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체 미술Concrete art


구체 미술Concrete art(아르 콩크레Art Concret, 콘크레테 쿤스트Konkrete Kunst)과 구성주의의 차이는 구체 미술은 환영을 배제하고 작품 자체와 그 작품의 구성 요소가 가상의 성질이 없이 있는 그대로 제시되는 데 있다. 재료는 그 자체만을 반영한다. ‘실제 재료, 실제 공간’이라는 구호는 구체 미술과 관련하여 빈번히 사용되었다.

19세기 중반 이후 미술 문헌에서 구체라는 단어는 추상의 반의어로서 매우 다양한 의미로 사용되어왔다. 1861년 귀스타브 쿠르베는 사실주의 선언문에서 아카데미의 역사화나 종교화, 일반적인 의미의 상상에 의한 미술과는 대조적으로 ‘실제로 존재하는 것’을 묘사하는 미술을 구체 미술이라고 했다. 이 단어는 1930년 반 두스뷔르흐가 ‘아르 콩크레 Art Concret’라는 선언문을 발표했을 때 처음으로 전문용어가 되었다. 이는 그가 격렬하게 반대한 원과 사각형 협회의 결성에 대한 답변이었다. 구성주의 원칙을 규정한 이 선언문에 카를순드, 반 두스뷔르흐, 투툰지안, 반츠, 엘리옹 등이 서명했다.

구체 미술 운동에 참여한 프랑스 화가 장 엘리옹(1904~87)은 릴에서 공학을 공부하고 그후 파리에서 건축을 공부했다. 1926년 우루과이 화가 호아킨 토레스-가르시아(1874~1949)를 통해 입체주의를 알게 되었고, 자신에게 많은 영향을 끼친 몬드리안을 만났다. 또한 반 두스뷔르흐를 알게 되었으며 그의 선언문에 서명했다. 엘리옹은 1930년대에 제작한 기하 추상으로 유명한데 그의 작품들은 기묘하게 구부러진 면들로 이루어진 넓게 패턴화된 구성으로 1920년대 초에 페르낭 레제가 제작한 기계적 회화의 영향을 반영한 것이다.

구체 미술 선언문은 간결하고 다음과 같은 내용을 담고 있다.
“구체 회화의 원칙을 다음과 같이 선언한다. 첫째, 미술은 범세계적이다. 둘째, 미술작품은 제작되기 전에 예술가의 정신에 의해 완전히 인식되고 형성되어야 하며, 자연의 형식적인 특성이나 인간의 관능성 혹은 감상성이 개입되어서는 안 된다. 우리는 서정주의, 연극성, 상징주의 등을 배제하고자 한다. 셋째, 회화는 완전히 순수한 조형 요소, 즉 면과 색채로만 구성되어야 한다. 회화적 요소는 ‘그 자체’ 이외에는 어떠한 의미도 가지지 않기 때문에 회화도 ‘그 자체’ 이외의 다른 의미를 지니지 않는다. 넷째, 회화의 요소뿐만 아니라 구성도 간결하고 시각적으로 조절될 수 있어야 한다. 다섯째, 기법은 기계적이어야 한다. 다시 말해 정확하고 반인상주의적이어야 한다. 여섯째, 절대적인 명확성을 위해 노력해야 한다.”

이 선언문은 구성주의로 대표되는 일종의 비재현적 추상과 자연 외관을 묘사하는 데 있어서 세부 묘사를 줄이는 재현적 추상, 그리고 표현적 추상을 구분하고 있다. 그러나 어떠한 새로운 개념을 소개하지는 않았다.

반 두스뷔르흐가 1931년에 타계한 뒤 구체 미술이란 용어는 사용되지 않다가 1936년 스위스에서 막스 빌과 아르프에 의해 다시 사용되었다. 막스 빌(1908~94)은 ‘구체 미술’이란 제목으로 1944년 바젤 뮤지엄에서 열린 전시회, 1960년 취리히 미술협회에서 열린 전시회 및 1964년 취리히의 헬름하우스에서 열린 전시회 등 여러 전시회를 기획했다. 스위스인 빌은 1927~29년 데사우의 바우하우스에서 공부했다. 1929년부터 화가, 조각가, 건축가, 디자이너 등 다양한 일을 했고, 1932~36년 추상-창조 그룹의 일원으로 활동했다. 반 두스뷔르흐가 타계하기 한 해 전인 1930년에 구체 미술을 채택하여 스위스에서 추상 대신 구체란 용어를 유행시켰다. 그는 1941년에 브라질과 아르헨티나로 갔으며 그곳에서 구체 미술의 개념을 전파했다. 빌의 작품은 주로 차가운 미술이라 불리던 유형에 속했는데, 차가운 미술이란 작품을 구성하는 부분들 사이의 관계를 유발시키는 수학적 공식에 입각한 기하 추상 혹은 구성주의 미술 유형을 가리킨다. 빌은 자신이 기획한 전시회들에서 구체라는 단어를 추상과 거의 비슷한 분야를 총망라하는 포괄적인 용어로 사용함으로써 그 명칭이 비구상 미술을 폭넓게 지칭하도록 만들었다. 도날드 저드와 로버트 모리스 같은 미니멀 아트의 주도적인 예술가들은 빌의 영향을 부인했지만, 빌이 상당히 기여한 구성주의 미술 경향은 훗날 추상 미술과 체계적 미술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빌은 구체 미술을 수학적 원칙에 의거하여 부분들 사이의 비율과 관계를 결정하는 기하 추상이나 구성주의의 한 형태로 인식했다. 그러나 그가 기획한 전시회에 수학적 태도를 취한 예술가들만 참여한 것은 아니었다. 

구체 혹은 구체주의자라는 단어는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뒤 스웨덴에서 기하적 추상 양식으로 작업하던 예술가들을 가리키는 일반적인 명칭이 되었다. 요네스, 베르틀링, 로드헤 등과 같은 예술가들은 이를 다양한 양식으로 응용했다. 1941~47년 스톡홀름 미술 대학에서 조각을 공부한 아르네 요네스(1914~76)의 기념비적인 조각은 공간이나 환경과 하나로 통합되므로 건축적인 형태를 띤다. 그러나 분위기는 매우 서정적이며 유기적인 성장을 연상시키거나 관람자의 위치에 따라 종종 현저하게 다른 모습으로 보인다. 처음에는 표현주의 그림을 그렸지만 1948년경 로트와 레제의 영향을 받은 뒤 기하 추상으로 방향을 바꾼 올레 베르틀링(1911~81)은 직사각형과 수직 수평선이 지배적인 몬드리안의 신조형주의를 추구하다가 점점 자신의 개성적인 화법을 발전시켜 매우 단순화된 쐐기 형태가 두드러진 선명한 검정, 빨강, 노랑 색조의 추상화를 그렸다. 야한 금속성 색채의 그의 그림들은 사당히 강렬한 충격을 주었다. 렌나르트 로드헤(1916~)는 피카소의 영향을 받아 입체주의 그림을 그리다가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뒤 기하 추상으로 전환했으며, 스톡홀름 아카데미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면서 스웨덴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구체 예술가 중 하나가 되었다.

이탈리아에서는 1948년 솔다티, 무나리, 평론가 질로 도르플레스 등의 후원으로 구체 미술운동(MAC, Movimento per l'arte concreta)이 일어났다. 아타나시오 솔다티(1896~1953)는 처음에는 건축을 공부하여 1920년 학위를 받은 뒤 1922년부터 정식 교육을 받지 않고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1930년대 중반까지 입체주의와 형이상학적 회화의 영향 아래 주로 정물화를 그렸으나, 1930년대 후반 구성주의로 전향했고, 1946년 구체 미술 운동의 창립 회원이 되었다. 1950년가지 솔다티는 이탈리아의 기하 추상의 선구자로서 위치를 확고히 했다.

조각가이며 화가로서 노동의 신성함을 찬양하는 사회적 사실주의 정신에 입각하여 작업한 브루노 무나리(1907~)는 짧은 기간동안 미래주의에 심취하며 1931년 항공 회화 전시회에 출품하기도 했다. 그러나 그가 명성을 얻게 된 것은 1930년대에 쓸모없는 기계로 명명한 추상 구조물과 철사 모빌이었다. 무나리는 1938년 자신의 기계 미술 개념을 설명한 여러 선언문 중 첫 번째인 ‘기계주의 선언’을 발표했다. 1949년에는 구체 미술 운동의 창립 회원으로 활동했으며 이탈리아의 아르테 프로그라마타Arte Programmata, 즉 산업 디자인과 연계된 복수 제작품 미술의 선구자였다. 아르테 프로그라마타는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이탈리아에서 키네틱 아트에 대해 붙여진 용어로 프로그램 중에 무작위적 요소가 개입될 수도 있으나 대체로 모터로 작동되는 일련의 일정한 움직임을 보여주는 작품들을 일컫는 명칭이다. 그 박에 옵 아트와 환경 미술을 비롯하여 특히 광선을 이용한 환경 미술에서의 관람자 참여도 여기에 포함된다. 무나리는 1951년 로마에서 개최된 ‘이탈리아의 추상 미술과 구체 미술전’에 참가했다.

1940년대 후반 폰타나도 이 구체 미술 운동과 연관이 있었고, 카포그로시는 짧은 기간동안 이와 유사한 방법으로 작업했다. 아르헨티나 태생 이탈리아 조각가이며 도예가 루초 폰타나(1899~1968)는 1930년 밀라노의 밀리오네 화랑에서 열린 전시회에 처음으로 비구상 조각을 선보였고, 1935년까지 다수의 추상 작품을 제작하면서 전통적인 양식에서 벗어나 전적으로 새로운 양식과 기법을 추구했는데, 이를 바탕으로 흰색, 검정색, 황금색 석고로 장식적인 도기 작품 및 추상 입상들을 제작했다. 1934년 파리의 추상-창조 그룹에 가입했고, 이듬해 제1회 이탈리아 추상 예술가 선언문에 서명했으며, 이탈리아에서 열린 최초의 공동 추상 미술전에 참가했다. 1946년 유명한 ‘백색 선언 Manifesto Blanco’을 발표했는데, 여기에서 네온 및 텔레비전과 같은 첨단기술을 사용하여 전후의 새로운 정신을 표현한다는 자신의 새로운 미학을 표명했다. 그는 이젤회화의 환영적 혹은 허상의 공간을 거부하고, 대신 색채와 형식을 실제 공간에서 자유로이 전개시켜 캔버스의 틀이나 조각의 부피를 벗어나는 작품을 창조해야 한다고 주장했으며, 또한 새로운 과학기술을 사용하여 작품을 건축과 주변 공간에 완전히 통합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 선언문은 이후 대두될 공간주의 이론의 기초가 되었고, 폰타나의 이론은 아르헨티나와 이탈리아 모두에서 상당한 관심을 모았다.

주세페 카포그로시(1900~72)는 로마 태생으로 법학을 공부한 뒤 1927년 파리로 갔으며, 1930년부터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1933년 이탈리아로 돌아오자마자 로마 화파의 일원이 되었다. 1949년 로마 화파와 결별한 뒤 표현적 추상과 구체 미술의 중간 격인 ‘기호’ 구성회화 양식을 발전시켰다. 이것은 곧바로 앵포르멜에 반발하던 많은 이탈리아의 예술가들에 의해 받아들여졌다. 카포그로시는 곡선으로 된 안쪽에 톱니 모양이 불쑥 나와 있는 빗과 유사한 형태의 서체적 상징을 사용했으며, 이 기본 이미지로 표면에 율동적인 연결감과 운동감을 부여했다. 잘 연결된 표면 위에 표의문자를 연상시키는 디자인, 즉 고립되었지만 균형이 잡힌 요소들을 겹쳐 놓음으로써 모든 방향으로 무한하게 팽창할 수 있는 올오버 패턴을 만들어냈다.

구체 미술이라는 용어가 사실상 기하 추상과 동의어라는 것은 1945년 파리의 르네 드루앵 화랑에서 열린 ‘구체 미술전’이라는 전후 최초의 중요한 추상 전시회를 통해 알 수 있다. 반 두스뷔르흐 미망인의 도움으로 이 전시회에는 들로네 부부, 도멜라, 에르뱅, 몬드리안, 칸딘스키, 마넬리, 조피 토아버-아르프, 앙투안 페브스네르 등과 같은 예술가들의 작품이 집결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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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오나르도 다 빈치의 과학과 미켈란젤로의 영혼>(미술문화)에서 

 
고대 정신의 재창조

18세기 후반 로코코는 신고전주의에 자리를 내주었다. 고전주의의 이상은 명확한 윤곽선과 단순한 표현, 그리고 우아함보다는 간결하고 솔직함에 있었다. 사람들은 실내를 장식하는 달콤한 감상과 에로티시즘에 싫증을 느꼈다. 고대로의 복귀는 처음에 로마적인 것보다는 그리스적인 것을 지향했다. 그것은 남부 이탈리아 및 폼페이에서의 고고학적 발견과 독일의 미술사학자이자 고고학자 요한 요아힘 빙켈만의 이론과 그의 동료 콜렉터들의 영향 때문이었다.

빙켈만은 고전적 이상을 그리스 천재가 만들어낸 것으로 보았으며 그리스 미술과 로마에서의 모작을 확실하게 구별하는 최초의 역사가가 되었다. 그의 저서 <회화와 조각에서 그리스 작품의 모방에 관하여>는 로마로 떠나기 바로 직전인 1755년 5월에 드레스덴에서 출판되었다. “이상적 예술에 도달하는 지름길은 고대의 모방”이라고 주장한 이 책은 여러 나라 말로 번역되었으며 유럽인의 애독서가 되었다. 신고전주의 이론의 독보적인 존재가 된 빙켈만은 이 책을 출간한 후 이탈리아로 가서 1759~64년에 걸쳐 <헤르쿨라네움 발굴에 관한 비안코니 서한>(사후 간행), <헤르쿨라네움 발굴에 관한 브륄 서한>(1762년 간행), <최근의 헤르쿨라네움 발굴에 관한 퓌슬리 보고>(1764년 간행) 등 세 편의 보고서를 집필했다. 헤르쿨라네움(현재 이탈리아 명칭으로 에르콜라노)은 나폴리 동남쪽 베수비우스 산 서쪽 기슭에 위치한 오래된 도시로서 기원전 79년 8월 24일 베수비우스 산 분화 때 폼페이와 함께 매몰되었지만 폼페이와 달리 용암이 응회암으로 변했으므로 근대에 이르기까지 매몰 당시의 모습으로 남아 있었다.

빙켈만은 <라오콘>(다비드 35)을 고대의 걸작으로 꼽았다. 라오콘은 트로이의 왕자이자 제사장으로, 그리스군 목마의 비밀을 트로이인에게 알려준 죄로 신으로부터 벌을 받고 두 아들과 함께 큰 뱀에 감겨 죽었다는 전설의 인물이다. 그리스군의 목마를 라오콘이 제단에 공물로 바치려 하는 순간 아폴로가 보낸 두 마리의 큰 뱀이 라오콘과 두 아이를 습격했다. 아버지와 작은 아들은 이미 뱀에 물려 숨이 끓어질 지경이고, 큰 아들은 아버지의 얼굴을 바라보며 뱀의 공격을 막으려고 안간힘을 쓰고 있다.

빙켈만은 <라오콘>을 찬양해마지 않았다.
“그리스 걸작들의 일반적이며 탁월한 특징은 결국 자세와 표현에서의 고귀한 단순과 고요한 위대이다. 바다의 수면이 사납게 날뛰어도 그 심해는 늘 평온한 것처럼 그리스 조상들은 휘몰아치는 격정 속에서도 침착함을 잃지 않는 위대한 영혼을 나타냈다. 이 영혼은 격렬한 고통 속에 있는 <라오콘> 군상의 얼굴에 잘 묘사되어 있다. 그 고통은 얼굴뿐 아니라 육체의 모든 근육과 힘줄에도 나타나 있어서, 우리는 얼굴이나 육체의 다른 부분을 보지 않고 고통으로 움츠러든 하복부를 보는 것만으로도 이런 고통을 느낄 수 있다. 그러나 얼굴이나 전체 자세에서는 전혀 고통에 찬 격정이 드러나 있지 않다. 그의 고통은 우리의 영혼에까지 스며들어 온다. 그러나 우리가 이 위대한 이처럼 그 고통을 견딜 수 있게 되기를 바란다.”

고대를 모방하라고 권한 빙켈만은 자신의 추종자들과는 달리 생명력 없는 모방을 염두에 둔 것은 아니었다. 그는 그리스 정신의 재창조를 원했으며, 종종 인용되는 그리스 미술의 특징에 관해 그가 언급한 “고귀한 단순과 고요한 위대”는 미적 요소와 더불어 윤리적 요소에도 적용되었다. 빙켈만은 1768년 트리에스테에서 살해되었는데, 여인숙에 같이 묵은 손님에게 금화를 보여주었기 때문인 듯하다.

빙켈만이 그리스 정신의 재창조를 역설하기 250년 전에 미켈란젤로는 이미 <다윗>(다빈치 203)을 통해 시위했다. 현재 루브르 뮤지엄에 소장되어 있는 <반항하는 노예>(다빈치 309)와 <죽어가는 노예>(다빈치 310, 310-1)는 그리스 정신이 좀더 강조된 작품들이다. 일반적으로 고대에 대한 관심이 15세기에 와서야 비로소 시작된 것처럼 말하지만 사실은 훨씬 이전부터 그에 대한 관심은 점차 커지고 있었다. 14세기 중반 피렌체의 유명한 시인인 페트라르카와 보카치오는 고대의 문헌을 새롭게 이해하기 시작했으며 보통 사람들도 고대에 대한 동경과 고대 문물에 대한 존경으로 값비싼 골동품을 구입하고 싶어 했다. 고대에 대한 관심이 커지자 신분계급을 표시하는 메달을 가자로 만들어 고대 유물이라고 파는 상인이 생길 정도였고 작은 고대 조각품과 유적지에서 발견된 유물을 수집하려는 사람들이 생겼다.

고대 조각품들이 발굴되고 알려지면서부터 고대에 대한 사람들의 관심은 자연히 커질 수밖에 없었고 미켈란젤로 또한 예외일 수 없었다. 현재 바티칸 뮤지엄에 소장되어 있는 <벨베데레의 아폴로>(다빈치 313)가 이 시기에 발굴되었고 얼마 후 1506년 1월 <라오콘>이 에스퀼리누스의 티투스 우물가에서 발견되었다. 미켈란젤로는 <라오콘>에 깊은 인상을 받았으며 피렌체에서 메디치 가의 줄리아노와 로렌초의 무덤을 장식할 때 <라오콘>의 트로이 제사장의 얼굴을 상기하면서 벽에 그 얼굴을 드로잉했다.(다빈치 312) 그는 벽에 많은 드로잉을 남겼고 이는 그가 작품을 제작할 때 고전의 요소를 규범으로 삼았음을 알게 해준다.

<라오콘>은 엘 그레코에게도 영감을 주어 그로하여금 1610년경에 <라오콘>(미술사 수녀 190)을 그리게 했다. 엘 그레코는 뱀에 감겨 죽어가는 라오콘과 두 아들을 묘사하면서 오른편에 세 인물을 삽입했는데, 정확하게 무엇을 상징한 것인지 알 수 없다. 짐작컨대 세 사람의 운명을 상징하거나 아니면 그리스에 호의를 베풀어 트로이가 파괴될 수 있도록 도운 세 여신인 것 같다. 하늘에 일기의 변화가 일어나는 것도 세 여신의 전능한 힘에 의해서인 것으로 보인다. 등장인물들은 엘 그레코 특유의 가늘고 기다란 모습이다.

에스파냐의 화가, 조각가, 건축가로 주로 톨레도에서 활동한 그는 그리스인을 뜻하는 엘 그레코라는 이름으로 알려졌지만, 본명은 도메니코스 테오토코풀로스이다. 그는 작품에 서명할 때 늘 그리스 문자로 표기했고, 종종 크레타인을 뜻하는 크레스Kres를 덧붙이가도 했다. 티치아노의 제자였던 그는 틴토렌토와 바사노 등 베네치아 화가들에게 큰 영향을 받았으며, 미켈란젤로의 작품은 그의 양식 형성에 중요한 역할을 했다. 그는 주로 종교적 주제를 다루었지만 신화적 주제를 다룬 <라오콘>은 예외적인 작품에 속한다. 또 다른 이례적 작품으로 만년에 그린 <톨레도 풍경>이 있는데, 이는 인물이 등장하지 않는 순수 풍경화의 선구적인 작품이다. 화가로서의 가장 두드러진 특징은, 많은 대가들이 따뜻한 적색과 갈색 계통의 색채를 선호하던 당시에 차갑고 푸른 색채와 은회색조를 선택한 데 있다. 차가운 색조, 거친 광선 효과, 자유분방한 붓질, 전통 규범에 대한 경시와 고통을 겪는 인물상의 정신성을 작품 속에 나타낸 엘 그레코의 천재성은 높이 평가 받고 있다. 엘 그레코의 회화에 대한 관심이 부활한 것은 19세기 말이다. 그의 극도로 반자연주의적인 양식은 다양한 논의를 불러일으켰지만, 매너리즘적인 비례 관계의 불균형화(가늘고 길게 늘인 인체, 형태의 데포르메)는 화가가 의도적으로 한 것임이 분명하다. 그는 스스로 물려받은 다양한 예술적 전통을 완전히 자신의 것으로 만들어 정신적 표현에 더할 나위 없는 효과적 도구가 되는, 자신만의 개인적 미학에 도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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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갱의 누드 여인

 
김광우의 <성난 고갱과 슬픈 고흐>(미술문화) 중에서

 

폴 고갱(1848~1903)은 반 고흐와 세잔과 더불어 후기 인상주의를 대표하는 화가, 조각가, 판화가이다. 아버지는 오를레앙 출신으로 기자였고 어머니는 페루 출신의 프랑스인이었다. 그는 여가가 생기면 그림을 그리다가 1883년 본격적으로 회화에 전념하기 시작했으며 1886년 가족을 버리고 이후 5년 동안 브르타뉴 지방의 퐁타방에서 살았다. 그의 강한 개성과 미술에 대한 사상에 매료되어 그곳으로 모여든 예술가들의 구심점이 되었다.

고갱은 퐁타방에서 만난 젊은 화가 샤를 라발과 함께 1887년 4월 파나마로 가서 파나마 운하를 개발하는 프랑스 회사에서 근무했지만 대량 해고바람에 해직되고 마르티니크 섬으로 가서 통나무 집에 거주하며 지냈다. 고갱은 열대의 빛나는 다양한 색과 공간 등에서 감동을 받았고 원주민을 모델로 회화적 성과를 거두었다. 그는 더 이상 인상주의자의 눈으로 자연을 바라보지 않아도 되었는데, 태양이 작열하는 열대에서는 구태여 빛이 사물에 닿아 일으키는 작용에 관심을 가지지 않아도 되었으므로 색을 토막내어 칠하지 않아도 되었고, 원색들이 투명하게 드러나기 때문에 오히려 색을 평편하게 사용하는 것이 바람직하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빛과 색, 공간과 부피에 대한 새로운 개념이 생긴 것으로 이는 화가에게 매우 중요한 깨우침이었다. 그는 색을 평편하게 칠하면서 색들이 대조를 이루게 했으며 부드럽고 유연한 아라베스크 선으로 사물을 단순화해서 표현했다. 그러나 고갱과 라발은 말라리아와 이질, 그리고 간질환으로 심하게 앓았다. 두 사람은 1887년 11월 파리로 돌아왔다.

고갱은 처음으로 개인전을 부소&발라동 화랑에서 가졌는데 화랑의 회화부 책임자가 반 고흐의 동생 테오였다. 고갱은 브르타뉴와 마르티니크에서 그린 작품과 도자기들을 개인전에 소개했다. 평론가 옥타브 미르보는 “기괴한 초목과 꽃, 엄숙한 형상들, 장엄한 석양이 있는 숲의 장면은 종교적 신비와 에덴동산을 닮은 성스러운 풍요를 안겨준다”고 평했다.

고갱은 인물을 장식한 단지를 많이 제작했다. 그는 북아프리카 여왕 클레오파트라를 누드로 장식하면서 향후 2년 내에 점토와 나무로도 제작할 계획이었다.(고흐 257) 그가 클레오파트라를 단지에 장식하게 된 것은 퓌비 드 샤반의 회고전을 관람하고 난 후였다. 이 회고전은 고갱이 파리로 돌아온 직후인 1887년 11월 11일, 뒤랑-뤼엘의 화랑에서 개최되었는데 드 샤반은 당시 프랑스의 가장 유명한 화가 중 하나였다. 고갱은 특히 1872년작 <희망>(고흐 258)에 관심을 갖고 이 누드 여인을 피부가 검은 여왕으로 자신의 도자기에 삽입했다. 상징주의의 대가 드 샤반은 반자연주의적이며 시적인 장면을 주로 그렸으며 침묵이 흐르는 그의 작품은 이집트인의 회화와도 같았다. 고갱은 드 샤반의 모티프를 현대화하여 전혀 다른 분위기에서 성적으로 호감을 주는 여인으로 재해석했다. 드 샤반은 봄의 풍경 속에 누드 여인을 삽입하여 자연의 재탄생을 시사했지만, 고갱은 가슴을 크게 하고 성에 굶주린 여인으로 변모시켰다. 전통적인 주제를 변모시키는 것은 그 밖의 장식에서도 볼 수 있으며 그의 주요 예술적 행위 중 하나가 되었다.

누드 여인에 대한 관심은 지속적으로 그의 작품을 통해 나타났다. 타히티에서 고갱은 1896년 4월에 <왕후>(고흐 796, 797)를 그렸는데 독일의 대가 루카스 크라나흐의 르네상스 회화 <다이아나>(고흐 798)에서 영감을 받아 그린 것이다. 그는 자신의 그림 속의 동일한 여인을 <열대 풍경 속에 부채를 들고 비스듬히 누운 여인>(고흐 795)이란 제목으로 7년 전인 1889년 말 참나무에 릴리프로 제작한 적이 있다. <왕후>를 그린 후 파리에 있는 몽프레에게 이 작품에 관해 적었다.
“벌거벗은 왕후는 풀의 카페트 위에 비스듬히 누워있고, 하녀 한 명은 과일을 따고 있으며, 큰 나무 근처에서는 두 남자 노인이 선악과에 관해 이야기하고 있네. 배경에 바닷가가 보이고 ... 격조 있게 울려 퍼지는 색을 이렇게 써본 적이 없네. 과일이 무르익었으며, 개는 경계를 펴고, 오른편의 두 마리 비둘기는 정답게 이야기를 주고받네.”

고갱의 누드 작품은 타히티 여인을 모델로 하고 있지만 유럽의 영향이 반영되었다. 비록 타히티 여인을 모델로 그렸지만 미개인의 누드로 한정하지 않고 유럽인의 감각으로 보는 객관적 개념의 에로스를 표현하려고 했다. 그가 유럽인의 시각에서 타히티 여인을 바라본 것은 배경에 나타난 선악과나무와 나무를 둥글게 감고 있는 뱀의 형상에서 확인할 수 있는데 분명히 성서를 참조한 것이다. 고갱은 말했다. “타히티의 이브는 매우 섬세하며 자신의 순진무구함을 잘 알고 있다. 그녀의 어린아이 같은 눈 속에 깊이 숨어 있는 비밀은 불가사의함으로 남아 있다.” 고갱은 원죄를 암시하지 않은 채 열대의 이브를 묘사했다. 1896년 봄 고갱은 연속적으로 원주민 여인들 누드를 신비감에 싸인 모습을 그렸으며 여인들은 꿈속의 영상처럼 나타났다. 그에게는 세 가지 혹은 네 가지 색으로 충분했는데, 노란색, 붉은색, 파란색, 혹은 푸른색만 있으며 그릴 수 있을 정도였다.

그는 미개인 누드의 아름다움을 표현하려고 했다. 의도적으로 침대 커버와 배경을 꽃으로 장식하여 누드의 아름다움을 더욱 드려내려고 한 작품이 <두 번 다시, 오 타히티>(고흐 811)이다. 이 작품은 잘못 그려진 캔버스를 재활해 사용한 것이다. 풍경화가 실패하자 물감이 두텁게 칠해진 윗부분을 잘라내고 캔버스를 다시 활용할 수 있도록 만들었으므로 그가 의도적으로는 잘 사용하지 않는 기다란 캔버스가 되었다. 그는 여기에 맞게 침대에 길게 누운 누드를 그렸는데 1892년에 그린 <저승사자>(고흐 730)와 유사한 구성이지만 좀더 우수에 젖어 있고 공포에 질린 모습으로 상징주의 작품이다. 침대 위 누드 뒤로 누드를 바라보는 새가 한 마리 보인다. <저승사자>에서의 모델은 테하마나이지만 이 작품의 모델은 당시의 동거녀 파라후이다. 침대는 고갱이 상상해서 그린 것으로 짐작되며 두 작품 모두에서 침대 머리는 둥근 형태이다. 빛이 대각선으로 위에서 아래로 비치는 조명을 사용했으며 몸의 섬세한 명암을 묘사했다.

고갱은 1901년에 들어서서 연속적으로 꽃이나 과일이 있는 정물을 그리기 시작했다. 파리의 화상 볼라르가 이런 작품이 팔기 수월하니 많이 그리라고 주문했기 때문이다. 볼라르는 꽃을 주제로 그린 그림이라면 자신이 구입하겠다고 했으므로 고갱은 정물을 그리게 되었다. 그는 자연에 나가 그리지 않고 있다면서 타히티는 꽃의 땅이 아니라고 했다. 정원에 심은 몽프레가 보내준 씨앗들은 꽃으로 피어났고 그것들을 꺾어다가 자신이 원하는 정물을 그렸다. 1901년에 그린 해바라기 정물이 네 점 남아 있다. 해바라기 그림은 반 고흐가 1888~89년 아를에서 그린 것과 관련이 있다. 고갱은 반 고흐가 자신이 사용할 방을 위해 그린 해바라기를 가까이서 늘 보았을 뿐 아니라 반 고흐가 해바라기를 그리는 모습을 그린 적도 있다. 그는 <해바라기와 퓌비 드 샤반의 <희망>>(고흐 845)을 그렸는데 그는 자신이 좋아하는 작가의 작품을 자신의 작품에 배경으로 종종 사용했다.

고갱은 1898~99년에 목판화를 제작하기 위한 목판을 14점을 제작했다. 그는 1900년 1월 볼라르에게 적었다.
“다음 달 약 475점의 목판화를 보내려고 하는데 25장에서 30장을 찍은 후 각각의 목판을 없애려고 합니다. 절반 가량의 목판은 이미 두 번이나 사용한 것으로 나 같은 사람이라야 할 수 있는 일입니다.”

이때 제작한 14점의 목판화는 <노아 노아>를 위해 1894~95년에 제작한 어두운 밤의 장면이나 남자와 여자의 공포를 묘사한 열 점의 목판화와는 완전히 다른 것들로 전체적으로 부드러운 장면들이며 과거의 주제들을 인용한 것들이다. <망고를 든 (지친) 여인>(고흐 852)에 크라나흐의 <다이아나>를 변형시킨 <왕후>가 삽입되었음을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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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갱과 반 고흐의 상징주의 그리고 표현주의

 
김광우의 <성난 고갱과 슬픈 고흐>(미술문화) 중에서

 

상징주의는 1885년경~1910년경에 성행했던 문학과 미술운동으로 사실에 충실한 재현을 거부하고 환기와 암시의 방법을 선호했다. 상징주의는 19세기 말 폭넓은 반물질주의, 반합리주의 조류의 한 부분이었고, 특히 인상주의의 자연주의적 목표에 대한 반동이었다. 화가의 감정적 경험을 시각적으로 표현한 상징주의 회화는 색채와 선에 많은 의미를 부여했다. 그리고 상징주의는 강렬하고 신비적인 종교적 감정을 특징으로 하며, 에로틱한 것과 병적인 것도 중요하게 다뤘다. 상징주의 화가들은 평면화된 형태와 넓은 색면을 지향했다.

예술이 곧 표현이라는 생각은 고갱과 반 고흐에게서 이미 나타났고 이를 분명하게 글로 밝힌 것은 20세기에 들어서였다. 서양미술에서 표현을 중시하게 된 것은 천재의 개념과 함께 낭만주의 시대에 수립되었다. 천재는 어떤 분야에서건 정신적인 세계, 즉 절대에 대해 보통 사람들보다 우월한 통찰력을 가지며, 따라서 그는 자신의 우월한 인성을 표현함으로써 자신보다 열등한 사람들을 어느 정도 자신과 유사한 수준의 통찰로 이끌 수 있다고 믿었다. 이런 믿음에 근거하여 예술작품의 가치가 예술가의 가치에서 비롯된다는 주장이 제기되었다.

고갱과 반 고흐의 작품에는 상징주의와 표현주의의 요소가 함께 내재해 있는 것이 특기할 만하다. 두 사람이 주고받은 자화상 그리고 정물화, 풍경화, 인물화 등에서 이런 점을 발견하기란 쉽다.

고갱이 반 고흐에게 보낸 자화상 <레 미레제라블: 베르나르의 초상이 있는 자화상>(고갱 16)을 보면 성난 모습이다. 그는 자신을 빅토르 위고의 소설 <레 미제라블>의 주인공 장 발장에 비유했다. 사회로부터 부당한 대접을 받고 있다고 생각한 그는 <자화상>을 통해 “예술가의 영혼을 타오르게 만드는 격렬한 화염을 묘사하려고 했다”면서 1888년 10월 반 고흐에게 보낸 편지에 적었다.
“동심 어린 꽃송이와 소녀 같은 배경이 우리의 예술적 순수성을 나타낸다네. 장 발장에 관해 말하자면, 사회의 억압을 받았기 때문에 그의 사랑과 힘이 부랑자처럼 달라진 것이라네. 우리 인상주의 화가들도 마찬가지이지. 그렇게 생각하지 않나? 나 자신을 장 발장으로 묘사함으로써 스스로를 넘어서 사회에서 비참하게 희생된 우리 모두의 자화상을 그리려고 한 것이네.”

고갱은 자신을 고뇌하는 순교자의 모습으로 묘사하면서 순진한 모습의 에밀 베르나르의 초상화를 배경에 삽입해 일그러진 자신의 얼굴과 대조되게 하고 꽃무늬를 후광처럼 장식해 자신의 얼굴을 장 발장으로 상징하며 두드러지게 표현했다.

이 작품과 편지를 받고 반 고흐도 답례로 <자화상 (폴 고갱에게 바침)>(고갱 17)을 고갱에게 보냈다. 그는 일본 판화에서 승려를 보고 자신의 머리를 깎았다. 그는 자신이 회화 세계에서 도를 구하는 수도승과 같다고 생각한 것이다. 고갱은 사회를 위해 희생하는 장 발장이었고 고흐는 회화를 위해 도를 구하는 수도승이었다. 반 고흐는 1888년 6월에 수도승이 등장하는 피에르 로티의 소설 <마담 크리상템>을 읽었고 일본 판화 복사본을 수집하고 있었는데, 이런 것들에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보인다.

두 사람의 자화상에서 물과 불 같은 성격이 드러났는데 고갱은 인습타파주의자였으며, 빈정거리는 말을 했고, 냉소적이었으며, 궤변을 일삼았고, 무심한 면이 있었다. 반면 반 고흐에게는 북유럽 사람의 기질인 거친 면이 있었으며, 천성이 열심히 노력하는 기질이었고, 동료에게 격정적인 애정을 쏟는 불 같은 사람이었다. 반자연주의적인 혹은 상징주의 그림을 주로 그린 두 사람은 지성이나 관망한 사물로부터가 아니라 개인적인 감성에 기초하여 그렸다.

두 사람의 자화상에서 눈과 코 부분을 때어내 화풍을 비교할 수 있다.(고흐 56) 고갱은 살색을 칠했고, 눈썹 가장자리를 어두운 색으로 테를 둘렀으며, 물감 위에 연필이나 목탄을 사용해 드로잉의 효과를 첨가한 데 비해 고흐는 물감을 2~3mm 정도로 두텁게 사용하면서 눈썹을 삼차원적으로 표현하고 볼 또한 거친 붓자국으로 물감을 거칠게 두텁거나 얇게 칠하면서 살색이 아닌 감정을 나타내는 표현적이고 상징적인 색을 사용했다. 두 자화상에서 기법의 차이가 매우 상이하게 나타나 두 사람의 독특한 감각을 느낄 수 있다.

화가의 감정적 경험을 나타내는 상징주의와 화가의 우월한 인성을 드러내는 표현주의는 종종 모호하게 나타나기도 한다. 이런 예를 두 사람의 정물화와 인물화에서 발견할 수 있다. 반 고흐가 1885년 그린 <펼친 성경이 있는 정물>(고흐 8)은 세 가지 오브제 현대소설, 펼친 성경, 촛대로 구성되었다. 이런 오브제들은 17세기 네덜란드 정물화에 종종 등장한 것들로 반 고흐의 오브제 선택에는 새로운 점이 없다. 이 정물화의 특징은 크고 작은 것의 대비로서 커다란 성경과 작은 소설, 펼쳐진 책과 닫힌 책, 단색조의 책과 밝은 색상의 책을 꼽을 수 있으며 그래서 모호한 느낌을 준다. 펼쳐진 성경은 구약 이사야서 35장, 유명한 ‘종의 노래’가 기록된 페이지로 이사야가 시적으로 예언한 장차 오실 메시야의 역할로 해석되는 구절이다. 메시야는 인류의 죄를 대신해서 고난 받는 종으로 훗날 그리스도의 전형이 되었다. 소설은 에밀 졸라가 1884년에 쓴 <삶의 기쁨 La Joie de vivre>이다. 진리를 상징하는 성경은 커서 권위의 느낌을 주고 소설은 작지만 밝은 노란색으로 시선을 끈다. <삶의 기쁨>은 매우 진지한 철학적 의문을 내포한 책으로 졸라는 전통 신앙이 부재한 가운데서 우리가 삶의 모든 비극을 기꺼이 받아들이고 의미 있는 존재로 남아 있을 수 있겠는지 독자에게 묻는다. 반 고흐는 이 정물화를 통해 신앙이 삶의 기쁨을 줄 수 있다고 말한다.

반 고흐가 실재를 신성화하는 신성한 사실주의라 할 수 있는 경향으로 나아갈 때 고갱의 작품은 초자연적 이상주의로 변하고 있었다. 이런 변화가 심화되어 고갱은 말년에 악마숭배 및 엑소시즘의 그림을 그리게 된다. 고갱의 대표작 <설교 후의 영상>(고흐 24)은 1888년 9월 중순 퐁타방에서 그린 것이다. 그는 야곱이 천사와 씨름하는 장면을 바라보는 시골뜨기 여인들이 자연적인 것과 초자연적인 것 사이에서 환희를 경험하는 순간을 모티프로 삼았다. 반 고흐의 <해질녘 씨 뿌리는 사람>(고흐 31)이 개신교 입장에서 본 새로운 종교화라면, <설교 후의 영상>은 가톨릭 입장에서 본 고갱의 환상적인 새로운 종교화라고 할 수 있다. 반 고흐의 환상이 실재적인 데 반해 고갱의 환상은 비실재적이다. 반 고흐의 작품이 물리적이며 자연주의적인 데 반해 고갱의 것은 형이상학적이며 초자연적이다. 고갱이 <설교 후의 영상>을 팔지 않고 브르통의 한 성당에 기증하고 싶어 한 것이 흥미롭다.

상징주의 시인이자 평론가인 알베르 오리에는 1891년 3월에 발표한 ‘회화에 있어 상징주의 운동’에서 고갱의 작품으로 상징주의를 설명했다. 오리에는 상징주의 성격의 작품에는 다섯 가지 내용이 필히 구비되어야 하는데 고갱의 작품에는 그것들이 있다고 주장했다.
1. 아이디어가 표현되어야 한다.
2. 상징적이어야 함은 고유한 표현이 아이디어에 있기 때문이다.
3. 추상적이어야 함은 일반적 의미 속에서 형태와 부호가 기록되기 때문이다.
4. 주관적이어야 함은 객관은 객관으로 보여지는 것이 아니라 주관자에 의해 관망한 부호가 되기 때문이다.
5. 장식적이어야 함은 이집트인, 그리스인, 원시인들이 예술적으로 장식했으며 그것들은 주관적, 추상적, 상징적, 이상적이었기 때문이다.

오리에의 다섯 요소는 고갱의 미학을 적절하게 설명했으며 20세기 미술의 특징으로 나타날 표현주의의 성격과 다르지 않다. 그래서 학자들은 반 고흐와 고갱을 표현주의 예술가들의 선조로 찬양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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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반적으로 걸인은 정신적으로 병든 사람이다  

 

김광우의 <마네의 손과 모네의 눈>(미술문화) 중에서 

 

걸인을 작품의 주제로 삼는다는 것은 다분히 사회비판적인 의도가 작용한다. 빈곤을 퇴치하지 못하는 사회에 대한 비판과 더불어 사람들의 멸시를 받는 걸인에게 인간의 존엄성을 심어주려는 것이다. 일반적으로 걸인은 정신적으로 병든 사람이다. 보통사람처럼 생각하고 행동할 수 있는 능력을 상실한 사람이다. 중세에는 바보들을 도시 밖으로 내쫓았는데 저능아와 정신분열자들만 바보로 취급한 것이 아니라 게으르거나 알코홀 중독자자들도 바보들과 함께 사회로부터 격리시켰다. 이들은 도시 밖 들에서 떠돌며 살다가 떼를 지어 사람이나 민가를 습격했다. 갱이 되는 것이다.

마네는 <압생트를 마시는 사람>(마네 22, 미술사 메트로 219-1)을 1859년 살롱전에 출품했다. 심사위원 중 한 사람 들라크루아가 이 작품을 옹호했음에도 불구하고 다수의 반대로 낙선되었다. 하지만 마네에게는 첫 성공작이다. 주정뱅이 걸인을 그린 그림은 교육적 목적을 중시하는 심사위원들의 심기를 건드렸겠지만 대충 문지른 듯한 붓질과 자유로운 소묘는 갈고 닦은 솜씨임이 분명했다. 마네는 특별히 사회비판적인 의도를 갖고 이 그림을 그린 것은 아니다. 그는 자신이 살고 있는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걸인을 주제로 선택한 것이다. 알코홀 중독자 걸인이 거리를 배회하는 것도 현대도시의 모습 중 하나이고 도시의 삶을 솔직하게 묘사하는 것이 화가의 의무라면 마네가 걸인을 그린 것은 현대회화의 모티프로 당연하다. 그는 그런 의도로 그린 것이다. 

 마네는 1860년 두아이 가에 화실을 얻고 바티뇰 블바드에 아파트를 얻었다. 바티뇰은 생라자르 역 북쪽에 있는 동네로 1861년 파리 시에 포함되었다. 이 시기에 파리에는 건축붐이 일고 있었고 유럽의 모든 철로가 파리로 통하도록 새로운 철로들이 건설되고 있었다. 아파트들이 여기저기에 들어서고 기차역이 생겨 많은 사람이 파리 시내로 몰려들자 파리의 인구는 매우 빠른 속도로 늘어났다. 파리는 현대화되면서 유럽의 수도로서의 면모를 갖추어가고 있었다. 바티뇰에는 파리의 중심으로 향하는 기차와 차들의 커다란 정거장이 있었다. 바티뇰 불바드에는 걸인과 집시들이 많았으며 마네는 그들을 모델로 그림을 그렸다.

마네는 역사화를 주로 그린 토마 쿠튀르(1815~79)의 문하에서 6년 동안 수학했지만, 그의 전통적인 훈련보다는 루브르에서 대가들 특히 벨라스케스, 무리요, 리베라 등 에스파냐 화파를 연구하는 것을 선호했다. <압생트를 마시는 사람>은 벨라스케스의 <메니프>(미술사 메트로 211-1)에서 영감을 받아 그린 것으로 마네는 벨라스케스로부터 인물을 단순화시키는 기교를 받아들여 파리의 걸인을 묘사했다. 그는 바닥에 술병을 그려넣어 관람자에게 걸인이 독한 압생트에 중독된 자임을 시사했으며 이 작품에서 처음으로 레몬껍질과도 같은 밝은 노란색으로 그림의 분위기를 들뜰게 만들었다. 이 작품은 6년 이상 그를 가르쳐온 쿠튀르에게 도저히 이해되지 않는 그림이었다. 쿠튀르는 “압생트 마시는 사람은 바로 이 작품을 그린 장본인이다”라고 혹평했다.

벨라스케스는 열아홉 살 때 보데곤bodegone 시리즈를 그렸는데, 보데곤이란 정물화적 모티프로 일상적 주제를 다룬 회화를 말한다. 이런 유형은 플랑드르의 떠들썩한 풍속화에서 유래한 것이지만 당시 에스파냐에서는 보편화되지 않을 때였다. 벨라스케스는 <달걀을 요리하는 노파>(1618)와 <물장수> 같은 주제에 진지함과 위엄을 불어넣었다. 그는 대상을 그 자체로 가치 있게 다루면서 냉정한 사실적 태도로 재현했으며 나중에는 인물 묘사에까지 확장하면서 전체 구성을 일관성과 기념비성으로 했다. 이런 점을 마네가 파악하고 자신의 작품에 응용했다.

비애, 유머와 인간적 이해를 담은 벨라스케스의 걸인 그림은 후세 화가들에게 회화의 새로운 가능성을 제시했고, 같은 나라 사람 고야가 삼십대 초에 그의 작품을 많이 모사하면서 대가의 기법을 익혔다.(미술사 메트로 237, 237-1) 고야가 1778년에 그린 <눈먼 기타 연주자>(고야 31, 32)는 <메니프>에서 영감을 받아 그린 것이다. 고야가 사회에서 버림받은 걸인에게 느낀 매력을 처음 표현한 작품으로 머리를 뒤로 젖힌 눈먼 걸인의 모습은 뒤틀린 이목구비의 융합체를 이룬다. 이 작품은 태피스트리 공장을 위해 밑그림으로 그린 것인데, 공장 측은 화면에 인물이 너무 많고 색조가 다양하다는 이유로 이 밑그림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고야는 작품을 수정해서 공장으로 돌려보냈지만, 기타 연주자의 얼굴은 고치지 않았다. 그는 수정을 요구받은 것이 비위에 거슬렸는지 원래 그림의 일부를 나중에 제작한 동판화에 그대로 옮겨놓았다. 괴상하게 생긴 눈먼 기타 연주자는 풍자적인 특징으로 나타났다.

태피스트리를 위한 고야의 밑그림들은 가난에 시달리는 에스파냐 농민들의 고단한 삶을 이루고 있는 날마다 되풀이되는 고되고 단조로운 노동이었다. 고야는 거기에서 고대 아르카디아(목동과 처녀들이 순결하고 근심걱정 없는 삶을 꾸려 나가는 이상향)의 목가적 전원시 같은 풍경을 끌어냈지만, 그후 거기에서 점점 멀어졌다. 사전 계획에 따라 제작된 이런 궁전 장식용 태피스트리 밑그림은 소박함을 좋아하는 당시의 취향을 반영한 것이다. 고야가 에스파냐 시골생활의 즐거움과 행복한 아이들을 그리고 있을 때 그의 어린 자식들이 연달아 죽은 것은 얄궂은 운명이었다. 고야의 자식 가운데 일곱 명이 요절했다. 인생의 즐거움을 그리라는 주문과 함께 자식들의 잇따른 죽음을 견뎌야 했던 정신적 부담이 젊은 그에게 무엇인가 다른 그림을 그리고 싶은 충동을 불러일으켰을 것이다. 실제로 1770년대 말과 1780년대에 그린 작품에는 대부분 비타협적인 양식이 나타나 있다. <눈먼 기타 연주자>는 그의 밑그림 중 가장 크고 야심적이며 독창적인 작품이다. 관행에서 벗어난 이 작품은 고야의 예술이 동시대인의 예술과 완전히 달라지기 시작한 순간을 나타낸다.

가수, 악사, 유랑 연예인, 그리고 시골 농부와 신사들이 서로 어깨를 맞대고 연주에 귀를 기울이는 광경을 묘사한 회화와 판화 및 태피스트리 밑그림은 17~18세기 유럽의 대중미술에서 가장 폭넓게 사랑받는 주제를 이루었다. 벨라스케스의 영향 외에도 고야는 티에폴로가 젊은 시절에 베네치아에서 그린 거리의 악사들에게 감동을 받았으며, 그 자신도 마드리드 거리에서 구걸하는 눈먼 악사들을 보았을 것이고, 별난 기인과 사회에서 소외당한 부랑자와 불구자에 대한 그의 직관적 통찰력은 풍자적 표현에 대한 취향으로 발전했다. 이리하여 그의 밑그림은 에스파냐에서 가장 독창적인 작품이 되었고 왕실도 그를 주목하게 되었다.

<늙은 음악가>(마네 28)는 이질적인 인물들을 배열하여 구성한 작품이다. 늙은 음악가는 마네의 화실 부근에 살던 바이올린 연주자 집시 장 라렌느인데 늘 술에 취해 있었던 그는 경찰들로부터 몹시 천대받았다. 마네는 라렌느를 화면 중앙에 고대 철학자의 모습처럼 앉히고 아이들의 호기심과 사랑을 받는 순진한 사람으로 묘사했는데 그리스 철학자 크리스포스를 묘사한 헬레니즘 조각을 변형한 것이다. 마네는 루브르에 있는 이 조각을 모사한 적이 있다. 모자를 쓴 흰색 옷을 입은 아이는 바토의 <피에로>(마네 29, 28)를 상기시킨다. 바토의 피에로는 이탈리아 코미디언 배우로서 바토가 파리에 있는 카페를 장식하기 위해 그린 것이다. 18세기의 프랑스에서 이탈리아의 코미디는 잘 알려져 있었다. 피에로처럼 생긴 아이의 어깨에 오른손을 얹고 놀라운 시선으로 늙은 음악가를 바라보는 아이의 얼굴에는 호기심이 가득하다. 아이를 안고 있는 소녀도 마찬가지로 호기심에 찬 눈으로 늙은 걸인을 바라보는데 라렌느는 마치 기념촬영이라도 하는 듯한 모습으로 관람자를 바라본다. <압생트 마시는 사람>이 그 옆에 걸터앉아 그를 바라보고 있다. 마네는 <압생트 마시는 사람>이 마음에 들어 이 인물을 그대로 <늙은 음악가>에 삽입했다. 아이를 안고 있는 소녀와 두 소년도 따로 그려서 하나의 그림으로 합성시켰는데 이는 당시 화가들이 즐겨 사용한 방법이다.

마네는 벨라스케스의 <메니프>와 <애솝>(미술사 메트로 211)에서 영감을 받아 나중에 <철학자 (망토를 걸친 걸인)>(미술사 메트로 238), <넝마주이>(미술사 메트로 241), <철학자 (굴과 걸인)>(미술사 메트로 239, 240)등을 그렸다.

이런 작품들은 마네의 참신하고 획기적인 표현 기법을 돋보이게 한 결과가 되었다. 이때부터 마네는 젊은 아방가르드 화가들 사이에서 스승으로 인식되기 시작했으며, 뒤에 출현할 인상주의로의 길을 여는 계기가 되었다. 모네, 르누아르, 바지유, 시슬레, 세잔 등을 포함한 인상주의 그룹 화가들은 마네를 존경했으며 이들은 게르부아 카페 등지에서 모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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