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편법칙의 절차에 대한 비판

 

 

 

 

 

 

지금까지 보편법칙 절차의 배경에 깔린 사상을 조명해보았는데 (칸트가 이 사상을 제기한 데는 그만한 이유가 있었기에) 여기에도 문제가 적지 않다. 그중 몇 가지 문제들은 그 자체로는 비도덕적이지 않음에도 보편화하기 어려운 행위에 관한 것이다. 예를 들어, 화요일 1시 강의 때마다 꼭 걸상에 앉기로 마음먹었다고 하자. 그렇다면 다른 사람들도 같은 방식으로 그 걸상을 사용할 수 있지 않을까? 많은 사람들이 그렇게 한다
면 앉을 자리가 비좁아질 것이다. 그렇다고 그들의 행위를 허락할 수 없다고 말할 수 있을까? 또 다른 사례로, 여러 사람들이 하나의 문을 빠져나가려 할 때, 자신이 기사도를 발휘하여 사람들을 모두 내 앞에 세우려 한다고 하자. 그런데 이때 사람들이 같은 행위를 한다면 그 문을 빠져나가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이런 결과는 칸트조차 받아들일 수 없을 것이다. 칸트의 보편법칙에 오류가 없는 한 이런 정도의 문제는 실상 그리 큰 문제가 아니라고 넘겨버릴 수 있다. 그렇더라도 이런 결과 앞에서 마음이 편할 수는 없다.
그런데 이번에는 부도덕한 행위가 명백히 보편화할 수 있는 예를 살펴보려고 한다. 예를 들어, 강의하러 가는 길에 어린아이가 연못에 빠져 허우적거리는 광경을 보게 된다. 나는 어린아이를 건져주지 않은 채 곧장 강의실로 향한다. 칸트는 곤경에 빠진 사람을 돕지 않는 행위를 보편화하는 건 말도 안 되는 소리라고 주장할 법하다. 칸트가 인간은 미약하고 유한한 존재이기에 그가 기획하는 일이 성공하려면 다른 사람들의 도움을 받아야 한다고 인정하는 것 역시 바로 이 때문이다.
누구도 어느 누군가를 도와줘서는 안 된다면, 어떤 기획이나 야망 또한 이뤄지기 어려울 것이다. 칸트는 이것이야말로 자기 모순이고 불합리하다는 점을 지적한다. 모든 사람은 자신의 기획이나 야망이 이뤄지기를 바란다. 그런데 아무런 기획도 이뤄질 수 없다면 이것이야말로 말이 안 된다. 도와줘서는 안 된다는 것을 보편화할 수는 없는 일이다. 따라서 인간은 남을 도울 의무를 지고 있으며, 연못에서 허우적거리는 아이를 건져주어야 한다. 자신의 행위가 ‘허우적거리는 아이를 건져낼 수 있는데도 그냥 지나쳐 버렸다’는 정도였다 하더라도 칸트는 이에 대하여 허용할 수 없는 행위였다고 말할 것이다. 그런 행위를 다르게 표현할 수 있다. 예컨대, ‘시간에 늦지 않게 강의실에 들어서기 위해서’였다고 한다면, 보편화하거나 허용할 수 있음 직한 구실이 될지 모른다. 여기서
칸트는 자신의 행위를 참되게 나타내는 표현이 무엇인가를 다시 문제 삼을 것이다. 우리가 볼 때 (우리의 도덕적 상식에 비추어) 명백히 첫 번째 표현이 우리에게 도덕적으로 타당한 표현이었다고 하더라도, 칸트의 이론은 형식주의적이어서 상식에 의존하지 않는다. 여기서 그는 우리의 행위에 관한 어떤 표현이 과연 타당한지를 어떻게 결정할 것인가에 대해 이론적으로 설명해야 한다. 우리의 행위가 보편성을 검증받으려면 어떻게 표현되어야 하는지에 관한 설명이 그의 이론 가운데 포함되지 않는 한, 보편법칙의 절차는 사실상 공허한 것에 머물 것이다. 어떤 행위건 간에 다시 표현하기만 하면 보편성 검토를 통과할 것이기 때문이다.
이 문제를 제쳐 놓더라도, 합리성에 대한 칸트의 주장에 또 다른 논쟁의 여지가 있음을 주목하지 않을 수 없다. 칸트는 어떤 사람이 이성적 행위자로서 어떤 행위를 하기로 선택하는 것은 곧 다른 누군가가 같은 행위를 할 수 있다고 말하는 것과 다름없다고 주장한다. 좀 더 기술적인 표현으로 바꾸면, 칸트주의자들은 인간이 하나하나의 행위를 통해 보편적인 입법을 하는 것으로 생각한다. 즉 우리는 모든 인간 혹은 모든 이성적 존재를 위해 법을 세우는 셈이다. 그러므로 자신이 모든 사람의 법이 될 수 있도록 아니면 모든 사람이 행위해야 할 방식으로 행위하도록 노력하는 것이 이성적인 존재로 사는 길이라고 칸트주의자들은 주장한다. 이 논의를 더 깊이 살펴볼 여유는 없지만, 이러한 합리성의 개념이야말로 몹시 획기적임을 알아두어야 한다. 이 개념은 잘 알려진 다른 개념들과는 무척 대조적이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위에서 간단히 언급한 바와 같이 경제학자들이 좋아하는 합리성의 개념에 따르면, 개인의 기대효용을 최대화하는 것이 합리적이다. 개인의 선호나 욕구를 최대한으로 만족하는 것을 말한다. 이 견해는 실제로 적용 가능한 합리성은 다만 도구적 역할을 할 뿐이라는 데이비드 흄의 견해에 바탕을 둔다. 흄에 따르면, 이성은 우리의 욕구를 어떻게 충족하고 욕구충족을 어떻게 최대화하는가에 관련되며, 다른 것일 수 없다. 흄에게 이성은 ‘감정의 노예’일 뿐이다. 합리성에 관한 흄의 견해는 칸트의 견해보다 훨씬 단순해보인다. 흄의 견해를 비판하는 사람들은 그의 견해가 인간이란 존재에 관해 이미 알려진 일부 사실에 비추어 보더라도
너무 단순하다거나, 인간의 행위에 대한 환원적 견해에 바탕을 둔다고 주장한다. 다른 한편, 자신의 목적을 달성하는 데 필요한 수단을 취하지 못한다는 것은 명백히 불합리한 일이기에 흄의 견해는 적어도 우리가 합리성이라 부르는 것의 일부를 파악하고 있다는 주장에 어느 정도 직관적 근거가 있다고 하겠다. 이와 달리 칸트의 견해를 옹호하는 사람들은 비록 탈세한 돈을 쥐고 달아날 수 있다 하더라도, 탈세는 불합리하다는 획기적인 주장을 하기 위해 설득력을 강화해야만 한다.
칸트의 견해에 대한 마지막 비평은 비단 보편법칙에만 국한되는 것이 아니라 칸트 윤리학의 전반에 관한 것이다. 그 취지는 대체로 칸트의 윤리학이 나쁜 것으로 지목하지 않은 나쁜 행위들이 적지 않으며, 나쁜 것으로 지목한 행위라 하더라도 옳은 이유를 들어 지목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폭력범죄를 예로 들어보자. 사람에게 폭력을 행사하여 고통을 주는 행위는 특히 나쁜 행위다. 그런 행위를 단순히 보편화할 수 없기에 나쁜 행위라고 기술하는 것은 그런 행위가 왜 나쁜지에 대한 설명에서 중요한 측면을 빼놓은 셈이다. 이런 생각이 옳건 그르건 간에 내가 이 침해행위에 속상해하는 건 그 때문이 아니다. 칸트는 차라리 자신이 실제로 주장한 것을 조금 수정하여 사람을 목적 자체로 대우하지 않았기에 나쁘다고 주장하는 것이 나을 뻔했다. 폭력행위는 개인적인 영역에 쳐들어와서 무엇을 강압하는 행위다. 행위의 공격성이 그 행위를 나쁘다고 지목하게 할 뿐 아니라 나에게 고통을 주기 때문에 한층 나쁘다. 그런데도 칸트의 견해에는 공리주의자들이 도덕문제에 접근할 때 가장 중요하고 타당한 기준으로 생각하는 고통과 고생을 타당한 도덕적 기준으로 고려하는 내용의 언급이 전혀 없다. 칸트는 인간을 순전히 이성적인 행위자로 바라보았기에 육체적 괴로움 따위는 하나의 우연으로만 다룬다는 비평을 사기에 충분하다. 이러한 비평이 옳건 그르건 나쁜 행위를 지목하는 데 괴로움이나 고통이라는 중요한 기준을 도외시한 것은 도덕이론으로서 큰 허점을 드러낸 것이다. 그러므로 공정하게 평결하자면, 칸트의 윤리학은 (기만이나 강압 같은) 일부 행위들의 나쁨을 훌륭히 설명하고 있음에도 그것만이 도덕의 전부인 듯 여기는 미흡한 점이 있다. 그 결과 칸트의 윤리학은 공정하게 말해서, 하나의 포괄적인 도덕이론이 될 수 없다는 비평을 샀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