클로드 모네, 화가로 첫 발을 내딛다

 

(작품은 Daum의 '광우의 문화읽기'에서 감상할 수 있습니다.)


마네보다 여덟 살 어린 클로드 모네Claude Monet(1840-1926)는 1840년 11월 14일 파리에서 조그만 사업을 하던 아버지 아돌프와 어머니 루이스 쥐스틴 사이에 둘째 아들로 태어났습니다. 그가 태어난 곳은 파리 9번구 라피트 가 45번지였습니다. 부모 모두 파리에 정착한 2세대 파리인이었습니다. 아돌프는 모네가 다섯 살 때 서북 해안 노르망디의 르아브르로 이주했습니다. 그곳에 살고 있던 누이 마리 잔 르카드르의 남편이 아돌프를 야채도매업에 끌어들였기 때문입니다. 르카드르는 선구업에도 관여하고 있었으며 르아브르에 큰 저택을 갖고 있는 부자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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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네의 <교사 오샤르의 캬리커처 Caricature of His Teacher, Ochard>, 1856-58, 드로잉, 32-24.8c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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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물 캐리커처가 처음 출현한 건 16세기 말이나 17세기 초 이탈리아에서였습니다. 이탈리아어 caricatura는 '부담지우다'라는 뜻의 'caricare'에서 유래했습니다. 이 용어를 카라바조와 더불어 초기 바로크의 거장으로 인정받은 안니발레 카라치Annibale Carracci(1560-1609)가 붙인 용어로 알려졌습니다. 카라치는 사실적 외양을 유지한 채 얼굴을 동물이나 채소 또는 완전히 다른 모습으로 변형시켰으며, 나중에는 정치적 캐리커처 화가들이 주로 사용한 방법을 창안했습니다.



모네는 1851년 4월 1일 르아브르 중학교에 입학했는데 훗날 다음과 같이 회상했습니다.


천성적으로 규율이 내 몸에 맞지 않았다. 어렸지만 나는 어떤 규율에도 굽히지 않았다. … 학교는 감옥과도 같았으며 하루 네 시간 수업이었지만 내게는 대단히 지루한 시간이었다.


그러나 학적부에는 “심성이 매우 착하고 친구들과 잘 어울림”이라고 적혀 있습니다. 모네는 일찍부터 캐리커처를 그렸고 나폴레옹 시절 궁정화가로 활약한 위대한 자크 루이 다비드의 문하생이었던 장 프랑수아 샤를 오샤르로부터 드로잉을 배웠습니다. 오샤르는 살롱에 초상화와 풍경화를 선보인 적이 있으며 드로잉의 대가로 알려졌습니다. 오샤르로부터 수학한 화가들 가운데 샤를 륄리에는 르아브르 미술학교 책임자가 되었으며 오통 프리에츠와 라울 뒤피가 이 학교 출신입니다.


열여섯 살 때 모네가 주로 그린 것이 인물풍자화와 배 그리고 풍경화였던 것으로 보아 그가 일찍부터 야외에 나가 그리기를 좋아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모네가 1900년 프랑수아 티에볼 시송에게 보낸 편지에는 다음과 같이 적혀 있습니다.


교과서의 여백에 꽃무늬를 두르고 파란 연습장을 환상적인 장식으로 채웠지. 그리고 선생님들의 얼굴이나 옆모습을 최대한으로 변형해서 그리곤 했네.


아름다운 목소리로 노래 부르기를 즐겼던 어머니는 모네가 열여섯 살 되던 1857년 1월 28일에 타계했습니다. 회화에 관심이 없는 아버지는 아들의 회화에 대한 집념을 우려했습니다. 따라서 모네는 아버지와 불화했으며 어머니가 타계한 후에는 더욱 그러했습니다. 모네는 학교를 자퇴했습니다.


1858년 자식도 없이 과부가 된 마리 잔 고모는 조카 모네를 자기 집으로 데리고 갔습니다. 마리 잔은 아마추어 화가로 쿠르베의 친구 화가 아르망 고티에의 친구였습니다. 조카가 회화에 재능이 있음을 안 고모는 지붕 밑 다락방을 작업실로 내주고 계속해서 드로잉을 배울 수 있도록 배려하며 그림재료를 사주었습니다. 그녀가 아마 모네에게 화가로서의 재능이 있다고 아돌프를 설득한 것 같습니다. 아돌프는 모네에게 하고 싶은 대로 하되 경제적인 뒷받침은 해주지 않겠다고 했습니다.


드로잉 솜씨가 훌륭했던 모네는 ‘O. 모네’라고 서명한 풍자화를 문방구, 액자, 철물 등을 파는 상점에 내다 팔기 시작했으며, 친지와 동네의 유지들이 그의 드로잉을 구입했습니다. 그는 20프랑을 받고 초상화를 그려주었는데 훗날 과장해서 말했습니다. “내가 계속해서 초상화를 그렸다면 지금쯤은 백만장자가 되었을 것이다!” 드로잉은 표구상 그라비에의 상점 진열장에 전시되었는데, 상점 주인의 옛 동업자 외젠 부댕Eugéne Lpuis Boudin(1824-98)의 그림과 나란히 전시된 적도 있었습니다. 고향 옹프륄의 풍경에 정이 들어 해변의 풍경화만을 그린 부댕은 주로 북 프랑스의 노르망디나 브르타뉴지방, 네덜란드의 해변을 테마로 삼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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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젠 부댕의 <트루빌의 바닷가 La Plage de Trouville>, 1865, 유화, 67.3-104.1cm.

부댕은 자연과 대상을 직접 바라보고 그림을 그렸으므로 자연의 일시적인 현상이 그의 그림에 반영되었으며, 모네는 이러한 점에 영향을 받았습니다.


부댕이 르아브르에서 작업하는 일이 잦았으므로 모네는 그를 따라 바다와 들로 가서 그의 작업을 처음부터 완성될 때까지 볼 수 있었습니다. 자연을 바라보면서 활력과 신선함을 직접 캔버스에 담아야 한다고 한 부댕은 모네에게 “넌 계속 공부를 해야 한다. 넌 풍경화를 어떻게 드로잉하고 어떻게 색을 칠하는지 반드시 배워야 한다”고 조언해주었습니다.


야외에서 이젤을 세우고 자연의 모습을 직접 그리는 건 그 무렵에 막 시작된 일이었습니다. 1840년대부터 물감을 튜브에 넣을 수 있게 되어 물감 운반이 쉬워졌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야외에서 그림을 그리는 것이 신사답지 못한 행동이라고 생각한 고루한 화가들은 야외에서 직접 그리기를 꺼려했습니다. 화실에서 그린 그림과 자연에서 직접 그린 그림은 당연히 비교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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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네의 <루엘 풍경 Landscape at Rouelles>, 1858, 유화.

15세기 이전까지만 해도 풍경화는 독립적인 회화 장르가 아니었습니다. 풍경은 인물화의 배경이었습니다. 17세기에 들어서 네덜란드에서 많은 화가들이 자연의 빛과 대기의 작용에 흥미를 가지고 풍경을 모티프로 그렸습니다. 프랑스에서는 니콜라 푸생Nicolas Poussin(1594-1665)과 클로드 로랭Claude Lorrain(1600-82)이 풍경화를 그렸으며, 로랭은 아침과 해질녘의 풍경을 역광으로 포착했습니다. 17세기 프랑스를 대표하며 프랑스 근대회화의 시조로 추앙받는 푸생은 로마에서 활약하면서 상상의 고대 풍경 속에 균형과 비례가 정확한 고전적 인물을 등장시킨 독창적인 작품을 그린 것으로 유명합니다. 앞서 언급한 대로 영국의 컨스터블이 네덜란드 화파의 풍경화를 그리면서 야외에 나가 자연을 직접 묘사한 사생(寫生)의 태도는 프랑스 화가들에게 많은 영향을 주었습니다. 마찬가지로 터너도 네덜란드 화파의 영향과 더불어서 클로드 로랭의 화풍에 영향을 받아 대상을 명암으로 보는 관념에서 벗어나 대기(大氣)를 그리는 풍경화를 확립했습니다. 앞서 소개한 밀레와 바르비종파(派)가 자연주의를 주창했으며, 당시 젊은 화가들에게 영향을 주어 풍경화는 회화의 중요한 장르가 되었습니다.


몇 달 동안 부댕을 따라다니던 모네는 부댕의 작업에 호기심을 갖고 그의 화실에 입학했습니다. 그리고 그를 따라 멀리까지 가서 함께 자연경관을 그리기 시작했습니다. 모네는 자연히 스승의 화풍을 익히게 되었습니다. 따라서 모네의 초기 그림에서 부댕의 영향을 발견하기란 쉽습니다.


모네는 여든두 살 때인 1922년에 회상했습니다.


그 상점에 풍자화를 전시하곤 했는데, 그 덕택으로 르아브르에서 다소나마 유명해졌으며 변변치는 못하더라도 수입이 생겼다. 게다가 외젠 부댕을 만나는 계기가 되었는데, 그때 서른 살 안팎이던 그는 막 화가로서 유명해지기 시작했다. … 부댕의 제의를 받아 나는 그와 함께 야외로 가서 작업했다. 물감 한 통을 사들고 둘이서 루엘(르아브르 동북쪽)까지 갔다. … 그는 이젤을 세운 후 작업에 몰두했다. … 그제서야 베일이 걷히듯 그림을 그린다는 것이 어떤 것인지를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 화가로서의 나의 운명이 눈앞에 전개되었다. 이제 내가 한 사람의 화가가 되었다고 진정으로 말할 수 있다면 이는 부댕의 덕분일 것이다. … 그는 너무도 자상하게 내게 가르쳐 주었다. 나는 서서히 눈을 뜨게 되었으며 자연을 이해하는 것과 동시에 자연을 사랑하는 방법을 깨달았다.


그의 회상대로 모네는 부댕의 가르침을 받아들였으며 1858년에 그린 <루엘 풍경>에 잘 나타나 있습니다. 야외에서 그린 첫 풍경화였던 이 그림을 그해 8월과 9월 르아브르 전시회에서 소개했습니다. 모네를 가리켜서 “하늘 묘사의 왕”이라고 극찬한 부댕은 모네에게 자연을 탐구할 것을 누누이 가르쳤습니다. 모네는 부댕을 통해서 눈이 점차 열리며 자연을 이해하게 되었다고 했습니다.


그가 얼마나 부댕의 화법을 답습했는지는 평론가 귀스타브 제프루아Gustav Geffroy에게 보낸 편지에서 알 수 있습니다.


전 회화에 접근하는 부댕의 진실한 방법에 흥미를 느꼈습니다. 가히 순간적이라고 말할 만한 날쌘 스케치 솜씨에 매료되었습니다.”(1920. 5. 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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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명이 바로 바다에서 왔다는 사실을 우리는 안다


(생명의 기원 그리고 우주의 기원에 관해 몇 꼭지의 글을 올렸습니다. 이야기를 더욱 입체적으로 그리고 광범위하게 논의하기 위해 오늘은 『코스모스 Cosmos』(1980)의 저자 칼 세이건Carl Edward Sagan의 의견을 청취하도록 하겠습니다. 보통 사람들은 자신이 읽은 한 권의 책 혹은 두 권의 책에 매료되어 쉽사리 저자의 의견을 그대로 따르는 경향이 있습니다. 이는 위험한 일이기도 합니다. 세상에는 다양한 의견이 있습니다. 그것들을 청취한 뒤 스스로 자신의 생각을 정리하는 것이 바람직합니다. 세이건 외에도 몇몇 과학자들의 글을 올리려고 합니다. 따라서 한 꼭지의 글에 너무 집착하지 마시고 꼭지마다 하나의 의견으로 받아들이시기 바랍니다. 여러 꼭지의 글을 읽고 스스로 생각을 정리하여 자신의 생명의 기원 그리고 우주의 기원에 관한 입장을 정하시면 됩니다.


과학자들 중에는 세이건이나 호킹처럼 신의 존재를 부정하는 분도 있지만, 신의 존재를 인정하는 분들도 있습니다. 아직까지는 신에 대한 입장을 하나로 통일할 수 없는 형편입니다. 그만큼 밝히지 못한 부분들이 남아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과학에 관한 글을 읽고 성급하게 유신론이니 무신론이니 왈가왈부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그보다는 열린 마음으로 다양한 의견을 청취하려는 태도를 가지는 것이 중요합니다. 생각의 차이는 매우 크기도 하지만, 보기에 따라서는 차이가 없습니다. 저의 생각을 말하면, 유신론이니 무신론이니 하고 다투는 사람들은 똑같이 수준이 낮은 사람들입니다. 다툼 이전에 신에 대한 개념을 먼저 정립해야 합니다. 그리고 다툰다고 있던 신이 사라지는 것도 아니고 없던 신이 생겨나는 것도 아닙니다. 어떤 신을 머릿속에 두고 말하는 것인지 그것부터 분명하게 해야 합니다.


내일 해가 떠오르지 말게 해달라고 기도하면 들어주는 신이 계시다고 믿는 사람은 과학적 입장에서 말하면 정신이 한참 나간 사람입니다. 과학에 관해 이야기하는데 경전의 구절을 끄집어내어 들이대는 사람도 마찬가지로 제정신이 아닙니다. 우리는 오로지 논리적으로 말하고 논리적으로 이치의 당위성을 따져야 합니다. 이런 태도로 다음의 이야기를 시작합니다.)




인류는 영원 무한의 시공간에 파묻힌 하나의 점, 지구를 보금자리 삼아 살아가고 있습니다. 이런 주제에 코스모스의 크기와 나이를 헤아리고자 한다는 건 인류의 이해 수준을 훌쩍 뛰어넘는 무모한 도전일지도 모릅니다. 모든 인간사는, 우주의 입장과 관점에서 볼 때 중요하기는커녕 지극히 하찮고 자질구레하기까지 합니다. 그러나 인류는 아직 젊고 주체할 수 없는 호기심으로 충만하며 용기 또한 대단한 특별한 생물의 종입니다. 우주 탐험, 그것을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우리의 가슴은 설렙니다. 『코스모스 Cosmos』(1980)의 저자 칼 세이건Carl Edward Sagan은 진화는 인류로 하여금 삼라만상에 대해 의문을 품도록 유전자 속에 프로그램을 잘 짜놓았다고 말합니다. 그러므로 안다는 건 사람에게 기쁨이자 생존의 도구라고 말합니다. 인류의 존재는 코스모스라는 찬란한 아침 하늘에 떠다니는 한 점 티끌에 불과하지만, 인류의 미래는 우리가 코스모스를 얼마나 잘 이해하는가에 크게 좌우될 것이라고 말합니다.


『코스모스 Cosmos』의 저자 칼 세이건은 코스모스를 거대한 바다로 지구의 표면을 바닷가에 비유합니다. 그는 우주라는 바다에 대해 우리가 알고 있는 건 거의 대부분 우리가 이 바닷가에 서서 스스로 보고 배워서 알아낸 것이라고 말합니다. 직접 바닷물 속으로 들어간 건 극히 최근의 일입니다. 그건 겨우 발가락을 적시는 수준입니다. 바다는 우리에게 들어오라고 손짓합니다. 생명이 바로 이 바다에서 나왔다는 사실을 우리는 가슴 저 깊숙한 곳으로부터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인간은 근원으로 되돌아가고 싶다는 소망을 간절하게 품는 것입니다.


빛은 1초에 약 30만 km, 즉 지구 7바퀴를 돕니다. 빛은 태양에서 지구까지 8분이면 옵니다. 빛은 1년에 10조km, 약 6조 마일을 갑니다. 천문학자들은 빛이 1년 동안 지나간 거리를 하나의 단위로 삼아 1광년이라고 부릅니다. 광년은 시간을 재는 단위가 아니라 거리를 재는 단위라는 것을 이해하는 것이 과학을 이해하는 데 중요합니다.


지구는 우주에서 결코 유일무이한 장소가 아닙니다. 그렇다고 해서 우주 어디에서나 볼 수 있는 전형적인 곳은 더더욱 아닙니다. 행성, 별, 은하를 전형적인 곳이라 할 수 없는 까닭은 코스모스의 대부분이 저 광대하고 냉랭하며 끝없는 밤으로 채워진 텅 빈 공간이기 때문입니다. 코스모스의 어느 한구석을 무작위로 찍는다고 했을 때 그곳이 운 좋게 행성 바로 위나 근처일 확률은 10-33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사람이 살고 있는 이 세상은 참으로 고귀한 것입니다.


세이건은 은하와 은하 사이의 공간에서 본다면 바다 물결 위의 흰 거품처럼 헤아릴 수도 없이 많은 희미하고 가냘픈 덩굴손 모양의 빛줄기가 암흑을 배경으로 떠있는 것이 보일 것이라고 말합니다. 이것들이 은하입니다. 이들 중에는 홀로 떠다니는 고독한 녀석도 있지만, 대부분은 은하단이라는 집단을 이루며 한데 어우러져 거대한 코스모스의 암흑 속을 끝없이 떠다닙니다. 이것이 우리가 아는 코스모스의 가장 거시적인 모습이며, 여기가 바로 성운들의 세계입니다. 지구에서 80억 광년 떨어진 곳, 우리가 우주의 중간쯤으로 알고 있는 머나먼 저곳이 성운들의 세상입니다.


은하는 기체와 티끌과 별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수십억 개에 이르는 별들이 무더기로 모여 은하를 이룹니다. 별 하나하나가 누군가에게는 태양일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은하 안에는 별들이 있고, 세계가 있으며, 각종 생명이 번성한 자연계가 있고, 지능을 소유한 고등 생물의 집단이 있으며, 우주여행을 자유자재로 할 수 있는 고도의 문명사회들도 있을 것입니다.


세이건은 우주에 은하가 대략 1천억 개 있고, 각각의 은하에는 저마다 평균 1천억 개의 별이 있고 말합니다. 호킹은 은하의 수를 수천 억 개, 각 은하에 수천 억 개의 별이 있다고 말합니다. 여기서 1천억 개가 맞느냐 수천 억 개가 맞느냐 하고 의문을 제기할 필요는 없습니다. 다만 ‘아주 아주 많이 있다’고 생각하면 됩니다.



각 은하에는 적어도 별의 수만큼의 행성들이 있습니다. 이토록 어마어마한 별들 중에서 생명이 사는 행성을 아주 평범한 별인 우리의 태양만이 거느릴 가능성은 얼마나 될까? 현재까지 우리가 생명이 서식한다고 알고 있는 행성은 지구밖에 없습니다. 지구는 암석과 금속으로 이루어진 조그만 바위덩어리에 불과합니다. 간신히 태양 빛을 반사하고 있기에 조금만 멀리 떨어져도 그 존재를 알아볼 수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코스모스 항해는 지구의 천문학자들이 국부 은하군Local Group galaxies이라고 부르는 곳에 곧 다다릅니다. 국부 은하군은 지름이 몇 백만 광년 정도 되고 10-20개의 은하들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그중에 유별나지 않은 아주 소박한 은하단이 하나 있습니다. 그리고 그 안에 M31이라는 은하가 있는데, 지구에서는 가을의 초저녁 동쪽 하늘에 보이는 별자리인 안드로메다자리Andromeda에서 관측됩니다. 우리나라에서도 관측이 되는 이 명칭은 그리스 신화에 등장하는 케페우스 왕의 딸 안드로메다 공주에서 유래합니다.


M31은 별과 티끌과 기체가 모여서 거대한 바람개비 모양을 하고 있는 나선 은하로서 작은 위성 은하를 둘 거느리고 있습니다. 이 두 개의 왜소한 타원 은하를 붙들고 있는 힘이 중력입니다. 우리가 우주 밖으로 날아가지 못하도록 우리를 붙들어주는 힘도 중력입니다. 우주 어디에서나 똑같은 자연법칙이 성립한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M31 너머로 그와 비슷한 모양의 나선 은하가 하나 더 있습니다. 그것은 나선 팔을 천천히, 2억5천 만 년마다 한 번씩 돌리는 바로 우리 은하수 은하입니다. 나선 팔과 나선 팔 사이에는 스스로 빛을 내는 별들의 집단이 있습니다. 세이건은 그 집단들 중에는 태양 1만 개 또는 지구 1조 개가 들어갈 수 있을 만큼 큰 것들도 있다고 말합니다. 천체들 중에는 크기는 작은 마을만 하지만 그 밀도는 납의 100조 배나 되는 것도 있다고 합니다.


태양처럼 홀몸인 별도 있지만 동방성과 함께하는 별이 더 많습니다. 별들은 주로 두 별이 서로 상대방 주위를 도는 하나의 쌍성계binary system를 이룹니다. 그리고 겨우 별 셋으로 이루어진 항성계에서 시작해, 여남은 별들이 엉성하게 모여 있는 성단, 수백만 개의 구성원을 뽐내는 거대한 구상 성단까지 천차만별의 항성계들이 은하에 있습니다. 쌍성계들 중에는 두 구성 별이 맞닿을 정도로 가까워, 상대방 ‘별의 물질’을 서로 주고받는 근접 쌍성계들도 있습니다. 대부분의 쌍성계에서는 두 별이 태양과 목성 정도의 거리를 두고 서로 멀리 떨어져 있습니다.


초신성supernova같이 홀로 내는 빛이 은하 전체가 내는 빛과 맞먹을 만큼 밝은 천체가 있는가 하면 블랙홀과 같이 겨우 몇 km만 떨어져도 보이지 않는 어두운 별이 있습니다. 초신성이란 항성진화의 마지막 단계에 이르는 별이 폭발하면서 생기는 엄청난 에너지를 순간적으로 방출하여 그 밝기가 평소의 수억 배에 이르렀다가 서서히 낮아지는 현상을 말합니다. 별의 갑작스러운 죽음을 말합니다.


별들은 다양한데 밝기만 보더라도 일정한 빛을 내는 별이 있는가 하면 불규칙하게 가물거리는 별이 있고 틀림없는 주기로 깜빡이는 별도 있습니다. 우아하고 장중하게 자전하는 별이 있는 반면, 팽이같이 지나치게 빨리 돌다가 제 형체마저 찌부러뜨린 별도 있습니다. 대개의 별들은 가시광선과 적외선을 내지만, 어떤 별은 하도 뜨거워서 엑스선이나 전파를 내기도 합니다. 푸른색의 별은 뜨거운 젊은 별이고, 노란색의 별은 평범한 중년기의 별입니다. 붉은 별은 나이가 들어 죽어가는 별이며 작고 하얀 별이나 검음 별은 아예 죽음의 문턱에 이른 별입니다. 세이건은 이렇게 다양한 성격의 별들이 우리 은하 안에 4천억 개 정도 있다고 말합니다. 이 별들이 복잡하면서도 질서정연하고 우아한 법칙에 따라 움직입니다. 이 많은 별들 중에서 지구인들이 가까이 알고 지내는 별은 적어도 아직까지는 태양 하나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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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드가 드가와 마네의 우정과 갈등

 

 (작품을 Daum의 '광우의 문화읽기'에서 감상할 수 있습니다.)



마네와 에드가 드가가 처음 만난 건 1863년이었습니다. 드가는 루브르 뮤지엄에서 벨라스케스의 <마르그리트 공주>를 직접 구리판에 에칭으로 새기고 있었습니다. 마네는 자기보다 두 살 어린 그의 대담함에 적이 놀랐습니다. 드가가 처음 구상한 대로 모사가 잘 되지 않는 것이 분명하자 마네가 용기를 내어 조언했다고 하는데 사실인지는 알 수 없지만 두 사람이 그 무렵에 만난 건 사실인 것 같습니다. 두 사람은 서로 존경하면서도 경쟁심을 갖고 있었고 드가 쪽에서 마네에 대한 신랄한 비평이 쏟아져 나왔습니다. 드가는 마네의 부르주아적 경향, 출세제일주의, 낙선전 덕분에 누리게 된 명성 등을 두고 독설을 퍼부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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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드가 드가가 마네 부부의 한가로운 모습을 유화로 그린 것입니다. 마네는 이 그림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며 오른쪽 부분을 잘라버렸습니다. 드가는 그 부분에 캔버스 천을 부착하고 다시 그리려고 했지만 그리지 않았습니다. 잘려나간 부분이 피아노를 연주하는 수잔의 옆모습이라서 마네가 아내에 대한 묘사가 마음에 들지 않아 잘라버린 것으로 추측됩니다.


두 사람의 갈등이 비롯된 유명한 에피소드가 있습니다. 1868-69년에 드가가 마네와 수잔의 초상화를 그려서 선물했습니다. 수잔은 거실에서 피아노를 연주하고 마네는 소파에 몸을 길게 누이고 아내의 연주를 듣는 장면이었습니다. 드가의 선물에 대한 답례로 마네는 <자두 La Prune>를 선사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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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네의 <자두 La Prune>, 1877, 유화, 74-49cm.

1870년대 마네는 주로 초상화를 그렸고, 1877년부터 다시금 파리의 시민생활에서 모티프를 구했습니다. 이 작품은 자연주의naturalism 주제의 작품입니다. 사실주의에서 진전된 자연주의의 창시자는 소설가 에밀 졸라였습니다. 자연주의의 기본 정신은 인간의 생태를 자연현상으로 보는 사고방식입니다. 문인과 화가는 과학자처럼 인간의 생태를 면밀히 관찰했습니다. 자연현상으로 보는 인간은 당연히 본능이나 생리의 필연성에 강력하게 지배되는 것으로 모사됩니다. 자연주의는 주관주의subjectivism나 상상적 초월을 특징으로 하는 낭만주의에 반하는 것이 특징입니다. 사실주의와 자연주의 모두 대상을 보다 정확하고 완전하며 진지한 묘사를 그 기본 의의로 한다는 점에서는 일치합니다. 회화에서 자연주의는 쿠르베로 대표되는 사실주의에 상응하는 말로 마네의 작품을 사실주의로 규정할 수 없어 자연주의로 분류되었습니다. 드가가 술집에 앉아 있는 매춘부를 <압생트>란 제목으로 그린 그림에서 마네가 영향을 받아 이 그림을 그리게 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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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드가 드가의 <압생트 Absinthe> 부분, 1876, 유화, 93.35-67.95cm.



<자두>의 배경은 카페처럼 보이지만 마네의 화실로서 그가 연출한 것입니다. 모델은 엘렌 앙드레로 2년 전 드가의 <압생트>에서 선보인 적이 있습니다. 금발의 여배우 앙드레는 화가 친구들을 위해 기꺼이 모델이 되어주었습니다. 마네는 그녀에게 카페에서 누군가를 기다리는 약간 술기가 오른 여인의 역할을 부탁했습니다. 이 작품의 제목이 <자두>인 이유는 작품의 구성상 자두술이 놓여 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모델은 전혀 술꾼처럼 보이지 않으며 마네가 강조한 부분은 오히려 모델의 장밋빛 피부와 드레스였습니다.


마네가 드가로부터 받은 초상화를 훼손했을 때 화상 볼라르가 놀라서 드가에게 물었습니다.


누가 이 그림을 망쳐놓았습니까?


거짓말처럼 들리겠지만 마네가 그랬습니다! 자기 마누라 그림이 실물만 못하다고 느낀 모양입니다. 마네의 화실에서 저 그림꼴을 보고 얼마나 충격을 받았던지 … 당장 그것을 집어 들고 가겠다는 말도 하지 못하고 그냥 나와 버렸습니다. 집에 와서 마네가 준 그림을 당장 벽에서 내려 꼬리표를 달아 돌려보냈습니다. ‘선생, 당신이 그린 <자두>는 돌려주겠소.’


그 후 마네와 화해하셨지요? 그렇지 않습니까?


마네와 불편한 관계로 지낼 수 있는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헌데 <자두>는 이미 다른 데다 팔았더군요.


내성적이며 지적이고 고고한 데가 있는 드가에 비하면 마네는 평론가의 칭찬에 민감하고 성공을 위해서라면 저돌적인 사람이었습니다. 재능과 명성에 자부심이 대단한 마네를 비꼰 드가의 말처럼 마네는 이미 파리에 널리 알려진 화가였습니다. 여류화가 베르테 모리소Berthe Morisot(1841-95)에 의하면 두 사람은 갈라놓을 수 없는 한 쌍이었습니다. 드가는 마네에게 직접 대놓고 말한 적은 없지만 마네의 재능을 높이 평가하고 있었습니다. 마네가 사망한 후 드가가 그의 작품을 많이 사들인 데서 이런 점을 알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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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에두아르 마네

당시 유명했던 사진작가 나다르Nadar(1820-1910)가 찍은 것입니다. 나다르는 보들레르, 바그너 등 유명인사들의 초상사진을 찍은 것으로 유명합니다. 그는 1858년에 ‘재앙’으로 명명된 열기구를 타고 세계 최초의 공중촬영을 한 사람이기도 하며, 1860년에 휴대용 발광장치로 사진 촬영에 전기 조명을 최초로 사용한 사람이기도 합니다. 파리에서 태어난 그의 본명은 가스파르 펠렉스 투르나숑Gaspard Félix Tournachon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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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드가 드가의 <마네의 초상 Portrait of Manet>, 1867, 종이에 드로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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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드가 드가의 <에두아르 마네의 초상을 위한 습작 Study for a Portrait of Edouard Manet>, 1865-70, 드로잉, 연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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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네, 바티뇰 그룹의 새 리더가 되다



(작품을 Daum의 '광우의 문화읽기'에서 감상할 수 있습니다.)

앙리 팡탱-라투르의 <들라크루아에 바침 Hommage a Delacroix>, 1864, 유화, 160-250cm.

젊은 예술가들에게 우상과도 같았던 외젠 들라크루아가 1863년 8월 타계하자 팡탱-라투르가 이 그림을 그렸습니다. 젊은 예술가들에게는 새로운 리더가 필요했고, 마네가 들라크루아를 대신해서 리더로 부상했음을 이 그림에서 볼 수 있습니다. 들라크루아의 초상화를 중심으로 왼쪽에 서 있는 사람이 미국 화가 휘슬러이고, 오른쪽이 마네입니다. 흰 셔츠를 입은 사람이 팡탱-라투르이고, 마네 오른편으로 화가 발레로아와 판화가 브라크몽, 그리고 시인 보들레르의 모습이 보입니다.

그르노블 태생으로 마네보다 네 살 어린 팡탱-라투르는 1851년에 파리로 상경하여 미술학교를 다닌 뒤 1861년에 살롱에 입선했습니다. 루브르 뮤지엄에서 티치아노와 베로네세 등 대가들의 작품을 모사하면서 회화를 익혔고, 마네와 쿠르베와 교류했습니다.



마네가 1864년에 그린 그림이 1872년 살롱에서 받아들여졌다는 사실은 그 동안 그의 작품에 대한 여론이 별로 좋지 않았음을 말해줍니다. 하지만 젊은 진보주의 예술가들은 마네를 자신들의 지도자로 여겼습니다. 앙리 팡탱-라투르Henri Fantin-Latour(1836-1904)는 <들라크루아에 바침 Hommage a Delacroix>에서 마네를 중앙에 아방가르드 예술가들의 대들보와도 같은 모습으로 묘사했습니다.



프레데리크 바지유Frederic Bazille(1841-70), 앙리 팡탱-라투르, 폴 세잔Paul Cexxane(1839-1906), 클로드 모네Claude Monet(1840-1926), 오귀스트 르누아르Pierre-Auguste Renoir(1841-1919) 등 젊은 화가들은 마네의 화실과 그들이 자주 모이던 카페 게르부아, 누벨아텐, 드 바드가가 있는 동네 이름을 따 ‘바티뇰 그룹’ 혹은 ‘마네파’로 불렸습니다. 마네가 1864년 새로 이사한 아파트는 카페 게르부아에서 아주 가까운 곳으로 바티뇰 불바드 34번지였습니다. 클리쉬 애비뉴 19번지로 엔느퀭의 미술품 재료상 맞은편에 있던 카페 게르부아는 바티뇰 그룹의 본부와도 같았습니다. 이들은 1863년부터 1875년까지 주로 이곳에서 만났습니다. 금요일이면 카페 주인은 문 입구 왼쪽의 두 테이블을 그들을 위해 비워두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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앙리 팡탱-라투르의 <바티뇰의 화살 Un Atelier aux Batignolles>, 1870, 유화, 204-273.5cm.


팡탱-라투르가 1870년 국전에서 소개한 <바티뇰의 화실 Un Atelier aux Batignolles>에 나타난 것처럼 중앙에 앉아 그림을 그리는 모습의 마네는 이 그룹의 공식 리더였습니다. 동일한 인물들을 모델로 바지유가 자신의 화실 장면을 그릴 때도 마네는 여전히 이젤 앞 가운데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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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레데리크 바지유의 <콩다미느 가의 화실 L'Atelier de la rue La Condamine>, 1869-79, 유화, 98-128.5cm.

중앙에 서서 자신의 작품을 설명하고 있는 사람이 바지유인데, 키가 무척 텄음을 알 수 있습니다. 창문 밖으로 시가지가 내려다보이고 오른편에 피아노가 있어 화실이 놃고 전망이 좋은 곳에 위치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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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네의 <페레 라툴르에서 At PereLathuile's>, 1879, 유화, 93-112cm.

카페 게르부아 바로 옆에 있는 레스토랑 정원에서 햇볕을 받고 앉은 레스토랑 주인의 아들가 여인의 다정한 모습을 그린 것입니다. 오른편 뒤에 주전자를 들고 서 있는 웨이터의 모습이 마치 스냅사진처럼 한 순간을 묘사한 것처럼 보이게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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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네가 1860년대와 1870년대 파리 카페의 분위기를 묘사한 것으로 그는 매일 오후 늦게 들리곤 하던 바티뇰의 카페들 중 하나인데 카페 게르부아로 짐작됩니다. 이런 것이 카페문화입니다.





인상주의를 연구한 미술사학자 존 르왈드는 “소심한 예술가들이 카미유 코로의 영향을 받은 반면 대담한 예술가들은 쿠르베와 마네로부터 영향을 받았다”고 했습니다. 마네는 바티뇰 그룹의 리더였지만, 그들과 더불어 유파를 결성하지는 않았습니다. 젊은 예술가들이 그를 중심으로 모였지만 마네가 “한 유파의 우두머리라는 뜻은 아니었다. 마네에게는 보스 기질이 없었으며 잘난 척도 하지 않았다. 그래서 우리는 그로부터 많은 것을 배울 수 있었다”고 아르망 셀베스트르가 훗날 회상했습니다.


클로드 모네도 이때 카페 게르부아에서 마네와 자주 어울린 예술가 중의 한 사람입니다. 모네가 마네를 처음 만난 것도 카페 게르부아에서였던 것 같습니다. 그곳에 자주 간 예술가들로는 1863년에 마네의 초상을 그린 르그로, 팡탱-라투르, 르누아르, 드가, 나중에 레그로와 함께 런던에 안주한 휘슬러, 바지유, 그리고 세잔이 있습니다. 이들의 모임에는 작가이자 평론가인 이들도 있었는데, 이폴리트 바부, 세잔의 고향 친구 에밀 졸라, 에드몽 뒤랑티, 필립 뷔르티였습니다. 이들은 술은 많이 마시지 않고 대화를 많이 했습니다. 살롱에 관해 주로 대화하면서 새로운 경향의 미술에 관해 의견을 나눴습니다. 파리에서의 문인과 예술가들의 교류는 그때부터 2차 세계대전이 발발할 때까지 지속되었습니다. 문학과 미술이 함께 발전할 수 있었던 좋은 기회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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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네의 <키어사지 전함과 알라바마 전함의 전투>



(작품은 Daum의 '광우의 문화읽기'에소 볼 수 있습니다.)

마네의 <키어사지 전함과 알라바마 전함의 전투 Le Combat des Navires Americains Kearsarge' et Alabama>, 1864, 유화, 137.8-128.9cm.


055 마네의 <불로뉴의 키어사지 전함 Le Learsarge' a Boulogne(Bateau de Peche Arrivant vent Arriere)>, 1864, 유화, 81-99.4cm.


1864년 6월 미국에서는 동란이 3년째 접어들고 있었습니다. 프랑스 정부는 은밀히 남부동맹을 돕고 있었고, 영국 또한 전함들을 영국 항구에 집결시킴으로써 남부동맹을 도우려 했습니다. 미국 정부는 영국의 이런 태도를 도발행위로 간주했습니다. 1864년 6월 19일 체르부르그로부터 14km 떨어진 곳에서 남부동맹의 알라바마 전함과 북군 전함 사이에 전투가 벌어졌습니다. 사람들은 호기심을 갖고 전투장면을 바라보았습니다. 알라바마 전함의 선장은 이미 북군 전함 60척을 침몰시킨 것으로 유명했으며 신문을 통해 파리 시민들도 익히 알고 있었습니다. 체르부르그의 호텔들은 이 사건을 취재하려는 기자들로 가득 찼습니다. 마네는 이 날의 전투장면을 생생히 캔버스에 담았고 제목을 <키어사지 전함과 알라바마 전함의 전투>라고 했습니다. 포탄을 맞은 배 너머로 북군의 배가 보이는 이 작품은 7월 카다르의 화랑에서 소개되었습니다.


마네가 이 날의 전투를 직접 보고 그렸느냐 하는 건 오랫동안 논란거리였습니다. 체르부르그는 파리로부터 360km 가량 떨어진 곳으로 마네가 직접 보았다면 그곳으로 가기 위해 많은 시간을 허비했어야 합니다. 마네가 직접 목격하지 않았더라도 전투상황을 신문이 매우 자세히 보도했기 때문에 본 듯이 그릴 수 있었습니다. 1864년 7월 중순에 그가 친구에게 보낸 편지에 “열린 바다 위의 작은 배들을 그리고 있네. 일요일에는 불로뉴에 정박한 북군 전함을 보러 갔네. 그 전함에 대한 습작을 갖고 돌아가려 하네”라고 적혀 있습니다. 프루스트는 마네가 직접 바라본 전투장면을 생생하게 그렸다고 했지만 사람들은 그가 목격한 것을 그린 게 아니라 신문보도를 통해 상상해서 그렸다고 믿었습니다.


또 다른 편지에는 “지난 일요일 키어사지 전함이 불로뉴에 정박했더군. 난 그곳으로 보러 갔네. 난 그 전함에 대해서 훌륭하게 추측한 적이 있네. 게다가 난 바다 위에 있는 모양으로 그렸네. 자네가 보고 판단하기 바라네”라고 적혀 있습니다. 이 편지 내용으로 보아 그가 불로뉴에서 처음 그 유명한 전함을 보았고, <키어사지 전함과 알라바마 전함의 전투>를 그릴 때는 신문과 잡지의 삽화를 보고 상상력으로 묘사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가 전투장면을 직접 보았든 아니든 이 작품이 관람자에게 준 감동은 전투의 위력이 아니라 바다의 위력이었습니다. 그는 두 대의 전함을 수평선 쪽으로 밀어놓고 원근법에 따라 크기를 조절하면서 넘실거리는 파도를 통해 바다의 위력을 묘사했습니다.


마네는 1860년대에 배를 주제로 여러 점 그렸고 1880년대 초에 그린 두 점의 <로슈포르의 탈출>은 유명합니다. 이 같은 해양화는 마네만 그린 것이 아니라 친구 화가들도 선호하는 그림이었습니다.


<키어사지 전함과 알라바마 전함의 전투>는 1872년 살롱을 통해 널리 소개되었으며 소설가이면서 평론가 줄 바르베이 도레빌리는 다음과 같이 적었습니다.


… 난 이 작품 앞에서 매료되었고, 감각적으로 마네가 나를 매료시킬 것이라고는 생각지 않았다. 이 작품은 자연과 풍경의 느낌으로서 아주 단순하며 강렬하고 … 미술계에 재능이 있고 영리한 사람이 있다면 그가 바로 마네일 것이다. … 이 작품은 상상과 실행에 있어 매우 훌륭하다! 과시되고 혐오스러운 문화가 우리 모두를 부패하게 만들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마네는 자연을 그리는 훌륭한 화가가 될 수 있다. 오늘 해양화 <키어사지 전함과 알라바마 전함의 전투>로 그는 자연 자체와 혼연일체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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