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멸의 존재인 인간과 불멸의 존재인 신 사이의 경계가 허물어진 것이다

수메르 도시국가들 전체에 영향력을 미치는 주신들이 분명히 존재했음에도, 각 도시국가에서 살아가는 수메르인은 자신들의 도시의 신을 살뜰하게 모셨다. 우르 사람들은 달의 신 난나를, 라르사 사람들은 해의 신 우투를, 키시 사람들은 모신母神 닌후르사그를, 에리두에서는 물의 신 엔키를, 우룩인은 하늘을 다스리는 엔릴을 섬겼다. 간혹 죽음의 땅에 발을 들여놓는 수메르의 신들도 있었다. 필멸의 존재인 인간과 불멸의 존재인 신 사이의 경계가 허물어진 것이다. 심지어 수메르인은 초기 왕들에게 신격을 부여하기도 했다. 이처럼 수메르인은 신에 대해서 상당히 자유로운 관점을 가지고 있었다. 인간과 신을 엄격히 구분하는 셈족의 종교관이 수메르인에게 영향을 미친 건 한참 후의 일이었다.
하지만 운명을 대하는 태도만큼은 셈족과 수메르인이 다르지 않았다. 두 종족은 모든 운명이 신에 의해 결정되며, 신이 자신들의 풍족하고 안락한 삶을 위해 인간의 운명을 결정한다고 믿었다. 오직 신들의 영화를 위해 우주의 삼라만상이 만들어졌다고 믿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수메르인은 신들의 결정에 내포되어 있는 크고 작은 결함에도 주의를 기울였다. 진흙으로 최초의 인간을 만들어낸 것은 엔키다. 뿌듯한 마음에 엔키는 연회를 열었고, 연회에 참석한 여러 신들은 부어라 마셔라 도수가 센 맥주를 마셔댔다. 취해서 인사불성이 된 엔키와 그의 아내 닌후르사그는 ‘인간창조 내기’를 한다. 닌후르사그는 사람을 창조하기에 앞서 그녀가 만드는 사람이 “어떤 운명을 타고나느냐” 하는 것이 자신의 결정에 달렸다는 점을 밝힌다. 하지만 만취상태에서 한 일에는 실수가 있기 마련이다. 닌후르사그는 한 군데씩 모자란 구석이 있는 인간들을 만들어낸다. 이 인간들에게 쓰임새를 찾아주자니 엔키의 골치가 이만저만 아픈 것이 아니었다. 하지만 하늘을 관장하는 신 엔키는 번뜩이는 기지를 발휘하여 이들로 하여금 “빵을 먹고 살 수 있게” 해준다. 불구인 자는 왕의 시종이 되고, 눈먼 자는 왕의 음유시인이 된다. 또 불임인 여성이 황제의 할렘에 들어가게 되고, 무성無性인 자는 사제가 된다. 엔키의 인간창조 이야기는 가정을 꾸리지 않는 자들의 운명을 설명하고 있다.
당시에 샘핫과 같이 몸을 파는 여성들은 신성한 직업을 가진 이들로 떠받들어졌다. 이런 여성들이 여러 명의 ‘남편’과 몸을 섞는 것은 단순히 이난나 여신의 대역을 하기 위해서 행한 일이 아니었다. 바그다드 동남쪽에 있는 니푸르에서 발견된 점토판에는 이런 ‘신성한 매춘’이 행해지는 동안 불렀을 것으로 추정되는 노래가 기록되어 있다.
그녀의 벗은 몸에서 60명이 안식을 얻었네. 젊은이들은 지친 기색이 역력했으나, 여신은 전혀 피곤해하지 않았다네.
사원뿐만 아니라 선술집에서도 울려 퍼졌을 이 노래에 담긴 의미는 놓칠 수 없는 것이었다. 고대 그리스의 역사학자 헤로도토스는 『페르시아 전쟁사』에서 바빌로니아 여성들이 신성한 기운을 받기 위해 일생에 적어도 한 번은 아프로디테 여신의 신전 앞뜰에 앉아 있다가 지나가는 낯선 남자와 성관계를 가졌다고 기록했다. 부정확한 기록이기는 하지만, 그리스의 사랑의 여신과 수메르의 이난나, 바빌로니아의 이슈타르 같은 고대 메소포타미아 지역 여신들 간의 관계를 암시했다는 점에서는 의미가 있다. 헤로도토스가 『페르시아 전쟁사』에서 언급한 여신 중 아프로디테와 가장 가까운 여신으로는 키프로스인이 숭배하던 고대 페니키아의 여신 아스타르테(바빌로니아의 이슈타르)가 있다.
헤로도토스는 “키프로스 섬 거주민들이 바빌론의 이런 풍습을 따랐다”고 기록했다. 키프로스는 아프로디테가 탄생한 섬이다. 키프로스의 짙푸른 바다에 떨어진 우라노스 신의 남근에서 나온 거품 속에서 그리스의 사랑과 미의 여신이 탄생한 것이다. 애매하지만 우라노스 신이 아프로디테의 아버지인 셈이다. 남근에서 태어난 여신의 존재에서 이난나・이슈타르・아스타르테가 유럽에 미친 영향을 짐작해볼 수 있다.
수메르인이 고대 서아시아뿐만 아니라 고대 그리스에도 상당한 영향을 미쳤다는 사실에 대한 연구가 이뤄진 건 극히 최근의 일이다. 특히 그리스 신들의 조상 오케아노스와 테티스 부부 신화의 내용은 바빌로니아의 창세 서사시 『에누마 엘리시』를 그대로 옮겨놓은 듯하다. 『에누마 엘리시』는 네부카드네자르 1세 치세 하에 기록된 바빌로니아의 창세 서사시로 천지창조 이전에 벌어진 신들의 전쟁에 관한 이야기를 담고 있다. 모든 신들의 어머니 티아마트는 자신의 잘린 신체에서 신들을 탄생시킨다. 마르두크도 티아마트의 자손이다. 불어난 신들 때문에 골치가 아파진 티아마트는 신들을 멸망시키려 한다. 티아마트와 그녀의 자녀들 사이에 처절한 싸움이 시작되었고, 결국 마르두크가 티아마트를 죽인다. 마르두크는 모든 신들의 존경을 받으며 ‘최고신’이 된다. 그리고 신들이 마르두크에게 선사한 50개의 영광스런 이름을 나열하는 것으로 이 서사시는 끝을 맺는다. 이 서사시는 “그때 높은 곳에서는”이라는 말로 시작된다. “그때 높은 곳에서”를 바빌로니아어로 말하면 바로 이 서사시의 제목인 『에누마 엘리시』가 된다. 이 서사시의 첫머리를 살펴보자.
그때 높은 곳에서는 아직 하늘의 이름이 없었고 아래에는 딱딱한 땅의 이름이 없었다. 아무것도 없었고 단지 태고의 단물 아프수, 그리고 모든 것을 품고 있던 쓴물 티아마트가 있었으며, 그들의 물은 하나로 섞여 있었다. 아직 초원이 생겨나지 않았고, 갈대도 없었으며, 습지도 없었다. 어떤 신도 나타나지 않았고 아무도 이름이 없었다. 그리고 어떤 운명도 정해지지 않았다. 그때 그들 중에서 신들이 태어났다.
쓴물의 여신 티아마트와 마찬가지로 바다를 관장하는 그리스의 여신 테티스는 남편 오케아노스와 세상 끝에서 살고 있었다. 오케아노스는 테티스 여신의 오빠이자 남편으로 지구를 둘러싼 모든 바다를 다스리는 신이다. 테티스에 대해서는 이 이상 알려진 바가 없었으므로 그리스인은 이 여신을 열렬히 숭배하지는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