급진주의자들의 반응: 의무와 자선의 폐지

물론 이 주장은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다시 귀를 기울이면 급진주의자들은 다음과 같이 주장한다. 무엇보다도, 잘 알려졌듯이 스스로 어떻게 행동할지 선택하는 권리가 우리에게 있다 해도, 사정에 따라 그러한 권리 역시 제약받을 수 있다. 다시 말해서, 권리를 절대적으로 보는 건 바람직하지 않다. 굶어 죽어가는 사람들에게 시급히 필요한 것보다 자유로운 선택의 권리가 과연 더 중요한지를 생각해야 한다. 급진주의자들은 한 걸음 더 나아가 도대체 이 권리가 무엇인지 의문을 제기한다. 결국, 이 권리란 것은 잘사는 사람들이 곤경에 빠진 사람들을 돕지 않아도 된다고 주장하려고 만들어놓은 하나의 방편이 아닐까? 이런 가상의 권리란 고작 부유한 나라들이 제 가진 것을 움켜잡고 그것이 절실히 필요한 나라들과 공유하기를 거부하려고 고안해낸 산뜻한 도구가 아닐까?(이 대목에서 지적할 점은 권리와 자율을 내세우는 이론이 주로 산업화한 서방국가에서 나왔다는 사실이다)
두 번째 대응논리가 어디로 귀착하는지를 보면, 급진주의 견해와 톰슨의 견해는 도덕적 사고의 출발점이 다르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톰슨의 견해는 인간이 자율의 권리를 지녔다는 가정에서 출발한다. 어떻게 행동할지를 자유롭게 선택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미 살펴본 바와 같이, 이런 자유를 보전하고 유효하게 행사하려면 도와달라고 요청하거나 도와주라고 강제하는 범위를 한정해야 한다. 달리 말하면, 톰슨의 이론은 도움을 제공한 결과로 빚어질 심각한 해악을 방지해야 하며, 따라서 그러한 해악을 감당할 의무를 일정 범위로 제한해야 한다는 결론으로 나아간다. 이러한 책임을 부정적 책무라 하는데, 우리가 무엇을 행한 결과에서 오는 부담이 아니라 무엇을 행하지 않은 데서 뒤따르는 부담이다. 우리가 순전히 부정적인 책임만을 진다면, 어떻게 행동할지 스스로 선택할 여지는 완전히 사라져 버린 채 오직 도움을 구하는 이들에게 휘둘리며 살아야 할 것이다. 곤경에 빠진 사람들에게 무엇을 더 제공해야 할지만을 늘 생각해야 할 것이다. 이것은 끝없는 가시밭길이 될 것이다. 그리하여 톰슨의 견해는 우리가 어떤 특정 종류의 행동, 즉 살인, 절도, 강간 등을 하지 않도록 요구할 수 있고, 이를 어기려 할 때 그런 행위를 해서는 안 된다는 적극적인 책임을 지고 있음을 인정하는 반면, 다른 한편으로는 우리의 부정적 책임, 다시 말해서 도울 수 있는 데도 돕지 않았기에 져야 할 책임에도 한계를 설정해놓는다.
급진주의자라면 서구 사람들의 자기 배 쓰다듬기라고 할 톰슨의 결론에 실망한 나머지 톰슨의 출발점 자체가 잘못됐다고 지적할 것이고, 톰슨처럼 부정적 책임을 거부하는 대신에 (혹은 부정적 책임을 오직 제한된 형태로만 받아들이는 대신에) 부정적 책임이론을 받아들이려 할 것이다. 또 가장 곤경에 처한 사람들의 시급한 욕구가 충족될 때까지 도와야만 한다고 말할 것이다. 자신이 마땅히 져야 할 책임을 벗어나려고 자유로운 선택을 구실로 내세워서는 안 된다고 주장할 것이다. 한편 톰슨의 견해는 의무와 자선을 엄격히 구분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중 하나는 우리가 의무나 권리에 따라 마땅히 도와야 하는 경우이고, 다른 하나는 ‘의무상의 요구를 뛰어넘어’ 자발적으로 돕는 경우인데 이를 실행할 때에 칭찬을 듣거나 심지어 성스럽게 비칠 수 있다 하더라도 반드시 실행하도록 요구할 일은 아니란 것이다. 톰슨은 이러한 구별이 우리가 어떻게 행동할지, 스스로 결정하는 자유의 영역을 지키는 데 필요하다고 주장한다. 한편 급진주의자들은 이렇듯 권리와 자유의 영역을 내세우는 주장이 단순히 자기 이익만을 지키고 빈곤한 사람들의 요구를 제쳐놓기 위해 고안된 하나의 도구일 뿐이라고 지적한다. 급진주의자들은 이러한 구분을 폐지하라고 주장하면서 다른 사람들이 곤경에서 벗어나 우리처럼 살 수 있게 될 때까지 우리에게 지워진 의무를 다해야 한다고 역설한다. 피터 싱어도 자신의 논문 「기근, 풍요, 그리고 도덕Famine, Affluence and Morality」에서 똑같은 주장을 제기했다. 싱어는 톰슨이 내세우는 바와 같은 우파적인 견해를 배격하는 동시에 선을 최대화하고 고통을 최소화해야 한다는 공리주의 견해를 지지하면서, 도덕의 참 원칙은 앞서 살펴본 원칙, 곧 비용이 적게 드는 한, 남을 도울 의무가 있다는 원칙이 아니라 훨씬 더 광범한 원칙, 곧 도움을 제공하는 데 따르는 희생이 도움을 제공한 결과로 실현될 선보다 중요하지 않다면, 도움을 제공해야 한다는 원칙이라고 주장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