침략의 시대: 박트리아인으로부터 훈족까지

기원전 232년 아소카 왕이 타계한 후 마우리아 왕조는 급속히 쇠락하기 시작했다. 많은 학자들이 아소카가 비폭력정책을 선택했기 때문에 어진 일이라는 분석을 내놓았다. 하지만 아소카는 완벽한 비폭력만을 고수한 평화주의자는 아니었으므로 그의 이상적인 정책을 마우리아 왕조의 군사력이 약해진 점과 연관 짓는 건 타당하지 않다. 그는 신의 후계자들이 가능한 한 최소한의 무력을 사용하길 염원했을 뿐이다. 그가 정말로 꽉 막힌 평화주의자였다면 그의 통치기간 중 단 한 례의 처형도 시행되지 않았어야 하는 것이 아니겠는가. 그 몰락 원인이 무엇이건 간에, 마우리아 왕조는 쿠데타 세력의 반란으로 문을 고 만다. 기원전 185년 군사령관 푸시야미트라가 마우리아의 마지막 통치자를 시해하고 새로운 왕조를 설립한 것이다. 푸시야미트라는 스로 숭가 왕조의 첫 번째 왕이 된다.
인도 북서부의 불안정한 정세는 박트리아 왕국을 세운 그리스인들의 관심을 끌었다. 그리고 이들은 즉각 군사적 행동에 나섰다. 사실 이 시기 인도 북서부에 외세의 침략이 끊이지 않았던 건 따지고 보면 상당히 먼 나라에서 일어난 일 때문이었다. 인도 북서부와는 상관도 없어 보이는 중국 대륙에서 최초의 통일왕국 황제 진시황이 기원전 221년 진秦나라를 세운 일이 근원적인 원인을 제공했던 것이다. 중국 대륙을 한 손에 움켜쥔 시황제는 중앙아시아 유목민들을 견제하기 해 만리장성을 쌓았다. 이 거대한 방벽의 건축이 중앙아시아 초원지대에 살고 있던 유목민들을 압박한 것이다. 특히 그들 중에서도 대월지와 흉노는 만리장성 너머의 북쪽 초원지대를 차지하기 위해 격렬한 전쟁을 벌였다. 기원전 165년경 대월지의 완패로 이동이 시작되었다. 대월지가 박트리아의 경계지역으로 옮겨간 것이다. 대월지의 이동에 자극을 받은 중앙사시아의 또 다른 유목민족인 샤카족이 기원전 1세기에 페르시아와 힘을 합쳐 인도를 침략했다. 인도 북서부에는 이미 이 침략이 일어나기 전에 박트리아 왕이 건국한 그리스 왕국이 자리 잡고 있었다. 박트리아의 왕은 이 왕국에서 키워낸 군사들을 자신의 왕국 군인으로 차출했다.
고대 그리스의 역사가이자 지리학자 스트라보에 따르면, 박트리아와 인도에 알렉산드로스가 정착시킨 사람들은 상당히 윤택한 생활을 했다고 한다. 비옥한 옥서스Oxus 강이 지척에 있었기 때문이다. 그의 말에 따르면 “광활한 그 지역에서는 올리브 오일 말고는 거의 모든 을 생산할 수 있었다”고 한다. 또 “이 축복받은 땅의 위대함 덕에, 셀레우코스 왕조의 통치에 반기를 들었던 그리스인의 힘은 세월이 지날수록 강성해졌고, 침내 그들은 아리아인의 땅과 인도에까지 그 세를 확장했다”고 한다. 현재의 아프가니스탄 남부와 인더스 강 유역에 르는 이들의 땅은 해안까지 거침없이 뻗어나갔다. 인도 아대륙까지에 넣은 박트리아는 마침내 마케도니아인이 점령했던 영토보다 더 은 땅의 주인이 된다. 스트라보는 이러한 영토확장이 위대한 두 군주 덕분이라고 기록했다. 박트리아의 왕 에우티데모스 1세의 아들 데메트리오스 1세와 밀린다라고도 불리는 메난드로스 왕이 바로 그들이다. 불교에는 메난드로스를 칭송하는 문학작품들이 전해온다. 에우티데모스는 알렉산드로스가 점령한 광대한 중앙아시아 지역에서 정권을 지하기 위한 최후의 분전을 했던 셀레우코스 왕조 사람이었다. 그는 안티오코스 3세와의 세력다툼에서 밀려났지만, 기원전 200년경 박트리아의 왕으로 즉위했다. 그의 뒤를 이은 데메트리오스는 푸시야미트라가 마우리아 왕조를 전복한 직후에 인도를 침략했다. 이 침공으로 메트리오스의 군대가 간다라, 펀자브와 인더스 계곡을 정복하고 갠지스 강 상류에 주둔하게 되었다. 갠지스 강 상류의 주둔부대 사령관이 바로 데메트리오스의 사위 메난드로스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