융은 자신의 고통 때문에 가족에게 베푼 것이 별로 없었다

 

 

 

 

그러나 정작 중년의 융은 자신의 고통 때문에 가족에게 베푼 것이 별로 없었다. 여전히 도움을 받아야 하는 쪽은 융이었다. 당시 그는 정신적 고통과 함께 불면증과 위장병까지 겪고 있었다. 자신에 대한 통제력을 잃을 것만 같은 두려움이 계속되면서 꿈속의 무의식에서는 새로운 환상 속의 인물들이 등장했다. 하지만 그런 가상의 인물들이 그의 개인적인 삶을 투사하는 것은 아니었다.

 

 

바다와 같은 푸른 하늘은 … 납작한 갈색 흙덩이로 덮여 있었다 … 그 흙덩이는 갈라져 있었는데 … 갑자기 … 날개 달린 존재가 하늘을 날고 있었다 … 그것은 황소의 뿔을 단 노인이었다. 그에게는 열쇠 꾸러미가 네 개 있었는데 … 그는 어떤 자물쇠를 열려는 듯 그 중 열쇠 하나를 움켜쥐고 있었다. 그는 특이한 색의 물총새 날개를 달고 있었다. 필레몬은 이교도였으며 그에게서는 영지주의적인 색채와 함께 이집트와 고대 그
리스의 분위기가 풍겼다.

 

이 꿈을 그림으로 그리던 융은 그의 정원에서 외상의 흔적이 없는 죽은 지 얼마 되지 않은 물총새를 발견하고는 “번개에 맞은 듯” 놀랐다. 취리히에서 물총새를 보기란 매우 드문 일이었다. 이 같은 의미심장한 우연을 그는 “동시성synchronicity”이라 불렀다.

 

환상 속에서 본 필레몬과 다른 인물들은 내가 만들어낸 것이 아니라, 스스로 나타나 자신들만의 인생을 사는 내 정신 속의 존재들이라는 중요한 깨달음을 얻었다. 필레몬은 내가 아닌 어떤 힘을 의미했다 … 그는 나에게 정신의 객체성, 정신의 진리를 가르쳐주었다 … 나는 내가 알지 못하고 내가 의도하지 않은 말을 하는 무언가가 내 안에 있음을 알게 되었다 … 심리학적으로 필레몬은 우월한 통찰을 상징했다 … 그는 나에게 인도인들의 구루guru(힌두교와 시크교에서 스승이나 지도자)와 같은 존재였다. 사실 그는 나에게 수많은 혜안을 알려주었다.

 

마지막 환상은 융이 “카Ka”라고 부른 땅속 깊은 곳에서 나온 인물이었다. 고대 이집트에서 카는 왕의 이승에서의 형체, 즉 그의 “육체화된 영혼embodied soul”에 붙여진 명칭이었다.

 

나는 현세에 있는 그의 모습을 그리면서 하체는 돌로, 상체는 청동으로 표현했다 … 카의 모습에는 악마적인 무언가가 있었다 … 그는“ 내가 바로 신들을 금과 보석 속에 묻는 존재”라고 말하고 있다. 필레몬은 한쪽 다리를 절었지만 날개 달린 영혼이었다. 반면 카는 지상에 있는 악마의 일종이었다 … 필레몬은 영혼의 측면, 즉“ 의미”를 상징했다. 카는 … 자연의 영혼이었다 … 카는 모든 것을 실재하도록 만들었지만“ 의미”, 즉 물총새의 영혼을 희미하게 만들거나 그것을 아름다움으로 바꾸어 버렸다 … 이윽고 나는 연금술 연구를 통해 두 존재를 통합할 수 있었다.

 

융는 자서전을 쓰면서 당시의 일에 어느 정도 거리를 두고 다음과 같이 결론 내릴 수 있었다.

 

 

물론 정신과 의사인 내가 거의 모든 단계의 실험에서 정신병을 규정하며 정신병원에서 볼 수 있는 정신적 현상을 똑같이 겪는다는 것은 아이러니한 일이다. 수많은 무의식의 이미지들은 정신병 환자들에게 치명적인 혼란을 안겨준다. 하지만 그것은 이성의 시대를 살면서 사라진 신화적 상상의 모체이기도 하다. 그런 상상이 도처에 존재하지만 우리는 그것을 금지하고 두려워한다.

 

50만 명이 전쟁에서 목숨을 잃은 이성의 시대인 1916년, 융에게 점진적으로 내면의 변화가 일어났다. 그는 필레몬의 가르침을 창의적인 형태로 표현하고 싶었다. 『죽은 자를 위한 일곱 가지 설교』의 첫머리에는 융의 가족 전체가 귀신을 경험한 듯한 이야기가 언급되었다.

 

일요일 오후 5시경 앞문의 초인종이 요란스럽게 울리기 시작했다. 맑은 여름날이었다. 그때 하녀 둘은 부엌에 있었는데 그들은 중앙의 트인 공간 너머로 밖을 볼 수 있었다. 모두가 즉시 밖을 내다보았지만 아무도 보이지 않았다. 나는 초인종 가까이에 앉아 있어서 무언가가 움직이는 소리를 들었을 뿐만 아니라 그 모습도 볼 수 있었다. 우리 모두 서로를 바라보았다. 무언가가 실내에 가득 차 있는 것이 분명했다! 그러고 나서 무슨 일이 일어날 것을 알았다. 집 전체는 수많은 사람들이 온 것처럼 영혼들이 빽빽하게 공간을 채웠다. 문이 있는 곳까지 영혼들이 붐볐고 공기가 너무 무거워서 숨 쉬기도 어려울 지경이었다. 나는 벌벌 떨며“ 도대체 무슨 일일까?”라는 의문에 빠졌다. 그러자 영혼들이 입을 모아 외쳤다“. 우리는 예루살렘에 갔다가 돌아왔소. 우리는 그곳에서 찾던 것을 찾지 못했소.” 이것이『 죽은 자를 위한 일곱 가지 설교』의 시작이다. 이후 나에게서 저절로 생각이 흘러나왔으며 사흘 밤이 지난 후 글의 첫머리가 완성되었다. 내가 펜을 잡자 그때서야 유령들이 모두 사라졌다 … 유령 소동이 끝난 것이다 … 죽은 자와의 이 같은 대화는 내가 무의식에 관해 세상과 소통해야 하는 것이 무엇인지, 그 순서의 형태와 내용의 해석을 알려주는 일종의 서막이 되었다.

 

이 책은 옛 문체로 쓴 일종의 시집이다. 『죽은 자를 위한 일곱 가지 설교』는 원래 익명의 한정판으로 출간되었으며 그의 요청으로 『융 전집Jung’s Collected Works』에는 포함되지 않았다. 하지만 이 책은 대극들의 대립과 개성화의 개념 등 그의 가장 기본적인 사상의 틀을 보여준다.

 

 


인류가 망각한, 그대들이 모르는 신이 있다. 우리는 그 신을 아브락사스라 부른다. 아브락사스는 보통의 신과 악마보다 훨씬 더 정형화되지 않은 존재이다 … 그것은 개연성 없는 개연성이며 비현실적인 현실이다. 플레로마가 실재한다면 그 표현이 바로 아브락사스일 것이다 … 그것은 플레로마와는 구분되는 크레아투라[창의적 인간]이기도 하다 … 아브락사스의 힘은 두 가지로 나뉜다. 하지만 그 힘은 그대들의 눈앞에서 그 힘의 충돌하는 대극들이 사라져서 그대들에게는 보이지 않는다.
태양신이 말하는 것은 삶이다. 악마가 말하는 것은 죽음이다. 하지만 아브락사스는 삶과 죽음을 동시에 의미하는 신성하고 저주받은 단어를 말한다. 아브락사스는 하나의 단어와 행동으로 진실과 거짓, 선과 악, 빛과 어둠을 낳는다. 아브락사스는 왜 끔찍한 것일까 …

그것은 공허함과 결합하려는 풍부함이다.
그것은 자식을 갖는 신성한 일이다.
그것은 사랑이며 사랑의 살해이다.
그것은 성인이며 그 성인의 배신자이다.
그것은 가장 밝은 낮의 빛이며 가장 어두운 광기의 밤이다.
그것은 가장 강력한 생명체이며 그 안의 생명체는 자신을 두려워한다.
그것은 플레로마와 그것의 공허함에 대한 크레아투라의 명백한 대립이다 …
그것은 크레아투라의 생명이다.
그것은 분명함의 작용이다.
그것은 인간의 사랑이다 …
그것은 인간의 모습과 그림자이다.
그것은 환상 속의 현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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