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오-리얼리즘
1960년대 초에 특기할 만한 두 전시회가 있었다. 하나는 1961년 말 모마MoMA에서 개최된 ‘아상블라주전’이고 다른 하나는 이듬해 시드니 재니스 화랑에서 개최된 ‘네오-리얼리즘전’이다. 윌리엄 세이츠가 주최한 아상블라주전에는 입체주의 경향의 종이콜라주와 사진몽타주 외에도 다다와 초현실주의 작품, 정크조각 그리고 전시장 전체를 장식하는 환경예술까지 포함되었다. 1962년 10월에 개최된 네오-리얼리즘전에는 영국과 미국의 잘 알려진 팝아트 예술가들과 프랑스의 네오-리얼리즘 예술가들 그리고 이탈리아와 스웨덴에서 이와 연계된 행위를 하던 예술가들도 참여했는데, 미국에서는 라우센버그와 존스가 참여했다.
네오-리얼리즘Neo-Realism이란 용어는 프랑스어 누보 레알리슴을 영어로 번역한 것이다. 이 용어는 1913년에 열린 그룹전 네오-리얼리스트전에서 이미 사용된 적이 있었다. 이 전시회에 참여한 찰스 기너는 1914년 <새로운 시대>에 기고한 글에서 리얼리즘을 주제보다는 양식으로 규정했다. 리얼리즘은 예술가가 자신이 경험한 자연을 직접 그대로 표현하는 양식, 즉 자연에 대한 독자적인 해석으로 다른 사람들의 경험에서 빌린 2차적 인상과 비교된다는 것이다.
팝아트에 대한 인식이 아직 분명하지는 않았지만 네오-리얼리즘전은 지난 수년 동안 몇몇 예술가들이 행위한 팝아트를 공식화하는 중요한 의미를 남겼다. 이때까지만 해도 유럽의 네오-리얼리즘과 관련이 있는 팝아트에 대해서는 별도의 인식이 없었지만 추상표현주의나 파리에서 성행하던 앵포르멜과는 구별되었다. 유럽 예술가들은 다다와 초현실주의를 유산으로 상속받아 이런 경향의 미학을 추구한 반면 영국과 미국 예술가들은 근래의 대중적인 문화와 상업적이며 재현 가능한 이미지들에 관심을 기울였다. 미국의 팝아트 예술가들 중에서 라우센버그와 존스의 작품에서 다다와 초현실주의의 요소가 두드러져 두 사람은 팝아트보다는 네오-리얼리즘에 더 가깝다.
로버트 라우센버그(1925~)는 택사스 주 포트아서 태생으로 택사스 대학에서 약학을 공부하다 징집되어 제2차 세계대전에 참전했고, 1946~47년 캔사스시티 아트 인스티튜트에서 회화를 공부한 후 1947년 파리로 가서 아카데미 줄리앙에서 수학했으며, 1948~49년에 노스캐롤라이나 주의 블랙 마운틴 대학에서 독일인 화가 요제프 알베르스로부터 수학했다. 그는 1950년대 초 콤바인 회화를 제작하기 전 붉은색 콜라주 구성을 다수 제작했는데, 신문조각, 끈, 사진, 녹슨 못 등을 실제 사물들을 물감과 결합되게 사용했다. 그가 이런 실제 오브제들을 사용한 이유는 “예술과 삶 사이의 간격에서 활동하기” 위해서였으며, 이런 태도는 그를 가르친 작곡가 존 케이지의 영향이었다. 그의 오브제 조각과 콜라주는 피카소의 초기 조각과 다다주의자들, 뒤샹, 쿠르트 슈비터스의 작품에 의해 설정된 방향을 유지했다.
라우센버그는 1955년에 이미 과격한 콜라주 작품을 소개했는데 <인터뷰>(워홀 29)는 커다란 나무상자를 둘로 나눈 후 콜라주하여 색칠한 것으로 그림이라기보다는 벽에 붙인 조각이었다. 그는 구태여 조각과 그림을 구별하려고 하지 않았다. 표현을 위해서라면 장르와 장르의 구별도 무시함으로써 예술가의 자유는 더욱 확장되었는데 뉴욕화단의 젊은 예술가들은 즉흥적인 표현에 충실하면서 형식을 전혀 개의하지 않았다. 그는 그해 <침대>(워홀 30)를 소개했는데 나무판에 베개와 이불을 붙이고 그 위에 추상표현주의의 빠른 붓질을 가한 작품이었다. 사람들은 전시장에서 이 작품을 보고 경악할 수밖에 없었다. 이제 회화의 영역이 어디까지 이를 것인지 짐작조차 할 수 없게 된 사람들은 예술가들이 예술이란 미명 하에 방종하는 것이 아닌지 예술가들의 지성에 의심을 품기도 했다. 라우센버그는 주위에서 쉽게 발견되는 물질들을 조합하여 작품을 제작했는데 낯익은 물질들을 예술에 포함시키는 것은 팝아트의 길을 예비하는 것이었다.
특기할 점은 이 시기에 실크스크린이 매체로 등장한 것이다. 특히 라우센버그의 실크스크린은 유명하다. 1962년 여름 롱아일랜드에서 판화전문상점을 운영하는 타티아나 그로스맨이 라우센버그에게 한정판 석판화를 의뢰했다. 라우센버그는 석판화를 제작하면서 사진의 이미지를 실크스크린하는 방법을 보태 새로운 이미지를 창조했는데 이런 기교에 관해 앤디 워홀로부터 도움을 받기도 했다. 여러 방법으로 실험한 라우센버그는 TV 채널을 바꿀 때마다 나타나는 영상들을 혼용한 작품을 실크스크린으로 제작했다. 이 시기에 그는 TV와 잡지에서 주로 이미지를 구했으며, 이렇게 수집된 이미지들을 배치하여 실크스크린으로 제작한 것이 <항공로>(워홀 45)이다. 그는 케네디 대통령, 우주비행사, 거리에서 쉽게 볼 수 있는 부서진 건물, 토마토 상자, 낙서 등 사람들에게 낯익은 팝이미지들을 회화적인 요소로 구성했다. 그는 말했다.
“내게는 아주 단순한 이미지들이 필요하다. 물이 든 컵이나 종이 벽지를 바른 욕실 ... 그것들로 사회문제들, 세상에서 벌어지는 재난들을 중화시키려고 했다.”
1964년 라우센버그는 제32회 베니스 비엔날레에서 최우수상을 수상했다. 바티칸 신문의 편집자 로세르바토레 로마노는 그의 수상에 발끈하여 “라우센버그가 완전히 그리고 일반적으로 문화를 파괴했다”고 말했다.
한때 라우센버그와 같은 작업장을 사용한 재스퍼 존스(1930~)도 1960년대 초에 뉴욕화단의 떠오르는 별이었다. 그는 조지아 주 오거스타 태생으로 사우스캐롤라이나 대학에서 공부했고, 1949년 잠시 동안 뉴욕의 미술학교에 다니다 징병되어 일본에서 복무했다. 존스가 25살 때 그린 미국 <국기>는 전설의 작품으로 알려졌는데, 1954년 어느 날 국기를 그리는 꿈을 꾸고 난 후 그렸다고 한다. <국기>, <과녁판>, <지도>, <숫자>, <색비교판> 등은 우리가 아무 곳에서나 볼 수 있는 이미지들이지만 존스는 그것들을 새로운 형태들로 창조하면서 그림이 사물의 모방이 아니라 사물 자체라는 미학을 제시했다. 아무 내용도 없는 국기와 과녁판에서 상징적 이미지들은 그의 손에서 사라지고 말았다. 그는 환상과 실제의 구분을 파괴한 후 그것들을 재정립하면서 창조과정 자체를 설명하려고 했으며 관람자가 이런 미학적 경험을 할 수 있도록 자신의 작품세계로 유도했다. 그의 작품은 최면술 같았으며 냉정한 형식으로 나타났다.
평론가 데이비스 실베스터와의 인터뷰에서 왜 국기, 과녁판, 지도, 숫자, 문자 등과 같은 사물들을 이용하는가에 대한 질문에 존스는 응답했다. “그것들은 내게 이미 형성되었고, 관습적이며, 비개성적이고, 실제적인 외적 요소로 보인다. ... 나는 가장 관습적이며 일상적인 사물은 평가되지 않은 채 다뤄질 수 있다고 본다. 다시 말하면 내게 그것은 미학적 등급과는 관련이 없는 명백한 사실로서 존재한다.” 또 다른 인터뷰에서 존스는 말했다. “나는 내가 본 것이 실제이거나 실제적인 것으로 이뤄진 나의 관념이라는 생각이 들 때 유쾌하다. 그리고 나는 내가 환영에 대해 인식할 수 있을 때 일종의 불쾌감을 느낀다고 생각한다. 또한 나의 작업 대부분은 하나의 대상으로서의, 하나의 실제 사물 자체로서의 회화와 관련이 있다.”
존스는 1960년에 음료수 에일 캔을 청동으로 제작한 후 실재와 같이 색을 칠했다. 존스는 두 개의 캔을 그대로 모방하면서 하나는 다 마신 빈 깡통으로 다른 하나는 음료수가 들어있는 깡통으로 제작하여 친구 라우센버그와 자신을 가볍고 무거운 관계로 은유적으로 표현했다.
1960년대 초에 숟가락과 포크가 처음으로 그의 캔버스에 매달렸는데 그것들은 지성과 무관한 팝 물질들이다. 팝이미지는 그가 선호하는 작품의 주요 내용으로 캔버스에 빗자루와 컵이 등장했다. <바보의 집>의 경우 빗자루는 물감을 칠하는 붓의 상징이다. 라우센버그가 팝 물질들을 병렬하면서 즉흥적으로 작품을 제작했듯이 존스도 사변적인 서투른 방법으로 팝 물질들을 즐겨 사용했다.
존스는 우리가 알고 있는 것과 보는 것이 서로 대조되도록 했다. 벨기에의 초현실주의 화가 르네 마그리트가 담배파이프를 그린 후 ‘이것은 파이프가 아니다’라는 문구를 적어넣었듯이 그런 효과를 자신의 작품에 응용했다. 마그리트는 “사물은 사물이 지닌 명칭이나 이미지대로 작용하는 것은 아니다”라고 말한 적이 있고 “그림에서 글자는 이미지와 같은 물질이다”라고 했는데, 존스가 그림에 사용한 글자는 마그리트의 미학과 관련이 있다.
그가 1964년에 제작한 <뭔가에 의해>에는 의자에 앉은 반쪽 하반신 모양의 물질이 캔버스에 거꾸로 부착되었다. 1959년 모마에서 개최된 ‘16명의 미국사람전’의 카탈로그에 존스는 적었다. “자연의 어떤 관점에서도 볼 것은 있다. 내 작품은 시선을 바꿀 수 있는 가능성을 지니고 있다.” 이런 견해는 그가 가장 위대한 예술가라고 생각하는 뒤샹을 상기하게 한다. 또한 존스는 “나는 단순한 개념들에 관한 그림에 반대한다. 내게는 볼 것들이 너무 많다”고 적었는데, 그는 우리가 늘 세상의 일부분만 보고 있음을 지적하면서 우리가 어떻게 보느냐에 따라서 사물에 대한 이해도 달라진다는 사실을 알리려고 했다.
1964년 라우센버그와 존스의 전시회가 런던의 화이트 채플 화랑에서 각각 열렸을 때 평론가 앨런 솔로몬은 다음과 같이 적었다.
“다다에 의해 제기된 감각은 여전히 남아 있다. 미국의 신세대 예술가들은 이런 감각을 환기시키면서 객관적인 실재의 의미를 재실험하고 우리의 기본적인 미학적 경험에 도전하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