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지 미술


대지 미술은 흙, 바위, 모래 등을 소재로 작품을 제작하는 것을 말하지만 이 세 가지의 구별이 명확하지는 않다. 대지작품은 주로 거대한 규모의 작업을 의미한다. 이런 작품은 1960년대 후반에 등장했는데 당시의 다양한 경향의 미술과 관련이 있다. 제작된 형태가 종종 극도로 단순한 점은 미니멀 아트와 비슷하며, 보잘것없는 재료를 사용한다는 점에서는 아르테 포베라와 관련이 있고, 제작된 작품이 일시적으로 존재한다는 점에서 보면 해프닝이나 퍼포먼스와 관련이 있으며, 거창한 작업에 관한 계획안은 단지 계획으로만 존재하므로 개념 미술과 연결지을 수 있다. 또한 도시 문화의 세련된 기술에 대한 혐오를 반영한 히피 문화의 자연 회귀 정신의 한 부분으로서 선사시대의 흙무더기와 목초지 경계선에 대한 연구에 열광했던 당시의 상황과 연관되는 점도 있다. 전통적인 엘리트 미술과 상업성을 지향하는 화랑 중심의 미술계에서 벗어나려는 욕구 또한 현대의 전형적인 모습 중 하나였지만, 사실 거대한 대지작품은 막대한 경비를 필요로 했고, 쉽게 접근할 수 있는 장소가 아닌 외진 곳에 위치하는 경우가 많아 대중적이지 못했다.

대지 미술의 개념은 1968년 뉴욕의 드완 화랑에서 열린 전시회와 이듬해 코넬 대학에서 열린 ‘대지 미술전’을 통해 정립되었다. 드완 화랑에서의 전시회에는 강철 입방체를 매장해놓은 르윗의 <구멍 속의 상자>와 네바다 사막 위에 두 개의 흰 평행선을 그린 디 마리아의 <1마일 드로잉>의 기록사진들이 포함되었다. 이런 작품들은 개념 미술이라고 할 수 있으나, 디 마리아는 전시장을 흙으로 채웠고 다른 예술가들은 바위와 작은 나뭇가지 같은 물질들을 화랑에 가져다놓았다.

1945~49년 시러큐스 대학에서 공부하고 1965년 뉴욕의 대니얼 화랑에서 첫 개인전을 연 솔 르윗(1928~)은 1966년 휘트니 연례전과 1968년의 드완 화랑에서 열린 ‘10전’에 초대되었다. 알루미늄 대들보 위에 에나멜을 씌워서 구워 만든, 틀도 없고 유리도 끼워져 있지 않은 다중 칸막이 구조물은 르윗을 도널드 저드, 로버트 모리스와 더불어 미니멀 아트에서 가장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는 예술가로 올려놓은 동시에 시리얼 아트의 발달에서 가장 흥미로운 일례를 보여주었다. 그러나 그의 작품은 구체 미술처럼 수학적 공식에 의거한 것이 아니었다. 그는 1968년에 금속 입방체를 제작하여 네덜란드 베르게이크에 있는 비세르 하우스 내의 땅에 묻었고 이 오브제가 시각적으로 사라지는 것을 사진으로 기록했다.

멜 보크너는 <미니멀 아트>에서 르윗의 작품에 관해 적었다.
“르윗의 복잡한 다중 구조물은 엄격한 논리 체계의 결과로, 개인적 요인의 작용을 가능한 제거한 것이다. 이는 하나의 체계를 이루며 그의 작품의 경계를 제작자와 관람자 모두로부터 분리된 ‘지구상에 존재하는 사물’로서 제한하는 데 적합하다. ... 르윗의 작품을 접하면 즉시 직관적으로 질서 정연함을 느낄 수 있으나 작품을 이해하거나 해석하는 방법은 어디에서도 찾을 수 없다. 그 대신 선, 이음매, 각과 같은 엄청난 양의 정보가 보는 이를 압도한다. 르윗은 작품의 개념을 매우 엄격히 통제하고 미술품은 이러해야 한다는 어떠한 기존 관념과도 타협하지 않음으로써 개념적인 질서가 시각적 혼란으로 빠지는 특이한 지각의 와해 현상에 도달했다.”

관람자는 르윗 조각의 주위를 걸어가며 감상하게 되므로 그의 조각이 개별적이고 관계없는 사물로서 실제로 존재한다는 사실을 즉각 인식할 수 있다. 그리고 그의 작품은 다른 시점에서 본 모습들이 표로 그려지기 때문에 매순간마다 다르게 보이지만 늘 평면적이라는 것이 특기할 만하다.

캘리포니아 대학에서 공부한 월터 디 마리아(1935~)는 1968년 유럽을 방문한 뒤 이듬해 구겐하임 재단 연구지원금을 받았다. 디 마리아는 미니멀 아트의 초기 주창자 중 한 사람이었고, 미니멀 아트라는 명칭이 일반화되기 이전인 1960년경 이미 미니멀 아트 작품을 제작했다. 1961년부터 퍼포먼스 작업에서 로버트 모리스 및 이본 레이너와 함께 공동으로 작업했으며, 1961년 실행되지는 않았지만, 아트 야드Art Yard 프로젝트를 통해 대비 미술 분야를 개척했다. 그의 작품 중 일부는 개념 미술의 범주에 속하는데, 1968년의 <마일 드로잉>이 이런 예로, 모하비 사막에 서로 3.6m 떨어진 두 개의 분필선이 평행으로 3.2km 뻗어 있는 작품이다. 1968년 뮌헨의 하이너 프리드리히 화랑에서 개인전을 가졌는데 여기에 45.3 입방 마터에 달하는 흙으로 가득 찬 방을 전시했다.

누구보다도 거대한 규모의 대지 미술 작업을 한 예술가는 로버트 스미스슨(1938~73)이었다. 뉴욕의 아트 스튜던츠 리그에서 수학한 스미스슨의 작품은 미니멀 아트의 범주에 속했다. 그는 특히 반사작용과 거울 이미지들을 실험했는데, 예를 들어 크릴론을 칠한 금속 테에 거울처럼 반사하는 플라스틱만 끼운 작품들을 전시하기도 했다. <지구라트 거울>은 보통의 거울 조각들을 하나 위에 또 다른 하나를 쌓아올리는 방식으로 구축한 작품이다. 그는 수학적 비개성에 관한 자신의 견해를 1966년 <아츠 Arts> 11월호에 실린 글에서 상세하게 설명했다.

스미스슨은 1960년대 말부터 대지 미술로 전환했다. 그는 펜실베이니아 주와 뉴저지 주의 버려진 채석장이나 오래된 광산의 흔적을 찾아가 바위조각이나 자갈, 지질학적 폐물들을 수집하여 무작위로 쌓아올리거나 금속상자 혹은 나무상자 속에 배열했다. 이것과 거울들을 장소 계획서, 지질도, 인스태마틱 컬러사진과 함께 놓아 잘 알려진 ‘탈장소 Non-Sites’를 구성했다. 그는 이전에 정크 예술가들이 도시의 쓰레기를 사용한 것과 유사한 방식으로 자연의 쓰레기를 예술이라는 목적을 위해 사용한 것이다. 유타 주의 그레이트 솔트 호에 나선형으로 돌출되어 나온 <나선형 방파제>(1970)는 그의 가장 잘 알려진 전시 장소에서 제작된 구조물 중 하나로 물의 흐름에 따라 침식되도록 만들어졌다. 1971년에는 네덜란드의 엠멘에 <나선형 언덕>을 제작했다. 스미스슨은 이런 새로운 개념들을 충분히 발전시키기도 전에 비행기 추락사고로 사망했다.

다른 주요 대지 예술가들도 대부분 스니스슨과 마찬가지로 미국인들로 지하 미로를 제작한 앨리스 에이콕(1946~), 메리 미스(1944~), 마이클 하이저(1944~) 등이 있다. 하이저의 작품 중 가장 유명한 <이중 부정>(1969~70)은 네바다 사막 위에 만들어진 폭 30피트, 깊이 50피트, 총 길이 1,500피트인 두 개의 길로, 그가 “예술가들이 늘 자신들의 작품을 놓고 싶어 하는 유린되지 않고 평화로우며 종교적인 공간”으로서 찾아낸 장소에 만들어졌다.

불가리아계 미국 조각가이며 실험 예술가 크리스토(1935~)는 때때로 대지 예술가로 분류되지만, 그의 작품은 사실 분류가 불가능하다. 섬유 공장을 운영하던 화공학 기술자의 아들로 태어난 그는 1952~56년 소피아에 있는 아카데미에서 공부했다. 그는 1964년에 뉴욕에 정착했고 1973년에 미국 시민권을 취득했다. 처음에는 초상화가로서 생계를 유지했지만 곧 크리스토 자신이 발전시킨 표현의 한 형태이며 그를 세계적으로 유명하게 만든 ‘포장 empaquetage’을 창안했다. 이는 캔버스 천이나 반투명 비닐 같은 물질로 포장한 물체와 그 결과를 예술이라고 명명하는 행위로 이루어져 있다. 크리스토는 처음에 스튜디오에 있는 물감 통 같은 작은 물체로 포장을 시작했는데, 이는 만 레이가 이미 예견한 바 있다. 그러나 작품의 규모가 점점 더 커져 나무와 자동차를 거쳐 건물과 환경의 부분으로까지 확장되었다. 그는 자신의 작품에 관해 말했다.
“나의 작업은 전치에 관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기본적으로 오늘의 나조차도 정착하지 못한 사람이고, 이것이 나로 하여금 지속되지 않는 예술을 만들게 한다. ... 나는 매우 흥분되는 작품을 제작한다. 강철, 돌, 혹은 나무와 다르게 천은 바람과 태양의 물리적인 상태를 감지한다. 작품은 새로운 것이며 재빨리 사라져버린다.”

영국의 가장 대표적인 대지 예술가로는 앤디 골즈워디(1956~)와 리처드 롱(1945~)을 들 수 있다. 롱의 작품은 조각, 개념 미술, 대지 미술 모두를 아우른다. 1967년 이후의 작업은 영국의 자연에서 출발한 것으로 1969년부터 국외로 확대되어 때로는 아주 멀리 떨어진 지역이나 적대국에서까지 행해졌다. 그는 걸어가면서 수집한 돌과 잔가지 같은 것을 화랑 안으로 가져와 원 또는 단순한 기하 형태로 배열 전시했다. 또한 화랑이 아니라 재료들이 원래 있던 위치에서 작품을 제작하기도 하며, 산책로를 찍은 사진, 걸어가며 본 것이나 자신의 심리 상태를 쓴 글, 지도 등을 기록으로 남겼다. 롱은 영국 대지 미술을 이끄는 인물로 이미 1976년 베니스 비엔날레에 영국 대표로 참가할 정도로 국제적인 명성을 얻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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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광우의 <레오나르도 다 빈치의 과학과 미켈란젤로의 영혼>(미술문화)에서 

 
미켈란젤로와 다윗

 

미켈란젤로는 1501년 피렌체로 돌아왔다. 피렌체 대성당 작업장에는 ‘거인’으로 불리는 매우 커다란 대리석이 있었다. 이것은 약 40년 전 르네상스 조각가 아고스티노 델 두치오에 의해 채석되었지만 작업장에 방치되고 있었다. 26살의 미켈란젤로에게 조각가로서 명성을 날릴 절호의 기회가 찾아왔다. 피렌체의 통치자 피에트로 소데리니는 이 대리석으로 <다윗>을 제작하게 한 것이다.

로마에서 5년 동안 체류하면서 기술을 연마해온 미켈란젤로는 <바쿠스>와 <로마 피에타>로 자신의 위상을 로마에 알렸다. 이제 그는 고향을 위해 걸작을 제작하고 싶었다. <다윗>은 그동안 로마에서 익힌 솜씨를 시험하는 의미를 지니는 작품이자 그가 대가의 반열에 올랐음을 시위하기에 적당한 작품이었다.

도나텔로도 <다윗>을 강한 소년의 모습으로 형상화했고, 취향은 전혀 달랐지만 베로키오도 <다윗>(미켈란젤로 205)을 날씬하고 섬세한 소년의 모습으로 묘사했지만, 둘 다 칼을 들고 있어 다윗이 적장의 목을 베었다는 기록이 없어 성서적 묘사가 아니다. 기베르티의 조수로 일한 적이 있는 도나텔로는 15세기 유럽을 대표할 만한 조각가이다. 그는 23살 때 피렌체 대성당을 위해 <다윗>을 제작했고 후에 여러 점의 <다윗>을 제작했다. 그가 제작한 <다윗> 가운데 가장 빼어난 것은 코시모의 주문을 받아 1430년에 청동으로 뜬 것으로 메디치 궁전 안뜰에 세워졌다. 그는 로마에서 초상 흉상을 제작하는 방법을 익혀 르네상스 초기 초상 흉상 제작자들 중 하나가 되었다. 베로키오는 조각가이면서 화가였고 쇠를 잘 다뤘으며 당시 이탈리아의 중요한 예술가들 중 하나로 알려졌다. 그의 별명은 ‘진정한 눈’으로 날카로운 시각 때문에 붙여진 것이 아니라 젊었을 때 그 별명의 성직자 수하였기 때문에 얻게 된 것이다. 그는 자신이 도나텔로에게서 수학했다고 했지만 주요 재능은 금세공이었으며 섬세한 장인적 기교가 뛰어난 것이 특징이다. 개인적인 위대함으로 보면 도나텔로와는 비교가 되지 않지만 그는 새로운 세대의 이상을 매우 명료하게 표현한 예술가였다.

도나텔로와 베로키오와는 달리 미켈란젤로의 작품을 보면 이름답고 젊은 승리자의 상으로 물리적 혹은 심리적으로 곧 행동할 듯한 자세로 돌팔매로 적장을 쓰러뜨린 성서와도 일치한다. 신앙의 힘으로 우뚝 선 채로 “주는 나의 빛이시고 구원이시니 내가 누구를 두려워하랴” 혹은 “주는 나의 바위가 되시고 요새가 되시니” 하는 자신만만한 태도이다. 장난기를 다 벗지 못한 덩치만 큰 사람, 소년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남자도 아닌 아니, 몸은 아직도 성장하는 중이며, 팔다리가 거대한 손발과 잘 어울리지 않는 것처럼 보이는 그런 나이의 청년이다. 이 작품은 그가 누드 남자의 고대 이상형을 알고 제작했음을 보여준다.

<다윗>과 미켈란젤로가 25년 뒤에 제작한 <아폴로 혹은 다윗>(미켈란젤로 368)을 비교하면, 모티프가 매우 공허하다는 느낌이다. <아폴로 혹은 다윗>의 세부는 아주 단순하지만 이 조각상은 동세를 통해서 무한히 풍부한 효과를 내고 있다. 여기에는 특별한 힘의 소모나 거창한 몸짓도 없다. 신체는 하나의 덩어리로 단단하게 응집되었으면서도 완전히 숙련된 깊이를 지녔으며, 뒤쪽 공간에도 생동감과 동세가 있다. 이런 점에서 보면 <다윗>은 빈약하기 짝이 없다. 누드 신체와 그 동세, 미켈란젤로는 이 둘을 추구했다. <아폴로 혹은 다윗>은 피렌체 공화정의 지도자 바치오 발로리를 위해 대리석으로 제작한 것이지만 미켈란젤로는 이 작품을 미완성으로 남겼고 발로리에게 보내지 못했다. 1530년 피렌체 공화정이 무너지고 메디치 가의 세력이 다시 강화되었기 때문이다. 이 작품을 <아폴로 혹은 다윗>이라고 하는 이유는 다윗이나 아폴로 둘 중 하나일 것으로 추측되기 때문이다. 어깨 뒤로 불분명한 형상의 덩어리가 있는데, 이를 화살통으로 해석하면 이교도의 신 아폴로가 되고 돌팔매 끈으로 해석하면 성서적 영웅이며 이스라엘의 왕이 된 다읫이 된다.

미켈란젤로는 <다윗>을 4m가 넘는 거대한 크기로 제작했다. 고대 조각가가 이런 거대한 대리석을 깍아 제작할 때는 보통 신의 형상을 만들었지만 미켈란젤로는 성서의 인물 다윗의 형상을 만들었다. 르네상스를 고대의 ‘재탄생’이라고 할 때 <다윗>보다 다 함축적으로 그 의미를 시위하는 조각은 없다. 그가 이 조각상을 제작하기 시작한 것은 1501년 9월 13일 월요일부터였다. 기록에 의하면 1502년 2월 28일 절반가량 제작되었으며 1504년 1월 25일에는 거의 완성되었다.

비례가 잘 맞지 않는 모습을 거대한 크기로 확대했지만 동작의 기묘한 리듬이 있고 다리 사이로는 큰 삼각형이 생겼다. 그는 굳이 아름다운 선을 만들려고 하지 않았지만 모든 세부의 선들이 놀랄 만큼 아름다우며 전체적으로 신체의 탄력을 표현해냈으므로 거듭 놀라움을 환기시키기에 충분하다. 미켈란젤로는 다윗이 왼발을 옆으로 살짝 벌리면서 몸의 중량을 오른쪽 다리에 지탱하게 했다. 왼발은 약간 앞으로 내민 채 발가락으로 바닥을 살짝 누르는 자세이다. 이 발동작에서 다윗에게 내재하는 힘을 느낄 수 있다. 헝클어진 머리카락, 깊게 주름진 이마, 쑥 들어간 눈, 길게 똑바로 선 코, 돌출한 입술 이런 것들이 얼굴에 긴장감을 나타내며 뚫어지게 응시하는 눈, 두터운 목, 돌출한 목의 근육, 몸통, 팔에서 상상할 수 없는 힘을 느낄 수 있다. 머리는 반비례적으로 크지만 멀리서 바라보게 되면 축소감으로 비례적으로 보인다. 다윗은 왼손을 올려 늘어진 투석기 한쪽 끝을 쥐고 있다. 돌을 쥐고 컵 모양을 한 오른손은 반비례적으로 크며 투석기의 다른 한쪽 끝을 쥐고 있다. 이 작품은 관람자가 주위를 돌며 감상하게 만든다.

성서에는 어린 다윗은 사울 왕의 무기를 들기에는 체구가 너무 작은 것으로 묘사되었지만 미켈란젤로는 다윗을 거인으로 제작해서 사람들을 놀라게 했으며 완전한 누드로 묘사해 놀라움을 가중시켰다. 미켈란젤로는 <다윗>을 거구인 골리앗을 살해하고 나라를 구한 미래의 왕으로 묘사하면서 그의 신앙과 용기를 엄청난 정도로 표현하려고 했다. 이 작품은 당시 프랑스의 압력으로 피렌체로부터 독립한 피사를 탈환하기 위해 파병했던 피렌체 시민들에게 역경을 이겨내는 힘과 용기를 고취시키기에 충분했으며 자긍심을 심어주었다.

바사리는 극찬했다.
“의심의 여지없이 이 조각은 고대의 것이든 모던의 것이든, 그리스인의 것이든 로마인의 것이든 간에 모든 조각을 퇴색시켰다. ... 분명한 것은 미켈란젤로의 <다윗>을 본 사람이라면 생존하거나 죽은 조각가가 제작한 어떤 조각이라도 볼 필요가 없다는 점이다.”

피렌체 지방자치회는 미켈란젤로가 피렌체의 도덕적 힘을 은유적으로 표현했다고 호평하면서 <다윗>을 청동으로 제작할 것을 의뢰했다. 당시 샤를 8세의 총애를 받던 피에르 드 로앙 장군에게 프랑스와의 동맹을 유지하기 위한 외교적 수단으로 사용하기 위해서였다.

<다윗>이 제작되었을 때 이 조각의 위치를 놓고 피렌체 시민들 사이에서 격렬한 논란이 일어났고 피렌체 시는 예술가들의 자문을 구했다. 그때 레오나르도를 포함하여 페루지노, 보티첼리, 필리포 리피 등 유명한 예술가들은 <다윗>이 풍상으로부터 보호되어야 하기 때문에 로지아 데이 란지 내에 두어야 한다고 주장했지만 미켈란젤로는 시뇨리아(시청) 바깥 광장에 세워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 조각은 1504년 5월 14일에서 18일 사이에 대성당 작업실로부터 베키오 궁전 정면(미켈란젤로 207)으로 옮겨졌는데 불과 1km 미만의 거리임에도 불구하고 이틀이나 걸렸다. 오늘날 여기에 세워져 있는 복제품은 피렌체의 정계로 들어가는 관문을 수호하는 상징적 역할을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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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오-리얼리즘


1960년대 초에 특기할 만한 두 전시회가 있었다. 하나는 1961년 말 모마MoMA에서 개최된 ‘아상블라주전’이고 다른 하나는 이듬해 시드니 재니스 화랑에서 개최된 ‘네오-리얼리즘전’이다. 윌리엄 세이츠가 주최한 아상블라주전에는 입체주의 경향의 종이콜라주와 사진몽타주 외에도 다다와 초현실주의 작품, 정크조각 그리고 전시장 전체를 장식하는 환경예술까지 포함되었다. 1962년 10월에 개최된 네오-리얼리즘전에는 영국과 미국의 잘 알려진 팝아트 예술가들과 프랑스의 네오-리얼리즘 예술가들 그리고 이탈리아와 스웨덴에서 이와 연계된 행위를 하던 예술가들도 참여했는데, 미국에서는 라우센버그와 존스가 참여했다.

네오-리얼리즘Neo-Realism이란 용어는 프랑스어 누보 레알리슴을 영어로 번역한 것이다. 이 용어는 1913년에 열린 그룹전 네오-리얼리스트전에서 이미 사용된 적이 있었다. 이 전시회에 참여한 찰스 기너는 1914년 <새로운 시대>에 기고한 글에서 리얼리즘을 주제보다는 양식으로 규정했다. 리얼리즘은 예술가가 자신이 경험한 자연을 직접 그대로 표현하는 양식, 즉 자연에 대한 독자적인 해석으로 다른 사람들의 경험에서 빌린 2차적 인상과 비교된다는 것이다.

팝아트에 대한 인식이 아직 분명하지는 않았지만 네오-리얼리즘전은 지난 수년 동안 몇몇 예술가들이 행위한 팝아트를 공식화하는 중요한 의미를 남겼다. 이때까지만 해도 유럽의 네오-리얼리즘과 관련이 있는 팝아트에 대해서는 별도의 인식이 없었지만 추상표현주의나 파리에서 성행하던 앵포르멜과는 구별되었다. 유럽 예술가들은 다다와 초현실주의를 유산으로 상속받아 이런 경향의 미학을 추구한 반면 영국과 미국 예술가들은 근래의 대중적인 문화와 상업적이며 재현 가능한 이미지들에 관심을 기울였다. 미국의 팝아트 예술가들 중에서 라우센버그와 존스의 작품에서 다다와 초현실주의의 요소가 두드러져 두 사람은 팝아트보다는 네오-리얼리즘에 더 가깝다.

로버트 라우센버그(1925~)는 택사스 주 포트아서 태생으로 택사스 대학에서 약학을 공부하다 징집되어 제2차 세계대전에 참전했고, 1946~47년 캔사스시티 아트 인스티튜트에서 회화를 공부한 후 1947년 파리로 가서 아카데미 줄리앙에서 수학했으며, 1948~49년에 노스캐롤라이나 주의 블랙 마운틴 대학에서 독일인 화가 요제프 알베르스로부터 수학했다. 그는 1950년대 초 콤바인 회화를 제작하기 전 붉은색 콜라주 구성을 다수 제작했는데, 신문조각, 끈, 사진, 녹슨 못 등을 실제 사물들을 물감과 결합되게 사용했다. 그가 이런 실제 오브제들을 사용한 이유는 “예술과 삶 사이의 간격에서 활동하기” 위해서였으며, 이런 태도는 그를 가르친 작곡가 존 케이지의 영향이었다. 그의 오브제 조각과 콜라주는 피카소의 초기 조각과 다다주의자들, 뒤샹, 쿠르트 슈비터스의 작품에 의해 설정된 방향을 유지했다.

라우센버그는 1955년에 이미 과격한 콜라주 작품을 소개했는데 <인터뷰>(워홀 29)는 커다란 나무상자를 둘로 나눈 후 콜라주하여 색칠한 것으로 그림이라기보다는 벽에 붙인 조각이었다. 그는 구태여 조각과 그림을 구별하려고 하지 않았다. 표현을 위해서라면 장르와 장르의 구별도 무시함으로써 예술가의 자유는 더욱 확장되었는데 뉴욕화단의 젊은 예술가들은 즉흥적인 표현에 충실하면서 형식을 전혀 개의하지 않았다. 그는 그해 <침대>(워홀 30)를 소개했는데 나무판에 베개와 이불을 붙이고 그 위에 추상표현주의의 빠른 붓질을 가한 작품이었다. 사람들은 전시장에서 이 작품을 보고 경악할 수밖에 없었다. 이제 회화의 영역이 어디까지 이를 것인지 짐작조차 할 수 없게 된 사람들은 예술가들이 예술이란 미명 하에 방종하는 것이 아닌지 예술가들의 지성에 의심을 품기도 했다. 라우센버그는 주위에서 쉽게 발견되는 물질들을 조합하여 작품을 제작했는데 낯익은 물질들을 예술에 포함시키는 것은 팝아트의 길을 예비하는 것이었다.

특기할 점은 이 시기에 실크스크린이 매체로 등장한 것이다. 특히 라우센버그의 실크스크린은 유명하다. 1962년 여름 롱아일랜드에서 판화전문상점을 운영하는 타티아나 그로스맨이 라우센버그에게 한정판 석판화를 의뢰했다. 라우센버그는 석판화를 제작하면서 사진의 이미지를 실크스크린하는 방법을 보태 새로운 이미지를 창조했는데 이런 기교에 관해 앤디 워홀로부터 도움을 받기도 했다. 여러 방법으로 실험한 라우센버그는 TV 채널을 바꿀 때마다 나타나는 영상들을 혼용한 작품을 실크스크린으로 제작했다. 이 시기에 그는 TV와 잡지에서 주로 이미지를 구했으며, 이렇게 수집된 이미지들을 배치하여 실크스크린으로 제작한 것이 <항공로>(워홀 45)이다. 그는 케네디 대통령, 우주비행사, 거리에서 쉽게 볼 수 있는 부서진 건물, 토마토 상자, 낙서 등 사람들에게 낯익은 팝이미지들을 회화적인 요소로 구성했다. 그는 말했다.
“내게는 아주 단순한 이미지들이 필요하다. 물이 든 컵이나 종이 벽지를 바른 욕실 ... 그것들로 사회문제들, 세상에서 벌어지는 재난들을 중화시키려고 했다.”

1964년 라우센버그는 제32회 베니스 비엔날레에서 최우수상을 수상했다. 바티칸 신문의 편집자 로세르바토레 로마노는 그의 수상에 발끈하여 “라우센버그가 완전히 그리고 일반적으로 문화를 파괴했다”고 말했다.

한때 라우센버그와 같은 작업장을 사용한 재스퍼 존스(1930~)도 1960년대 초에 뉴욕화단의 떠오르는 별이었다. 그는 조지아 주 오거스타 태생으로 사우스캐롤라이나 대학에서 공부했고, 1949년 잠시 동안 뉴욕의 미술학교에 다니다 징병되어 일본에서 복무했다. 존스가 25살 때 그린 미국 <국기>는 전설의 작품으로 알려졌는데, 1954년 어느 날 국기를 그리는 꿈을 꾸고 난 후 그렸다고 한다. <국기>, <과녁판>, <지도>, <숫자>, <색비교판> 등은 우리가 아무 곳에서나 볼 수 있는 이미지들이지만 존스는 그것들을 새로운 형태들로 창조하면서 그림이 사물의 모방이 아니라 사물 자체라는 미학을 제시했다. 아무 내용도 없는 국기와 과녁판에서 상징적 이미지들은 그의 손에서 사라지고 말았다. 그는 환상과 실제의 구분을 파괴한 후 그것들을 재정립하면서 창조과정 자체를 설명하려고 했으며 관람자가 이런 미학적 경험을 할 수 있도록 자신의 작품세계로 유도했다. 그의 작품은 최면술 같았으며 냉정한 형식으로 나타났다.

평론가 데이비스 실베스터와의 인터뷰에서 왜 국기, 과녁판, 지도, 숫자, 문자 등과 같은 사물들을 이용하는가에 대한 질문에 존스는 응답했다. “그것들은 내게 이미 형성되었고, 관습적이며, 비개성적이고, 실제적인 외적 요소로 보인다. ... 나는 가장 관습적이며 일상적인 사물은 평가되지 않은 채 다뤄질 수 있다고 본다. 다시 말하면 내게 그것은 미학적 등급과는 관련이 없는 명백한 사실로서 존재한다.” 또 다른 인터뷰에서 존스는 말했다. “나는 내가 본 것이 실제이거나 실제적인 것으로 이뤄진 나의 관념이라는 생각이 들 때 유쾌하다. 그리고 나는 내가 환영에 대해 인식할 수 있을 때 일종의 불쾌감을 느낀다고 생각한다. 또한 나의 작업 대부분은 하나의 대상으로서의, 하나의 실제 사물 자체로서의 회화와 관련이 있다.”

존스는 1960년에 음료수 에일 캔을 청동으로 제작한 후 실재와 같이 색을 칠했다. 존스는 두 개의 캔을 그대로 모방하면서 하나는 다 마신 빈 깡통으로 다른 하나는 음료수가 들어있는 깡통으로 제작하여 친구 라우센버그와 자신을 가볍고 무거운 관계로 은유적으로 표현했다.

1960년대 초에 숟가락과 포크가 처음으로 그의 캔버스에 매달렸는데 그것들은 지성과 무관한 팝 물질들이다. 팝이미지는 그가 선호하는 작품의 주요 내용으로 캔버스에 빗자루와 컵이 등장했다. <바보의 집>의 경우 빗자루는 물감을 칠하는 붓의 상징이다. 라우센버그가 팝 물질들을 병렬하면서 즉흥적으로 작품을 제작했듯이 존스도 사변적인 서투른 방법으로 팝 물질들을 즐겨 사용했다.

존스는 우리가 알고 있는 것과 보는 것이 서로 대조되도록 했다. 벨기에의 초현실주의 화가 르네 마그리트가 담배파이프를 그린 후 ‘이것은 파이프가 아니다’라는 문구를 적어넣었듯이 그런 효과를 자신의 작품에 응용했다. 마그리트는 “사물은 사물이 지닌 명칭이나 이미지대로 작용하는 것은 아니다”라고 말한 적이 있고 “그림에서 글자는 이미지와 같은 물질이다”라고 했는데, 존스가 그림에 사용한 글자는 마그리트의 미학과 관련이 있다. 
 

그가 1964년에 제작한 <뭔가에 의해>에는 의자에 앉은 반쪽 하반신 모양의 물질이 캔버스에 거꾸로 부착되었다. 1959년 모마에서 개최된 ‘16명의 미국사람전’의 카탈로그에 존스는 적었다. “자연의 어떤 관점에서도 볼 것은 있다. 내 작품은 시선을 바꿀 수 있는 가능성을 지니고 있다.” 이런 견해는 그가 가장 위대한 예술가라고 생각하는 뒤샹을 상기하게 한다. 또한 존스는 “나는 단순한 개념들에 관한 그림에 반대한다. 내게는 볼 것들이 너무 많다”고 적었는데, 그는 우리가 늘 세상의 일부분만 보고 있음을 지적하면서 우리가 어떻게 보느냐에 따라서 사물에 대한 이해도 달라진다는 사실을 알리려고 했다.

1964년 라우센버그와 존스의 전시회가 런던의 화이트 채플 화랑에서 각각 열렸을 때 평론가 앨런 솔로몬은 다음과 같이 적었다.
“다다에 의해 제기된 감각은 여전히 남아 있다. 미국의 신세대 예술가들은 이런 감각을 환기시키면서 객관적인 실재의 의미를 재실험하고 우리의 기본적인 미학적 경험에 도전하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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뒤샹의 <그녀의 독신자들에 의해 벌거벗겨진 신부>

 
김광우의 <뒤샹과 친구들>(미술문화) 중에서

 

뒤샹이 처음으로 <그녀의 독신자들에 의해조차 벌거벗겨진 신부>(이를 줄여서 큰 유리라고 한다)를 드로잉으로 그린 것은 1912년 7~8월이었다.(뒤샹 201, 72) 그는 뮌헨을 방문했을 때 그곳에서 그렸는데 향 레이몽을 위해 그린 <커피 분쇄기>(뒤샹 64)와 유사한 모양으로 나타났다. 기계 이미지는 문명예찬과 직접적으로 관련 있으며 뒤샹 외에도 레제, 피카비아, 레이몽 그리고 몇몇 예술가들이 기계 이미지를 탐험하고 있었다. 그들의 기계 이미지에 비해 뒤샹의 것은 덜 현대적으로, <커피 분쇄기>의 경우 손으로 갈아야 하는 구식 기계의 모습이다. 그는 <처녀>(뒤샹 73)란 제목으로 기계의 몸체를 습작했으며, 젖가슴과 들어올린 무릎으로 여성을 상징했다.

1912년 7월 말에 <처녀로부터 신부에 이르는 길>을 그렸는데 그가 그릴 <큰 유리>의 부분적인 실험이었다.(뒤샹 74) <처녀로부터 신부에 이르는 길>은 제목이 시사하는 대로 처녀에서 신부로 변화하는 마음과 육체의 운동이다. 처녀로부터 신부로 변화하는 데 무슨 운동이 필요할까? 문화사학자 제롤드 사이겔은 설명했다.
“처녀성을 잃어버리는 것은 여인 또는 아내가 되는 것을 말한다. 신부가 되는 것은 처녀성을 상실하기 전의 준비상태이다.”

신부가 되는 것은 불확실한 육체적 축복을 기대하는 환희의 짧은 기간에 도달하는 것이다. 뒤샹은 누드의 운동을 묘사하면서 입체주의 예술가들이 주로 사용하는 땅의 색들인 브라운색, 황토색, 노란색 그리고 검정색을 사용했다. 그의 작품에서 제목이 시사하는 신부의 미혼남자들의 모습은 찾아볼 수 없고 가는 선과 아주 가는 기다란 직사각형들만 볼 수 있을 뿐이다.

<처녀로부터 신부에 이르는 길>을 그린 후 8월에는 <신부>를 그렸다. 그는 어느 날 술집에서 취하도록 맥주를 마시고 방으로 돌아와 꿈을 꾸었는데 “꿈에 신부가 딱정벌레처럼 나타나 날개로 지독하게 나를 괴롭혔다”고 했다. 그의 꿈은 카프카의 <변신>을 연상시킨다. 이런 꿈을 꾼 후 그린 <신부>는 그의 다른 작품들과 더불어 매우 신비스러운 작품 중 하나가 되었다. 이 작품도 <처녀로부터 신부에 이르는 길>과 마찬가지로 입체주의 방법으로 운동을 묘사한 것이다.

뒤샹은 훗날 <신부>에 관해 말했다.
“<신부>에 관한 아이디어는 뮌헨에서 7, 8월 <처녀>와 <처녀로부터 신부에 이르는 길>을 드로잉하기 전부터 가지고 있었다. <처녀 No. 1>을 먼저 연필로 드로잉했고, 다음에 <처녀 No. 2>를 드로잉한 후 수채를 조금 칠했다. 그런 뒤 이것을 캔버스에 옮겼다. <그녀의 독신자들에 의해조차 벌거벗겨진 신부>를 생각한 것은 그 후였다. 그때 그린 드로잉들은 <계단을 내려가는 누드>와 마찬가지의 방법으로 그린 것들이다.

사람들은 <그녀의 독신자들에 의해조차 벌거벗겨진 신부>에서 ‘조차’란 말의 뜻이 무엇이냐고 묻는다. 나는 제목에 관심이 많은 편인데, 그 시기에는 특히 문학에 관심이 많았으며 단어들에 흥미를 느꼈다. 그래서 콤마를 찍은 후 ‘조차’라고 적었는데 부사 ‘조차’라는 단어는 의미가 없으며 제목 또한 작품과 무관하다. 그래서 가장 아름답게 시위한 부사적인 부사가 된 것이다. 의미가 따로 있었던 것은 아니다. 이 같은 ‘반감각적’ 언어는 문장의 관점에서 시적 차원으로서 내게 흥미로웠고 앙드레 브르통이 매우 좋아했다. 내게는 봉헌식과도 같았는데, 사실 그렇게 제목을 부칠 때 가치에 관해 생각해본 적은 없다. 영어로도 마찬가지이다. ‘조차’는 온전한 부사로 의미하는 바는 없다. 좀더 벌거벗길 수 있는 가능성들 모두란 뜻은 당치도 않다.“

<큰 유리>는 1923년까지 미완성으로 남아 있었고 뒤샹은 완성시킬 의지를 가지고 있지 않았다. 뒤샹은 큐레이터 캐서린 쿠에게 말했다. “난 무의식적으로 그것을 완성하지 않으려고 했다. ‘완성’이란 말은 전통적인 방법을 받아들인다는 뜻이며 또한 전통주의에 따른 모든 장치를 수용한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그는 <큰 유리>를 더 이상 손대지 않은 채 센트럴 파크 서쪽에 있는 캐서린의 아파트로 운반했다.(뒤샹 202, 203, 223, 195) 그는 <큰 유리>에 대한 짐을 그런 방법으로 벗을 수 있었다.

현재 필라델피아 뮤지엄의 뒤샹 화랑에 소장되어 있는 <큰 유리>는 가로 175.8cm에 세로 272.5cm이다. 뒤샹은 알루미늄을 사용하여 두 개의 유리를 위아래 수직으로 세웠다. 그것은 너무 커서 한눈에 관람하기보다는 시선을 여기저기 옮기면서 보거나 또 뒤로 물러나서 보아야 한다. 그는 그것이 그림이 아니라고 했다. 그는 자신의 글을 묶어서 만든 <푸른 상자>(뒤샹 249)에서 그것을 ‘지연’이라고 했다. 그는 <푸른 상자>에 적었다.
“그림이라고 하는 대신 ‘지연’이란 말을 사용한다. ... 그것이 그림이냐 하는 질문 자체를 더 이상 생각하지 않고 그저 진행하는 하나의 방법이다. 가장 일반적인 방법으로 지연을 만드는 것은 지연에 대한 다른 의미를 생각하지 않고 오히려 우유부단한 재결합에서 가능하다.”

<큰 유리>의 아랫부분은 <독신자 기계>이다. 각 요소는 자위행위의 의식을 거행하는데 그는 <푸른 상자>에서 이런 요소들은 자위행위를 시사하는 것이라고 적었다. 그는 “독신자는 스스로 자기의 초콜릿을 간다”고 적으며, 굳어진 가스의 번쩍번쩍 빛남은 “매우 자위행위적으로 환각에 빠뜨리게 한다”고 했다. 뒤샹의 <자전거 바퀴>와 둥근 형태들에 대한 강박관념은 <회전하는 유리판>(뒤샹 183)에서도 나타난 적이 있는데, 둥근 회전하는 물체는 남자의 성기처럼 앞으로 나왔다가 들어가곤 했다. <로즈 셀라비>(뒤샹 186)는 여성에 대한 궁극적인 그의 이기심을 나타낸 것이다. <큰 유리>에서 불행한 독신자들은 의도는 갖고 있지만 거만하게 구는 신부를 벌거벗기지는 못한다.

카반느가 훗날 뒤샹에게 물었다.

카반느: <큰 유리>의 기원은 무엇입니까?

뒤샹: 나도 모르네. 난 투명성 때문에 유리에 관심이 대단히 많았네. 그것만으로도 충분한 대답이 되겠지. 다음으로는 색이었어. 유리에 색을 사용하게 되면 뒤에서도 볼 수 있고, 색을 봉해버리게 되면 산화작용도 막을 수 있지. 색은 물리적으로 가능한 한 오래 순수한 모습을 유지한다네. 이런 중요한 요소들은 기술적인 문제지. 원근법도 매우 중요하네. <큰 유리>는 완전히 무시하고 업신여긴 원근법을 회복하네. 내게 원근법은 절대적으로 과학적이었어.

카반느: 사실주의 원근법이 아니란 말입니까?

뒤샹: 아닐세. 이는 수학적이고도 과학적인 원근법이었어.

카반느: 산술적으로 그렇게 한 것입니까?

뒤샹: 그래. 사차원에서 그렇게 한 것이야. 이것들은 중요한 요소들이라네. 안에 내가 삽입한 것은 자네도 말할 수 있지 않겠나? 난 보통사람들이 그림에 사용하는 것 대신 덜 중요한 것을 시각적 요소에 부여하면서 일화를 좋은 의미로 시각적인 것들과 함께 섞었지. 난 이미 시각적 언어를 성취하기를 바라지 않았네.

카반느: 망막이었겠군요. (망막은 뒤샹이 먼저 사용한 말이다.)

뒤샹: 궁극적으로 망막으로 나타났지. 모든 것이 개념적으로 되었으며 망막보다는 재현한 것에 달린 문제가 되었네.

카반느: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이 느끼기에는 개념 이전에 기술적인 문제가 먼저 대두되었을 겁니다.

뒤샹: 더러 그랬지. 근원적으로 몇 가지 개념들이 있었어. 대부분의 경우 기술적인 문제는 별로 없었고 유리니까 정교하게 작업해야 했어. ... 화가는 늘 장인과 같지.

카반느: 기술적인 문제보다는 과학적인 문제들의 관계라든가 산술이라든가 더욱 문제가 되었을 것 같은데요.

뒤샹: 인상주의를 시작으로 모든 그림은 반과학적이지. 쇠라의 그림도 마찬가지라네. 난 사람들이 별로 문제로 삼지 않고 시도하지도 않은 분명하고 정확한 과학의 관점을 소개하는 일에 관심이 있었네. 과학을 좋아해서 그랬던 것은 아니야. 반대로 과학을 신용하지 않기 때문에 과학을 부드럽고 가볍게, 그리고 별로 중요하지 않게 취급한 것이지. 하지만 아이러니가 내재했네.

카반느: 과학적인 점에서 말한다면 선생님은 과학에 많은 지식이 있었나요?

뒤샹: 아주 적었어. 난 과학자 타입이 아니지.

카반느: 아주 적었다구요? 선생님의 수학적 재능은 놀랄 만했는데 ...

뒤샹: 아냐, 천만에. 당시 우리에게 관심이 있었던 것은 사차원이었어. <푸른 상자>에는 사차원에 관한 글이 많이 적혀 있네. 자네 포볼로우스키란 사람을 기억하나? 그는 보나파트에서 출판사를 운영했네. 그 사람 이름이 정확하게 기억나지 않는군. 그는 잡지에 글을 썼는데 사차원에 관한 것이었고 널리 알려졌다네. 그는 납작한 이차원의 동물이 있다고 주장했지. 놀라운 이야기였어.

카반느: <신부>를 선생님은 “우리 안에 있는 지연”이라고 했는데.

뒤샹: 그래, 내가 좋아하는 시적 관심에서의 말이야. 나는 설명할 수 없는 시적인 말로 ‘지연’이라고 부르고 싶었네. ‘유리 그림’, ‘유리 드로잉’, ‘유리에 그린 것’이란 말을 피하고 싶었어. 그때 ‘지연’이란 말이 발견한 말처럼 마음에 들었지. 정말 시적이었어. 말라르메의 시어 같았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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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제 구성주의


구성주의는 명확하게 규정할 수 없는 용어로 1920년대에 목적과 관념이 서로 상반되는 두 가지 운동이 동시에 구성주의라는 용어를 채택했다. 하나는 소비에트 러시아에 국한되어 일어났고, 다른 하나는 유럽의 여러 국가에서 일어난 것으로 후자를 국제 구성주의International Constructivism 혹은 유럽 구성주의라 명명하여 러시아 구성주의와 구별한다. 

 1920년대 초반 소비에트 러시아의 구성주의는 비공리적인 미술에 대한 배격을 제외하여 유럽 취향에 적당하게 수정된 채 유럽에 전파되었다. 가보와 앙투안 페브스네르 형제는 러시아의 생산주의자들로부터 비난을 받은 자신들의 독자적인 구성주의를 유럽에 전파했다. 가보는 1922년 러시아를 떠나 베를린으로 갔고, 앙투안은 이듬해 파리로 향했다. 러시아에서 가보는 모스크바의 트베르스코이 가에서 첫 번째 야외전시회를 가졌고, 세르푸초프의 라디오 방송국을 설계했으며, 모터로 움직이는 최초의 키네틱 조각을 제작했다. 산업 디자인과 사회적으로 유용한 작품이 장려되면서 공공 정책에서 타틀린 그룹이 선호되고 예술 활동에 대한 통제가 분명해지자 가보는 1922년 러시아를 떠나 베를린으로 가서 이후 10년 동안 체류했다. 1924년에는 파리에서 형 앙투안과 함께 페르시에 화랑에서 전시회를 열었으며, 1926년에는 뉴욕의 리틀 리뷰 화랑에서 반 두스뷔르흐, 앙투안과 함께 처음으로 미국에서 전시회를 열었다. 가보는 1952년에 미국 시민권을 취득했고, 1953~54년 하버드 대학 건축 대학원의 교수를 역임했으며, 1965년에 미국 문예아카데미연구소의 회원으로 선출되었다. 그는 1967년에 런던의 왕립미술대학에서 명예 박사학위를 취득했고, 1971년에는 명예 대영제국 나이트 작위를 받았다. 
 

1919년 가보의 ‘사실주의 선언문’에 서명한 앙투안도 1922년 베를린으로 가서 제1회 러시아 회화전 준비를 도왔고, 그곳에서 유럽을 여행 중이던 마르셀 뒤샹을 만났다. 1923년 파리에 정착했고 1930년에 프랑스 국적을 취득했으며 이듬해에는 추상-창조 그룹에 가입했다. 추상-창조Art non-figuratif(Abstraction-Creation)는 1931년 2월 파리에서 추상 혹은 비대상 미술을 추구하는 화가와 조각가들이 결성한 그룹으로 이들은 1930년 파리에서 제1회 국제추상미술전을 열었고 이듬해에 그룹을 결성했다. 이 그룹은 추상 미술의 추구라는 큰 원칙 하에 외견상 개방되어 있었으므로 가보와 앙투안 형제, 리시츠키의 구성주의와 몬드리안의 신조형주의로부터 마넬리, 글레즈 같은 화가들과 칸딘스키의 표현적 추상까지, 심지어는 아르프의 생물 형태적 추상과 일부 추상적 초현실주의 등 많은 종류의 비구상 미술을 포괄했다. 그러나 구성주의자들과 데 스테일의 지지자들이 강세를 보이면서 점차 표현적 추상이나 서정적 추상보다는 기하적 추상에 역점을 두게 되었다.

1926년 가보, 앙투안과 함께 뉴욕에서 전시회를 연 테오 반 두스뷔르흐(1883~1931)는 네덜란드 화가, 건축가로 데 스테일De Stijil 그룹의 주요 창시자이다. 데 스테일은 미학과 미술 이론을 다룬 네덜란드 잡지로 1917~28년 반 두스뷔르흐가 운영하고 편집했으며 마지막 호는 1932년 반 두스뷔르흐의 미망인에 의해 출간되었다. 데 스테일은 1917년 레이덴에서 반 두스뷔르흐가 결성한 아방가르드 예술가 단체를 의미하기도 한다. 그 외에 창립에 참여한 예술가들 중에 피트 몬드리안(1872~1944)이 있다. 몬드리안이 1911년부터 1914년 사이에 걸쳐 서서히 추상에 도달한 반면 반 두스뷔르흐는 1916~17년에 급속히 추상으로 전환했다. 1917년 이후 그의 작품은 몬드리안의 것과 양식 및 구성에 있어 매우 흡사하여 구별하기 어려울 정도였다. 반 두스뷔르흐의 사상은 바우하우스에서, 특히 산업 디자인 부문의 베르너 그레프(1901~78)에게 영향을 주었다. 1924년경부터 그의 작품은 데 스테일의 엄격한 초기 원칙으로부터 벗어났으며, 수직면과 수평면의 엄격한 제한에서 벗어나 비스듬히 기울어진 면을 사용함으로써 운동감과 역동성을 일부 허용했다. 그는 이런 그림을 ‘역구성’이라고 했다.

1920년대 유럽 구성주의는 전통 미술의 근본적 토대를 무분별하게 공격한 다다, 그리고 무의식적인 창조와 자동주의라는 초현실주의 강령에서 지침을 찾은 충동적이고 직관적인 구성에 대한 반동에서 비롯되었다. 구성주의자들은 다다주의자와 초현실주의자들과는 달리 보편적이며 객관적인 미적 원리와 일치하는 의식적이고 신중한 구성을 지지했다. 이는 반 두스뷔르흐가 1923년 한스 리히터(1888~1976)의 잡지 <게 G> 창간호에 기고한 ‘요소적 형성 Elemental Formation’에서 피력한 요소주의의 핵심 이론이기도 하다. <게>는 리히터가 1923년에 ‘유럽 구성주의자들의 기관지’를 만들려는 의도로 창간한 잡지의 명칭으로 ‘게G’는 ‘형성 Gestaltung’을 의미한다. 창간호에 반 두스뷔르흐의 독창적인 글 ‘요소적 형성’이 실렸다. 반 두스뷔르흐는 표현 방식을 상반되는 두 가지로 구별했다. 그가 ‘장식적’이라고 일컬은 과거의 미술은 개인적인 기호와 직관에 달려 있었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구성주의를 의미한 현재의 미술은 ‘기념비적’ 혹은 ‘구성적’이라고 표현되었다. 그는 구성주의 미술은 더 이상 충동적이거나 직관적이지 않으며 객관적인 미적 원리에 따르는 구성이며, 구성주의자들은 “그들의 기본적인 표현수단을 의식적으로 조정한다”고 주장했다.

반 두스뷔르흐가 ‘요소적 형성’에서 피력한 내용은 요소주의Elementarism의 핵심 이론이기도 하다. 유럽 구성주의의 중심이 된 원칙으로서의 요소주의는 미술에서 구성은 충동적이거나 직감적이어서는 안 되고 의식적이며 의도적이어야 하고 보편적인 미학적 원칙을 바탕으로 해야 한다는 점을 구현한 새로운 미술 개념이었다. 라울 하우스만, 장 아르프, 이반 푸니, 라슬로 모홀리-나기가 서명한 요소주의 선언문은 1922년 <데 스테일> 제4권 10호에 실렸는데, 다음과 같은 내용을 담고 있다.
“우리는 요소주의 미술에 전념할 것을 맹세한다. 이는 철학이 아니라 고유한 요소들로 이루어졌으므로 근본적이다. 예술가는 형태를 이루는 요소들을 좇아야 한다. 예술가만이 미술의 요소들을 발견할 수 있다. 그러나 이런 요소들은 개인의 일시적인 기분에 의해 발견되지는 않는다. 개인은 고립되어 존재하는 것이 아니며, 예술가는 우리 세계의 요소들에 예술적인 형태를 주는 히만을 사용한다.”

반 두스뷔르흐의 요소주의와 퓨리즘Purism 사이에는 유사한 점이 있다. 퓨리즘은 1918년 무렵부터 1925년경까지 파리에서 일어난 미술운동으로 기계 미술이라는 새로운 미학과 관련이 있다. 이 운동을 아메데 오장팡(1886~1966)과 스위스 화가이며 건축가 르 코르뷔지에(1887~1965, 본명은 샤를-에두아르 잔레)가 주도했다. 1917년 오장팡은 입체주의가 방향을 잃고 장식미술로 퇴보하고 있다고 보고 이런 점을 1915~17년 발간된 자신의 평론지 <엘랑 Elan, L'>에 발표했다. 오장팡은 <엘랑>을 통해 입체주의의 장식적 경향에 대해 반대를 표명했으며 뒤에 퓨리즘의 토대를 이루는 개념을 주창했다. 퓨리즘의 개념을 널리 알릴 목적으로 1920~25년 잡지 <에스프리 누보 Esprit nouveau, L'>를 공동으로 제작하고 1924년에는 <현대 회화>를 공저로 출간한 오장팡과 르 코르뷔지에는 자신들의 연합을 “건강한 예술을 재구성하기 위한 운동”으로 간주하고 “예술가와 시대 정신을 접목”시키는 것을 자신들의 목표로 삼았다. 두 사람은 “기계의 정밀함에 내재한 가르침”에서 많은 지식을 축적했고, 형태를 기능에 맞출 것을 주장하는 기능주의를 추구했다. 두 사람은 회화는 일상적인 도구와 기구를 엄격히 추상화하여 기초 형태들을 강조하야만 한다고 주장했다.

반 두스뷔르흐의 요소주의 혹은 구성주의와 퓨리즘 모두 단순성, 명료성, 간결성을 가장 중시하는 새로운 미적 관점을 가졌다. 그러나 구성주의자들은 여기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비재현적, 비표현적, 기하적 그리고 기하와 유사한 요소로 구성된 추상구성을 지지했다.

엘 리시츠키(1890~1941)는 1922년 베를린에서 수정된 소비에트 구성주의를 공표할 목적으로 일랴 에렌부르크 등과 함께 3개 국어로 된 잡지 <베시치/게겐슈탄트/오브제>를 발행했다. 또한 1923년 베를린에서 리히터는 리시츠키와 반 두스뷔르흐의 조언과 도움을 받아 <게>를 창간하면서 이를 유럽 구성주의의 기관지라고 선언했다.

유럽 구성주의 단체의 최초 공식 선언은 1922년 뒤셀도르프에서 개최된 국제진보예술가대회에서 이루어졌다. 이때 반 두스뷔르흐, 리시츠키, 리히터는 국제 구성주의 분파의 이름으로 연합 시위를 벌였다. 1920년대에는 공식적인 조직은 형성되지 않았지만 구성주의 원리를 문학, 건축, 영화에 확산시키려는 시도가 있었다. 상대적으로 프랑스는 구성주의 발전에 기여한 바가 거의 없지만, 1920년대 후반과 1930년대 초반의 파리는 러시아를 떠난 구성주의 예술가들에게 편안한 안식처를 제공했다. 파리에서는 오귀스트 에르뱅(1882~1960)과 벨기에의 조각가, 화가 조르주 반통게를루(1886~1965)가 추상-창조 그룹을 결성했고, 1932~36년 잡지 <추상-창조: 비구상 미술>을 발행했다. 이 그룹은 배타적이거나 독단적이지 않았으므로 이들을 매개로 다양한 양식과 견해를 가진 많은 예술가들이 한자리에 모일 수 있었다. 이 그룹은 사실상 모든 비구상 예술가들에게 문호를 개방했다.

스위스에서는 아르프와 조피 토이버-아르프 부부가 독자적인 구성주의를 발전시켰으며, 스트라스부르에 있는 유명한 식당 카페 로베트의 실내를 디자인했다. 스위스는 국제적 성격으로 인해 구성주의 전시회에 대해 호의적인 분위기가 감돌았으며, 1937년 바젤 뮤지엄에서 개최된 대규모 전시회는 구성주의라는 용어가 얼마나 폭넓게 이해되고 있으며 얼마나 다양한 양식을 포함하고 있는가를 분명하게 보여주었다.

1930년대 후반 많은 구성주의 예술가들이 영국으로 이주하여 런던에 정착했다. 가보와 앙투안 형제, 모홀리-나기, 그로피우스, 몬드리안이 여기에 속한다. 이들은 바버라 헵워스, 벤 니컬슨, 헨리 무어, 평론가 허버트 리드와 교류했지만,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곧 미국으로 이주했으므로 1950년대까지 영국에서는 독자적인 구성주의 운동은 일어나지 않았다. 1937년 가보는 벤 니컬슨 등과 공동으로 ‘구성주의 미술에 대한 국제적인 고찰’이란 부제가 붙은 자료 모음집인 <서클>을 편집했다. 가보는 여기에 ‘미술에 있어서의 구성주의적 개념’이란 제목의 글을 발표했다. 이 글에서 가보는 구성주의적 이념을 확장시켜 이를 과학, 예술 또는 기타 영역에서의 뛰어난 창의력과 구별하지 않았다. 입체주의가 자연주의적 미술을 완전히 파괴했다고 주장한 가보는 입체주의 이후 미술에서의 회생은 매우 힘들었다면서 적었다.
“이런 시점에 구성주의 이념은 미술 회생의 초석이 되었다. 구성주의 이념은 선, 색채, 형태와 같은 시각예술 요소는 외부세계와 무관한 독자적인 표현력을 가지고 있음을 보편적인 법칙으로 한다. 즉 이런 요소들의 생명과 활동은 인간의 본성 속에 내재되어 있으면서 스스로 조절되는 심리적 현상이다. 이는 단어와 숫자처럼 공리적인 이유 때문에 관습적으로 선택되는 것이 아니며, 단순한 추상적 기호가 아니라 인간의 감정과 즉각적이고 유기적으로 얽혀 있다. 이런 근본적인 법칙이 드러나면서 미술의 영역이 광범위하게 확장되어 그동안 간과되었던 인간의 충동과 감정 표현이 가능하게 되었다. 지금까지 이런 요소들은 문학이나 시 등으로도 가능한 이미지의 연상을 위해 잘못 사용되어왔다.”

가보의 주장은 구성주의의 의미를 확대시켜 표현적 추상을 비롯한 모든 비재현적인 추상 미술을 함께 아우르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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