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리주의의 실행: 처벌과 약속

첫 번째 예로, 처벌에 관한 제도를 살펴보자. 미셸 푸코는 『감시와 처벌Discipline and Punish』의 첫머리에서 처벌의 극적인 사례를 보여준다. 국왕을 시해하려던 다미앵이 수레에 실린 채 파리 거리를 지나 형장으로 끌려간다. 그의 몸은 천천히 해체되고, 끓는 납이 상처에 부어지고, 나중에는 말에 매어 능지처참을 당한다. 이 끔찍스런 광경을 군중이 지켜본다. 이것은 약 250년 전보다 조금 앞서 일어난 일이다. 푸코가 이 사례를 든 것은 형벌에 대한 인간의 사고가 비교적 짧은 기간에 얼마나 극적으로 바뀌었는지를 보여주기 위해서였다. 공리주의자들은 인간의 인식이 빠르게 바뀌어가는 것을 설명하려고 이 사례를 끌어다 쓰려 할 것이다. 앞서 살펴보았듯이, 공리주의의 관점에서는 개인의 이익이 중요하고 범법자의 이익을 포함하여 모든 사람의 이익은 평등하다. 이와 달리 다미앵을 벌주던 사람들은 그 죄인을 아무것도 아닌 것으로, 아니 아무것도 아닌 것보다 더 수준이 낮은 것으로 다루었다. 야만으로 간주했던 행위는 그에 상당하는 처벌을 받았고, 군중은 그 광경을 즐거워했다.
다미앵을 다룬 방식은 죄인이 도덕적 지위를 잃을 때 어찌되는지를 잘 보여준다. 보통 사람들에게는 차마 할 수 없는 짓을 죄인들에게는 해도 되는 것이다. 바로 여기서 응보주의retributivism의 원칙으로 처벌을 시행한다는 발상이 나온다. 물론 현대의 응보주의자들도 다미앵을 처벌한 방식이 야만적이었음을 인정할 것이다. 하지만 잘못을 저지른 사람에게 고통을 주는 건 죄 없는 사람을 괴롭히는 것과 달리 나쁘지 않다고 보는 점에서 응보주의자들은 다미앵을 처벌했던 사람들과 생각을 함께할 것이다. 잘못을 저지른 사람은 벌을 받아 마땅하므로 잘못을 저지른 사람의 도덕적 지위를 끌어내려야 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공리주의자들은 이런 응보주의의 견해에 반대한다. 잘못을 저지른 사람이라도 그 도덕적 지위란 것을 의문이 풀리지 않은 채로 잃어야 하는 건 아니다. 한 여인의 행복은 그 누구의 행복과 똑같이 중요하다. 그러므로 처벌 자체를 마땅하다거나 옳다고 할 수 없다. 다른 모든 것과 마찬가지로, 처벌은 오직 행복을 가져오는 결과가 있어야만 옳은 것이 될 것이다. 공리주의 관점에서 볼 때, 처벌은 표면상으로도 많은 문제점들을 안고 있다. 처벌은 잘못을 저지른 대가로 잘못을 저지른 사람에게 고의로 괴로움을 주는 행위다. 공리주의자들이 볼 때, 이렇듯 괴로움을 주는 행위는 처벌을 받는 괴로움이 더 큰 다른 괴로움을 덜어줄 때에만 정당화할 수 있다. 예컨대, 처벌은 또 다른 죄악을 억제하거나 예방할 수 있을 때에만 정당하다. 다른 한편, 더 적은 비용으로 죄악을 예방할 수 있는 효과적인 대안이 있다면 그 처벌은 정당화하기 어려울 것이다.
공리주의자들은 끔찍한 불행을 연출하지 않고서도 범죄를 예방하는 방안을 찾아보라고 권할 것이다. 여기서 공리주의가 사회제도를 평가하는 중요한 기준을 마련할 수 있음을 알게 된다. 그 중요한 기준은 객관적이면서 계측할 수 있는 것, 말하자면, 행복이나 불행과 같은 결과에 바탕을 둔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급진적 접근방식에 문제가 있는 것 또한 사실이다. 공리주의는 어떤 것이건 선이 실현되는 결과를 가져올 때에만 처벌할 수 있다고 주장하는 점에서 적극적인 작용력이 있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쓸데없이 처벌을 위한 처벌을 해서는 안 될 일이다. 하지만 범죄자를 처벌하는 구실은 예컨대, 처벌하면 큰 억제 효과를 거둘 수 있다면서 때에 따라 죄 없는 사람을 처벌할 구실로 둔갑할 수가 있다. 모든 사람이 어느 사람에게 죄가 있다고 여기는 가운데 (그리고 당사자와 나만이 그에게 죄가 없음을 알고 있는 가운데), 죄를 덮어씌우려고 그에게 죄가 없다는 증거를 손쉽게 없애버릴 수 있다고 가정하자. 게다가 실제로 그 죄를 지은 사람이 죽어버려서 더는 아무런 위협이 될 수 없다고 가정하자. 내가 공리주의를 따르는 수사반장이라면, 내 앞에는 두 가지 대안이 있을 것이다. 하나는 아무도 처벌하지 않기로 하는 것이다. 이렇게 되면, 아무런 억제 효과도 거둘 수 없을 것이다. 또 하나는 죄 없는 사람을 처벌하는 것이다. 아무런 선도 이루어질 수 없을 바에는 처벌할 필요가 없겠지만, 충분히 중요하고 좋은 효과가 있을 것이 확실하다면 처벌해야 한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엉뚱한 사람을 죄인으로 몰아 죽이더라도 그의 죄 없음을 밝힐 수 있는 사람은 이제 아무도 없다. 죄 없는 사람을 처형한대서 어떤 나쁜 결과가 나타나랴? 일이 이쯤에 이르면, 공리주의자는 죄 없는 쪽을 죽이는 것이 오히려 잘하는 일이라고 생각할는지 모른다.
바로 이것이 공리주의가 비도덕적인 결과를 가져올 수 있음을 설명하는 하나의 사례가 된다. 이런 비평을 받을 때 공리주의자는 속으로 꾹 참으면서, 설명하기 힘든 의무론을 고집하는 사람들이야 저 죄 없는 사람을 죽이는 것을 절대로 나쁜 일로 볼 것이라고 혼자서 중얼거릴지 모른다. 그 어느 행위와 마찬가지로, 죄 없는 사람을 벌주는 것은 물론 미안한 일이긴 하지만, 경우에 따라 필요하다고 혼자서 중얼거릴지 모른다. 그런 경우는 흔치 않은 몹시 드문 일이라고 중얼거릴 것이다(그리고 대체로, 저 사람의 죄 없음이 세상에 드러나는 일이 거의 없을 것으로 생각할 것이다). 하지만 이런 사고방식을 딱하게 여기는 사람들도 많다. 죄 없는 사람을 희생해서 전반의 복지를 끌어올리는 일은 절대로 받아들일 수 없다고, 많은 사람들이 외칠 것이다. 그뿐 아니라, 이 점은 나중에 다시 검토하겠지만, 경찰의 결정이 공리주의 사고를 바탕으로 이루어진다는 사실이 알려지면, 그래서 죄인으로 낙인찍힌 사람들 가운데 꽤 많은 수가 실상 죄 없는 사람임이 알려지면, 형법체계에 대한 신뢰는 순식간에 무너지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