범아랍 민족주의자들은 대중의 감성에 호소했다

 

 

 

 

중동에서 적용할 수 있는 민주정치를 도입하는 것은 초기 이슬람 진보주의의 관심사였다. 19세기, 유럽으로 건너간 아랍 무슬림 진보주의자들은 프랑스 민주정치에서 귀감을 얻었다. 첫 사례로는 프랑스에 살면서, 이슬람법과 대립되지 않는다면 서방세계의 문화를 차용해도 된다고 주장한 개혁자 리파아 알타타위를 꼽을 수 있다. 이에 동조한 아랍 무슬림은 진보적이면서도 종교에는 관심이 없었다. 그들은 민주정치와 샤리아가 양립할 수 없다는 점을 확신한 탓에 샤리아를 전면 폐지했다.
이슬람세계에 민족국가54가 형성되었던 20세기 중엽, 탈식민화에 이어 민주정치를 구현하려는 노력이 대두되었다. 이집트와 시리아 및 이라크의 아랍 무슬림 엘리트는 의회 민주정치 제도를 구성함으로써 근대화라는 난제에 봉착했다. 식민지 시대에도 이를 접해본 적은 있다. 이 같은 민주주의 전통이 잔재해 있는 곳은 민주정치가 이슬람주의 당인 헤즈볼라의 위협을 받고 있는 레바논뿐이다. 다른 국가의 민주정치는 기틀이 뿌리를 내리지도 못한 데다, 이집트의 나세르와 시리아 및 이라크의 바스당과 같은 민족주의 군사정권에 자리를 내주고 말았다. 범아랍 민족주의자들은 대중의 감성에 호소했으나, 아랍 국민들에게 낯설다는 이유로 민주정치는 포기했다. 군부의 대중 영합주의적인 통치는 다당제를 채택하는 민주정치의 부패를 척결할 수 있는 대안으로 떠올랐다. 세속적인 범아랍 포퓰리즘 민족주의 이데올로기는 국민의 통합을 강조하면서도, 아랍국가의 분열을 조장한다는 이유로 다원주의와 다당제는 배격한다. 민주정치를 대놓고 거부하지 않는 쪽은 통합에 기반을 둔 특정 아랍 민주정치를 지지하나, 이는 아랍
의 진정성이라는 미명하에 내세우는 기만에 불과하다.
민주정치가 실패한 원인은 서양인들의 음모가 아니라 미개발의 결과로 봐야 한다는 것도 주목해야 한다. 개발에는 경제적인 문제뿐 아니라 제도 및 문화적인 개발도 포함되어야 한다. “개발도상 문화” 는 이슬람세계에 민주정치를 확립하는 데 매우 중요한 개념이다. 무슬림 진보주의자들은 민주주의 문화와 개인의 인권을 정립하지 못했다. 알카라다위는 실패한 민주정치의 책임을 외부 열강에 전가하여 아랍국가를 피해자로 설정하고, 민주정치를 폐기처분하기 위해 이를 지적했다.
세속 민족주의자들은 (이를테면 이라크와 팔레스타인에서) 민주화라는 허울 아래 샤리아를 부활시키려는 이슬람주의자들로 대체되고 있다. 앞서 밝힌 바와 같이, 1967년의 6일전쟁에서 세속 민족주의 정권이 당한 굴욕은 아랍세계 전체에 자신감의 위기로 이어졌고, 결국에는 환멸감에 빠진 아랍 지식층이 주창한 “계몽” 의 물꼬가 트이게 되었다.57 그들은 전례가 없던 자아비판까지 했다. 그러나 이 같은 노력은 오래가지 않았다. 알카라다위가 이슬람교식 해결책으로 규정한 것은 지식층이 뿌린 계몽의 씨앗에 독을 주입하는 선동적인 이데올로기가 되었다. 오늘날 정치적 이슬람교는 아랍세계 중 실세가 아닌 곳에서도 으뜸가는 정치세력으로 꼽힌다. 2003년 이라크를 침공한 미국은 잔존해 있던 가장 유력한 민족주의 정권을 제거해버렸다. 그러자 이슬람주의 조직들은 민주화 실험의 일환으로 권력을 위해 제도적 방편을 채택하기 시작했다. 이라크에서는 정권교체가 민주화와 동의어는 아니었다. 민주정치는 보편적이긴 하나 현지의 형편과 문화적 특수성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그런데 이슬람주의자들은 민주정치의 보편적 가치관을 배격하며 진정성의 일환으로 특수성을 합법화했다.
순결의 문화적 토대라는 진정성(알아살라)은 진보적인 실험을 폐기하는 구실이 된다. 그러고 나면 그들은 민주정치의 이름으로 샤리아를 재도입해야 한다고 주장할 것이다. 이는 민주정치와 개인의 인권과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국가질서인, 이슬람의 샤리아에 기초한 국가(다울라 이슬라미야)를 확립하는 데 보탬이 되기 위한 수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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