며 비판과 향유의 대상으로서의 색채 또한 색채들끼리 또 다른 척도를 자아낸다."

클레는 색과 평면적 구조로 구성하는 추상 회화를 제작하기 시작했는데 색채 형태들 사이의 리드미컬한 상호작용을 미적으로 적용한 들로네의 영향이며 <꽃 침대>(1913)가 그 예이다.
미묘한 색조의 변화가 리드미컬한 효과를 낸다. 들로네와 만남은 선에 대한 연구에 몰두해온 클레로 하여금 색에 대해 더욱 더 관심을 갖게 만드는 계기를 마련해주었고, 색채 형태 회화로 들어서게 되었으며, 파리의 모더니즘에 가까워지게 되었는데, 파리의 모더니즘은 국제적으로 가장 수준 높은 미술이었다.
인상주의 화가들의 작품을 보고 빛이 합리적인 방법으로 형상을 만든다는 것을 안 클레는 색채와 명암이 선과는 전혀 다른 성질을 지니고 있음을 알았고, 색채를 검은색과 흰색 사이의 숱한 농담의 위계로 보고 색조를 무게로 이해하기 시작했다.
그는 명암의 증감을 통해 무게를 조절하여 화면의 통일과 균형을 이룰 수 있다고 믿었다.
1910년 이전에 쓴 일기에서 색에 관한 세심한 관찰과 명암의 증감을 다루는 현명한 방법에도 불구하고 자신은 아직 화가가 될 능력이 없다고 자탄한 것을 보면 색에 대한 관심이 얼마나 컸고 또한 많은 실험을 했는지 짐작할 수 있다.

아프리카의 여러 곳을 방문하면서 발견한 색채는 그의 화면 구성에 변화를 일으켰고 칸딘스키의 자유롭고 즉흥적인 창작은 들로네의 색채 대비와 더불어 그에게 큰 영향을 끼쳤다.
특히 들로네의 영향은 1914년 초에 그린 그림들에서 현저하게 나타났는데 <무제>가 그 예이다.
색면을 격자 모양으로 배열하는 구성이 그에게 창작의 자유를 느끼게 해주었다.
이런 색면의 격자 모양을 입체주의자들인 피카소와 브라크 그리고 오르피스트 들로네가 사용했는데, 그들은 공간과 오브제를 부순 후 회화적 목적으로 새롭게 재구성하기 위한 방안으로 이런 양식을 사용한 것이지만 클레는 시각적 대상인 오브제를 부수고 재구성하려는 의도에서가 아니라 단순히 평편한 구성을 위해 사용한 것이 다르다.
평편한 정사각형 색면으로 구성하는 방법을 이 시기에 몇몇 유럽 화가들이 구사하고 있었다.
러시아 화가 말레비치가 1913~14년에 평편한 절대주의Suprematism 추상화를 제작했다.
유럽에서 구성주의가 발생하는 데 크게 기여한 절대주의를 추구하는 이유를 말레비치는 저서 <비대상 세계 The Non-Objective World>(1959)에서 자연의 외양을 재현하고 이상화하는 것을 거부하고 순수한 예술적 감정이나 비대상적 감수성을 표현하기 위해서이며, “현실과 유사한 것, 이상화된 이미지가 더 이상 필요 없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이런 추상화는 순수 예술적 감정을 위한 것으로 작가의 감정이나 태도를 배격하려는 것이다.
말레비치가 추구한 미학은 칸딘스키와 클레의 색면 구성에도 적용된다.
다만 클레는 이를 회화의 한 가능성으로만 간주했을 뿐 그 자체를 목적으로 삼지 않았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색이 나를 지배하고 있다 

김광우의 <칸딘스키와 클레의 추상미술>(미술문화) 중에서


클레는 재현적 이미지를 남긴 작품에서 왜곡distortion의 방법을 사용했다.
아내 릴리에게 보낸 편지에 “진실을 제시하기 위해 고의적으로 왜곡되게 표현했다”고 적었듯이 본질에 접근하기 위한 방법으로 형태와 색채 모두를 왜곡시키는 방법을 선택했다.
추상은 인식의 세계에 대한 ‘불완전한’ 정보를 제공하는 데 비해 왜곡은 ‘부정확한’ 정보를 제공하지만 실제에 있어 이 둘은 명확하게 구분되지 않는다.
왜곡은 사실성에서 멀어지기 때문에 관심을 끌며 표현적 특징을 부각시키므로 시각적 은유로 나타난다.
특히 환상을 표현하는 데 있어서의 왜곡은 관람자에게 전혀 거부감을 주지 않는다.

클레는 색의 사용에 있어 뛰어난 대가들 중 하나로 성공하지만 피에르 보나르, 로베르 들로네, 앙리 마티스 등과 같은 천부적인 화가들과는 달리 그에게는 타고난 재능이 없었다.
그래서 색의 기본적 문제에 당면하여 1898년부터 15년 동안이나 고심하고 좌절했다.
색에 대한 개념이 생긴 것은 우연한 일로 1914년 튀니지를 비롯하여 북아프리카의 여러 곳을 방문하면서 발현하는 순색들을 보고나서였다.
아프리카의 투명한 빛과 원색의 풍요로움을 보고 강한 인상을 받아 그동안 알지 못했던 색의 개념이 분명해졌으며 처음으로 자신이 화가라는 자각심이 생겼다.

"색이 나를 지배하고 있다.
그것을 움켜쥐려고 허겁지겁할 필요는 없다.
그것이 나를 영원히 지배하고 있으며 그 사실을 나도 안다.
이 순간만은 색과 내가 하나라는 행복한 느낌이다.
나는 화가이다."

그 후 그는 자신감을 갖고 5년 동안 좀더 진전된 색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노력했다.
따라서 1914년 이전까지 그의 소묘작품은 훌륭하지만 색을 사용한 작품에는 걸작이 없고 튀니지를 다녀온 후부터 그의 화면은 표현적인 색채로 빛을 발한다.
그의 작품은 유머가 있고, 시적 위트가 있으며, 절도 있는 아이러니가 표현된 것으로 우리에게 받아들여지지만 그가 회화의 궁극적인 중요성을 갈망한 이상주의자였다는 사실을 아는 것이 중요하다.
회화가 단지 자연의 재현을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정신에 변화를 일으킬 수 있다는 믿음이 그에게 있었으며 이런 점에서 칸딘스키와 동일한 입장을 취했다.
그러나 1914년을 기점으로 화가에 대한 자각심이 생기기 전까지는 견유주의 혹은 냉소주의의 태도를 취했음을 일련의 드로잉에서 알 수 있다.

1908년 3~4월 뮌헨의 두 화랑에서 열린 반 고흐를 기념하는 전시회를 통해 클레는 반 고흐를 이해할 수 있게 되었고 그의 작품에 나타난 선을 분석하여 선만이 회화의 새로운 가능성이란 자신의 생각에 확신이 생겼다.
반 고흐의 작품이 “인상주의로부터 획득한 동시에 인상주의를 극복한” 선의 규범을 보여주고 있음을 알았다.
반 고흐의 작품과 동생에게 보낸 편지 그리고 세잔의 작품을 연구하면서 회화에 자신감이 생기기 시작했다.
특히 세잔을 최고의 스승으로 삼으면서 그의 영향을 주로 받았다.
그가 세잔의 영향을 받은 것은 회화의 구성요소의 실체를 명확하게 드러내면서 작업하는 데서 회화적 사실realite picturale에 대한 탐구였다.
이런 방식은 묘사 대상에는 늘 포착할 수 없는 부분, 변화하는 부분이 있다는 가정에서 비롯된 것이다.
세잔은 세계의 광대함과 생명력, 아름다움에 압도당하기는 했지만 선, 면, 공간, 구성, 그리고 색을 통해 자연에 감추어진 많은 가능성들을 표현하려고 했으며 동시에 대상에 대한 해석과 그 표현방식의 문제점도 제기했다.
후세대에게 끼친 세잔의 영향은 지대했는데 1906년 세잔이 타계하자 모리스 드니Maurice Denis(1870~1943)가 세잔에게 바친 헌사에서 알 수 있다.
"대다수가 예술가의 감수성을 미술작품의 유일한 필요조건으로 받아들이던 시기에, 그리고 즉흥적인 미술의 출현으로 아카데미즘과 필수적 방법론이라는 재래의 전통이 동시에 파기된 시기에 세잔의 미술은 사고를 경험보다 중시하면서도 감수성의 본질적 역할을 상실하지 않았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미술은 미학적 원리를 따른다 

김광우의 <칸딘스키와 클레의 추상미술>(미술문화) 중에서


작품의 성격과 중요성을 감안하거나 저술을 통한 이론과 바우하우스에서의 교육이 미친 영향을 살펴볼 때 칸딘스키는 20세기 전반기의 비재현적 추상 미술의 발달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인물임이 틀림없다.
그는 사물의 특징을 재현할 필요성을 느끼지 않았으며 실제 모습에 상관하지 않은 채 물감이 지닌 본래의 표현적 속성을 살리는 데 역점을 둔 선구자였다.
일찍이 어린 시절부터 색채의 감정적 연상 작용에 민감했으며 그 공감적 효과를 심도 있게 발전시켰다.
자신을 깊이 감동시킨 색채를 회화로 재현하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알게 되자 논리적 사고가 아닌 갑자기 떠오르는 일종의 직관을 통해 미술과 자연은 각각의 원리와 목적이 다른 분리된 두 세계라는 결론에 이르렀다.
이를 근거로 미술의 자율성에 관한 믿음, 즉 미술작품은 외적 세계와의 어떤 유사성이 아니라 본래의 미학적 원리에 의해 지속되거나 존재한다는 신념을 갖게 되었다.

칸딘스키가 1925년에 그린 <노랑 빨강 파랑>은 불균형한 두 개의 무게 중심으로 구성되었다.
푸른색은 대기로서 푸른 하늘의 가벼움을 표현한 것이며 노랑과 빨강을 주조로 한 바탕 위에 직선, 곡선, 원 등이 여러 형태들로 배치되었다.
이런 형태와 색채의 교감에 대해 그는 7월 중순 최종적으로 정리한 <점 선 면: 회화의 기초적 요소들의 분석 Punkt und Linie zu Flache: Beitrag zur Analyse der malerischen Elemente>에서 상세하게 서술했다.
1914년부터 집필하기 시작한 이 책에서 그는 ‘순수한’ 예술가는 ‘내적이며 본질적인’ 느낌만을 표현해야 하며 피상적이고 우연적인 것을 무시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 같은 사고를 가진 예술가는 “아직은 알 수 없는 좀더 정제된 감정”을 표현하게 되며, “오직 미술만이 지닐 수 있고 미술만이 적절한 표현수단으로 명확하게 나타낼 수 있는 본질”을 궁극적인 목표로 삼는다고 했다.
이런 독특한 표현방식이 모든 시대의 미술을 통합할 수 있는 공통요소를 구축한다고 보았다.
예술가는 완전히 표현적인 구성을 만들기 위해 자신이 다루는 도구를 잘 알아야 한다는 신념을 근거로 점, 선, 면 등과 같은 회화적 요소를 세밀하게 분석했다.
그는 새로운 유형의 회화 공간을 발전시켰는데 그것은 더 이상 회화의 면으로 제한된 전통 원근법 공간에 기초하지 않으며 사방이 무제한적이고 심원한 우주 공간 속의 우주인처럼 관람자를 회화로 끌어들이는 완전한 공간이다.
그는 재현적 표현을 버리고 기하적 원근법을 없애며 색채와 형태의 한층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영혼의 진동에 의해 만들어지는 내적 요소가 작품이다


빌헬름 보링거Wilhelm Worringer(1881~1965)를 만난 후 칸딘스키는 더욱 추상에 확신을 갖게 되었다.
보링거가 <추상과 감정이입 Abstraktion und Finfühlung>(1908)을 발표한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 그를 만났다.
[추상과 감정이입]은 하인리히 뵐플린에게 제출한 그의 학위 논문으로 그는 훗날 이 논문을 쓰게 된 동기로 “미적 가치 기준의 새로운 방향 설정을 정초함에 있어서 그 시대 전체 경향과 더불어 주어진 특정한 문제들에 대한 나 자신의 개인적 성향과 예기치 않게 마주치게” 되었음을 꼽았다.
보링거는 미술사에서 명백히 구분될 수 있는 두 가지 경향이 지각되는데, 하나는 추상에 경도된 것이며, 다른 하나는 감정이입 혹은 자연주의적인 자연 묘사에 경도된 것이라고 했다.
자연의 모방에서 벗어나 추상으로 전환되고 있던 1900년대의 경향이 그의 논문을 성공적으로 이끌었다고 말할 수 있다.
추상을 인간과 자연 사이의 불화의 징조로 본 저자와 <추상과 감정이입>에 관해 대화하면서 칸딘스키는 보링거가 추상을 인간과 세계와의 단절을 나타내면서도 동시에 양자 사이의 조화를 나타내는 것으로 보는 것을 알고 그가 새로운 회화의 정신적 선두자라고 생각했다.
흥미로운 점은 <추상과 감정이입>이 칸딘스키를 중심으로 전개된 블라우에 라이터 그룹의 취지와 일치한다는 것으로 이 점은 많은 미술사학자들에 의해서 지적되어 왔다.

칸딘스키와 마르크의 활동 무대인 뮌헨의 미술적 풍토에서 성장한 보링거는 표현에 대한 화가들의 문제에 정통했다.
그는 1909년 분리파 예술가들에 반대하는 글을 썼는데, 그들이 당시의 혁명적인 미술에 대한 칸딘스키의 견해와 일치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보링거는 “순수한 추상은 복잡하고 어렴풋한 이미지의 세계에서 휴식을 주는 유일한 가능성”으로까지 보았으며, 복잡한 이미지의 세계가 “필연적이며 자연발생적인 기하적 추상”을 만들어낸다고 했다.
이는 바로 칸딘스키가 열망하던 추상이었다.

1910년경 칸딘스키가 무르나우에서 쓴 <예술에 있어서의 정신적인 것에 대하여 Über das Geistige in der Kunst>가 1911년 12월에 출간되었는데, 여기서 그는 추상 미술의 원리를 독창적으로 체계화했다.
이 책은 20세기 미술에 상당한 영향을 끼쳤으며 그 자신도 자신의 가장 중요한 이론서라고 말했다.
재현을 완전히 거부한 것은 아니지만 그는 미술의 표현적 구성적 측면을 무엇보다도 강조하면서 이를 논리적으로 주장했다.
본질적으로 표현적인 면을 ‘내적 의미’ 혹은 ‘내적 공명’이라고 칭했으며 미술작품의 내적 요소와 외적 요소를 구분했다.
그리고 이 요소들의 결합, 즉 미학적 구성을 통해서만 ‘정신적 울림’을 불러일으킬 수 있으며 “물리적인 인상은 단지 정신적 울림을 향한 단계로서만 중요할 뿐”이라고 주장했다.
"예술가는 전달해야 할 무엇인가를 가져야 한다. 형태를 다루는 것은 그 자체가 목적이라기보다는 형태를 통해 내적 표현을 반영하기 위한 것이기 때문이다."

칸딘스키는 <순수 미술로서의 회화 Painting as Pure Art>(1913)에서도 미술작품이 내적 요소와 외적 요소로 구성됨을 지적한 후 내적 요소는 예술가의 감정이라고 했다.
이 감정은 감상자의 영혼 안에 동일한 감정을 환기시킬 수 있는 능력을 가졌으며, 영혼이 육체와 결부되어 있는 한 영혼은 대부분 느낌만을 매개로 진동을 받아들일 수 있다고 했다.
따라서 느낌은 비물질적인 것에서 물질적인 것으로 옮겨가는 예술가와 물질적인 것에서 비물질적인 것으로 옮겨가는 관람자 사이의 징검다리라고 했다.
예술가의 영혼에 진동이 있어야 함을 역설하면서 영혼의 진동에 의해서 만들어지는 내적 요소가 작품의 내용이 된다고 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즉흥’ ‘인상’ ‘구성’


칸딘스키는 1909년 여름부터 ‘즉흥 Improvisation’ 연작을 그리기 시작했다. ]
‘즉흥’ 연작에서 인물, 건물, 산 등의 형태가 불분명하게 나타나는데 그것들은 재현적 형태가 아니라 기호의 기능을 하기 때문이다.
‘즉흥’이란 제목은 그가 가능한 한 자발적인 방법으로 그리고 의식적 제어작용을 극소화한 상태에서 화면의 구성을 완성했음을 시사한다.
‘구성 Composition’ 연작은 ‘즉흥’에 기반을 두고 계획적으로 확장시킨 것들이다.
1913~14년에 제작한 다수의 작품에서 특정한 대상의 형태를 생략했음을 본다.
그것들은 기하적 추상과는 구분되며 추상에 이르는 또 다른 과정으로서 특기할 점은 기하적 추상과 칸딘스키의 비정형 추상을 적대적 양식으로 보아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1913년 [폭풍]에 기고한 논문에서 칸딘스키는 ‘즉흥’ ‘인상’ ‘구성’을 규정했다.
1. ‘인상 Impression’은 외부 자연으로부터의 즉각적인 느낌이다.
2. ‘즉흥’은 무의식적이며 자연 발생적이고 내재적이며 비물질적인 전체의 특성을 지닌 표현이다.
3. ‘구성’은 장기간의 작업을 통해 서서히 형성되며 현학적 면모마저 지니는 내재된 느낌의 표현이다.

여기서는 이성, 의식, 확실한 목표가 중요한 역할을 하지만 이 역시 계산이 아닌 느낌에 의해 이루어진다.

‘인상’ 연작 중 하나로 <인상 III - 콘서트>(1911)를 예로 들면 이 작품은 칸딘스키는 아르놀트 쇤베르크의 음악회에 다녀온 후 그린 것으로 ‘인상’은 “외부세계에 대한 직접적인 인상 a direct impression of external nature”을 표현하기 위해 선택한 제목이다.
그가 말한 인상은 시각적 인상뿐 아니라 비재현적인 방법으로 표현하는 모든 종류의 감각적 인상을 의미한다.
이 작품은 특히 청각적 체험에 대한 인상을 표현한 것으로 형태와 색을 콘서트홀의 분위기와 소리에 대한 상징으로 표현하면서 노란색과 검은색이 두드러지게 나타나도록 흰색으로 보완했다.
그는 청각적 인상과 시각적 인상을 동시에 표현하는 방법을 선택했다.
검은색을 칠한 면은 무대 위의 그랜드 피아노를 상징한 것이며 왼편 여러 개의 검은 곡선들은 무대 가까이 앉아 있는 청중이다.
피아노를 중심으로 양편의 흰 기둥은 소리기둥을 은유한 것이다.
가장 인상을 주는 요소는 노란색으로 상징되는 쇤베르크의 소리가 홀을 가득 매운 것이다.
노란색은 칸딘스키에게 소리를 상징하는 색으로 1909년 무대 구성에 관한 글에 {노란 소리}란 제목을 사용했다.
이 작품은 회화와 음악이 서로 영향을 주는 공감각synesthesia을 표현한 것으로 공감각은 20세기 초 중요한 역할을 했으며 클레의 작품에서도 중요한 역할을 한다.
칸딘스키는 색과 각 악기의 소리를 연관시키면서도 회화와 음악에는 자체의 특정한 자원이 있다고 주장했다.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기 전 칸딘스키는 신지학theosophy과 강신술spiritualism에 심취해 있었으며, 인지학anthroposophy 사상가 루돌프 스타이너Rudolf Steiner의 가르침을 받아들였고, 신지학에 관한 많은 논문을 소장한 시인 스테판 조지Stefan George를 중심으로 한 뮌헨 서클에 관련되어 있었다.
이런 배경 안에서 그는 내면의 경험 혹은 정신적 현상을 시각화하는 일에 전념했다.
<즉흥 19>와 <즉흥 19a>(1911)는 이런 창작 환경에서 창안된 것들이다.
색이 분방하고 모호하게 칠해져 물체와 공간이 구별되지 않는다.
다양한 밝은 색들이 사용되었지만 전체적으로는 어두우며 색과 색이 마찰을 일으킨다.
이 작품은 자연에 정신이 내재해 있다는 가정 하에 그것을 표현하려고 한 것이다.
자연에서 받은 느낌을 전달한 것이다.
언덕을 가로지르는 뾰족한 산 정상은 자연의 형태를 떠나 칸딘스키의 직관에 의한 회화적 구성 요소로 변형되었다.

<즉흥 21a>(1911)는 1911년에 제작한 작은 유리그림 <태양과 함께>를 변형시킨 것이다.
그는 1913년에 <단순한 기쁨>이란 제목으로 다시 유화로 제작했다.
세 작품 모두 동일한 주제를 사용했지만 약간 다른 양식으로 제작되었으며 모두 유리그림의 회화적 언어를 사용했으므로 그의 추상 의지와 과정을 알게 해준다.
<태양과 함께>의 이중 언덕은 그의 다른 작품에도 종종 등장한 언덕으로 예외 없이 그곳에는 낯익은 러시아 건축물이 실루엣으로 세워져 있다.
왼편에 세 기사가 말을 몰고 언덕을 올라가고 있고, 상단 오른편에 검은색의 구름이 있으며, 그 아래 세 사람이 탄 보랏빛 배가 물결을 가르고 호수를 지나고 있다.
이 작품은 새로운 정신적 시대가 열렸음을 알리는 칸딘스키의 묵시론적 관념의 세계이다.
<태양과 함께>를 염두에 두고 <즉흥 21a>를 보면 이해가 수월해진다.
<즉흥 21a>를 그린 지 약 18개월 후인 1913년 여름에 그는 <단순한 기쁨>을 그렸다.
<태양과 함께>에서의 상단 왼편 빛을 발하는 대각선으로 흰색을 칠한 곳이 <즉흥 21a>에서는 붉은 태양이 삽입된 곳이다.
언덕 위에는 <태양과 함께>에서와 마찬가지로 둥근 지붕을 한 러시아 교회가 있다.
언덕 왼편의 말을 몰고 올라가는 세 기사는 여기에서 그리고 <단순한 기쁨>에서는 더욱 생략되었다.
노 젓는 세 사람의 모습도 역시 흐릿한 색으로 더욱 생략되었다.
특히 <즉흥 21a>에서는 색을 문질러 흐릿하게 한 부분들이 많으며 <태양과 함께>에서의 밝은 색상들이 회색으로 덮어졌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