합리성의 요건으로서의 도덕적 요건

 

 

 

 

 

 

지금까지 살펴본 것은 칸트 윤리학의 한 측면에 지나지 않는다. 이 측면은 우리가 다른 사람(그리고 자신)을 이성적 행위자로 대우하고 존중할 의무를 띠고 있음을 강조했다. 이제 또 하나의 측면에서 칸트의 견해를 살펴보려 한다. 여기서도 합리성은 중요시된다. 칸트는 도덕적 의무나 요건은 그 자체가 합리성의 요건이 된다고 주장한다. 칸트는 도덕적 요건을 어기는 사람을 비이성적인 사람으로 본다. 다른 말로 표현하자면, 우리를 다스리는 도덕적 요건의 권위는 곧 합리성의 요건이 지닌 권위에 해당한다.
칸트의 견해를 설명하자면, 먼저 합리성의 요건이 무엇인지, 그리고 도덕적 요건이 곧 합리성의 요건이라는 주장을 내세워 칸트가 해결하려는 문제가 무엇인지를 이해해야 한다. 그런 다음 바로 앞서 검토한 사실들이 칸트 이론의 구성에 어떻게 관련되는지, 특히 보편법칙에 맞게 행동하는 것이 도덕의 기본 원칙을 형성하는 또 하나의 길이 된다는 주장을 이끌어내는 데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 살펴보려 한다.
합리성의 요건은 무엇인가? 간단한 예로, 모순되는 두 개의 신념을 동시에 지니는 경우를 생각해보자. 예컨대, (1) 오늘은 화요일이다. (2) 화요일 저녁에 친구를 만나기로 했다. 오늘 저녁에 시간이 나는데 저녁 시간이 나느냐고 물어온다면 그렇다고 대답해줄 것이다. 이 두 가지를 동시에 생각하고 있다는 건 말이 안 된다. 이 경우를 다시 정리하면, (3) 오늘 저녁 나는 아무것도 하지 않고 있지만, 화요일 저녁에는 시간이 없을 터인데, 오늘이 화요일이라고 생각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것은 불합리하다. 이 생각들이 모두 참일 수는 없다. 뭔가는 잘못되어 있다. 이 일이 실제로 일어난다면 믿을 있겠지만, 그러기 전에는 모든 생각을 그대로 믿을 수가 없다. 그런데 이 생각들을 모두 믿을 수 없다고 말할 때 다음과 같은 것을 의미한다. 불일치하고 어긋나는 일들을 한꺼번에 참이라고 믿는 것이 설령 가능하다 하더라도, 깊이 생각해보면, (2)와 (3) 중에서 하나는 버려야 한다. 달리 말하면, 깊이 생각하려면 합리적이어야 한다. 내가 바라는 것이라고 모두 믿어서는 안 된다.
모순되는 생각을 하는 건 불합리하다. 적어도 합리성의 요건 한두 가지를 갖춰야만 합리적 사고가 가능하다는 뜻이다. 이 점을 다음과 같이 말할 수 있다. ‘증거를 바탕으로 생각하라’는 것과 ‘모순되는 생각을 하지 말라’는 것이다. 이런 요건은 거부할 수 없는 권위를 지닌다. 이들을 거스르면 안 된다. 우리는 이 요건들을 지켜야 한다.
칸트는 과감하게도 똑같은 내용의 도덕적 요건을 설정한다. 도덕에 대해서도 똑같은 말을 할 수 있다는 것이다. 도덕적 요건이 바로 합리성의 요건이기 때문이다. 비도덕적인 것은 동시에 불합리한 것이다. 표면상으로만 보면 잘못된 말로 들릴지 모른다. 어떤 이들이 공공 서비스 혜택을 받으면서 세금을 한 푼도 내지 않는다면 사악하고 이기적인 짓이다. 이들이 합리적일까? 합리성에 대한 일부의 개념(예컨대, 합리성이란 개인적 효용을 기대하는 것이라는 개념)에서 보면, 탈세하여 빠져나갈 길이 있다면 그렇게 하는 것이 가장 합리적인 길일 듯하다. 그런데 칸트는 왜 이것을 불합리하다고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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