덕 윤리학의 동기

덕 윤리학은 플라톤이나 특히 아리스토텔레스 같은 고전 이론가들에게서 전해진 유산으로 종종 설명된다. 그렇지만 도덕이론 분야에서는 새로운 연구 영역으로 알려졌다. 19세기와 20세기에(아마 훨씬 이전부터) 걸쳐, 영어권에서는 공리주의와 의무론 사이의 논쟁이 도덕철학의 주류를 이루었다. 여기서 의무론을 대변한 것은 기독교 윤리나 칸트주의다. 20세기 후반에 이르면, 일부 철학자들이 이 논쟁에 싫증을 느끼기 시작한다. 그들은 이 논쟁이 도덕적 고려에 마땅히 포함해야 할 커다란 영역을 빼놓았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그들은 멀리 성 토마스 아퀴나스를 거쳐 아리스토텔레스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도덕연구의 전통을 되살리려고 시도한다. 독자들은 도덕철학의 발전과정을 되짚어 올라가는 이 운동에 별로 흥미를 느끼지 않을지 모른다. 여기서 우리의 관심은
204 제2부 도덕이론의 세 가지 출발점 덕 윤리학이 오늘의 윤리문제를 조명하는 데 어떤 영향을 미치는가다.
하지만 무엇을 지지하는가보다 무엇에 반대하는가를 설명하기가 훨씬 쉬우므로, 덕 윤리학의 재등장에 관한 논의는 가치가 있다. 덕 윤리학은 공리주의나 칸트주의보다 훨씬 더 많은 청중을 거느린다. 하지만 현대의 덕 윤리학을 가꾸어놓은 가까운 선배들과는 기본적으로 전혀 다른 가정을 지닌 초창기 원조들의 이론을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에 관해서는 어떤 합의가 이루어졌는지 확실하지 않다. 이 장에서는 덕이론의 발전과정에서 나타난 주요 특징들을 두루 살펴보고, 이 폭넓은 이론을 향해 제기된 몇몇 비평을 검토하려고 한다. 먼저 일부의 철학자들을 덕 윤리학으로 돌아서게 한 도덕이론의 결함부터 살펴본다.
공리주의와 칸트주의 같은 이론에 제기된 한 가지 비평은 우정이나 사랑 같은 고귀한 인간관계를 제대로 다루고 있지 않다는 점이다. 흔히 공리주의와 칸트주의는 모든 사람을 평등하게 보는 공정한 이론이라고 한다. 그렇지만 인간은 일상에서 공정하게 행동하지 않는다. 우리에게는 친구와 가족이 있고, 우리의 시간과 자원을 다른 어느 누구보다 친구, 자녀, 부모처럼 가까운 사람들을 위해 쓴다. 물론 친구를 좋아하는 데도 한계가 있기 마련이고, 가까운 사람들이 아니라 하여 그들을 전적으로 도외시하는 것 또한 아니다. 모든 인간관계가 마피아 스타일의 ‘우리’만을 중심으로 이루어질 수는 없다. 그렇지만 우리는 친구와 가족을 특별히 배려하며, 사랑과 믿음의 관계를 쌓아가는 것을 삶에서 큰 보람의 하나로 여긴다. 달리 말하면, 개인을 향한 충심에 큰 가치를 부여한다. 이렇게 보면, 공리주의와 칸트주의가 인간의 삶 가운데 매우 가치 있는 것에 대하여, 좋게 말하면 무관심했고 나쁘게 말하면 적대적이었음은 참으로 이상하다고밖에 할 수 없다.
그런데 이 문제는 빙산의 일각일 뿐이다. 흔히 공정한 도덕론은 그 이론을 충실히 따르는 행위자를 버린다고 한다. 그 이론을 따르다 보면 자신의 삶이 곤경에 빠지기 쉽다는 것이다. 어떤 도덕론이라도 그 이론을 충실히 받드는 이상적인 행위자가 존재하기 마련이다. 모범적인 공리주의자나 칸트주의자는 그 이론의 공정성만을 따르고 받들다가 정작 자신의 삶을 살찌워줄 개인적인 계획을 소홀히 다루어, 마침내는 자기 희생적인 의무의 노예로 전락하고 만다는 것이다. 공리주의는 모범적인 추종자에게 지나친 부담을 안겨주면서 그들 자신이 기획하는 일을 버리고 오직 전체의 복지를 최대화하는 일에 매달리게 한다. 그런가 하면 칸트주의자는 늘 의무에 매달려 개인적인 계획이 도덕적 원칙에 들어맞는지를 점검하고 감시하기에 여념이 없다고 한다. 어떤 경우를 보더라도 순발력 있고, 활기에 넘치고, 스스로 쾌락을 찾고, 슬기롭게 살아가는 이상적인 행위자를 찾아볼 수가 없다. 자신 또는 자식들이 모름지기 저렇게 살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할 만한 삶의 본보기를 보여주지 못하는 것이다. 공정하다는 이들 도덕론의 어느 것도 이상적인 삶의 방식을 보여주지 못하기에, 이 사상들은 우리의 사고에 대하여, 나아가서는 우리의 행위에 대하여 별다른 영향력을 미치지 못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