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동파蘇東坡의 물부충생物腐蟲生

 

 

 

물부충생物腐蟲生은 '생물이 썩은 뒤에 벌레가 생긴다'는 뜻으로, 사람을 의심하고 나서 헛소문을 믿는 것을 말한다. 북송北宋의 시인 소동파蘇東坡가 지은《범증론范增論》에 나오는 다음 구절에서 유래한 성어成語이다.

소동파는 "생물은 반드시 먼저 썩은 뒤에 벌레가 생기고物必先腐也而後 蟲生之, 사람도 반드시 먼저 의심을 하게 된 뒤에 남의 모함을 듣는다人必先疑也而後 讒入之"고 함으로써 항우項羽에게 버림받은 범증范增을 묘사하였다.

 

 

진秦나라 말년, 진시황이 죽고 2세 황제가 즉위하자, 곧 반란이 터졌다. 범증은 이때 반란을 일으킨 항량項梁의 모사謀士였는데, 항량이 죽자 유업을 물려받은 항우項羽(기원전 232∼기원전 202)의 모사가 되었다. 항우는 "힘이 항우장사"라는 말이 생길 정도로 천하제일의 장사였다. 그러나 항우의 지략智略은 그의 힘이나 용맹에 미치지 못하였다. 범증은 아직 항우에 미치지는 못하나 날로 세력이 커 가는 유방劉邦(기원전 247?∼기원전 195)을 크게 경계하였다. 그야말로 항우의 최대 적수임을 간파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자신을 과신한 항우는 유방 정도는 크게 신경 쓰지 않았다. 범증은 몇 번이나 유방이 더 크기 전에 없애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겨우 항우의 승낙을 받은 범증은 유방을 홍문鴻門의 연회에 초대하여 제거할 만반의 계책을 세웠다. 그러나 연회에 참석한 유방의 공손한 태도에 마음이 오락가락한 항우가 끝내 유방을 죽이기로 한 범증과의 약속을 모른 척 하여 유방은 구사일생으로 살아 돌아올 수 있었다.

극적으로 살아 나온 유방은 범증이 있는 한, 항우를 꺾기 어려움을 절실히 깨달았다. 유방은 각지에 첩자를 풀어 범증에 대한 나쁜 소문을 퍼뜨려 항우가 범증 사이를 이간시키려 했다. 결국 여기에 말려든 항우는 범증에 대한 소문을 믿고 멀리하기 시작했다. 견디다 못한 범증은 항우의 곁을 떠나, 오래지 않아 병이 들어 쓸쓸히 죽었다. 항우 역시 유방에 패하여 사랑하는 여인 우희虞姬와 군사를 모두 잃고 스스로 목숨을 끊는 비참한 말로를 맞을 수밖에 없었다.

후일 소동파 소식蘇軾은 범증이 항우의 곁을 떠난 시기가 너무 늦었다고 생각하며, "생물은 반드시 먼저 썩은 뒤에 벌레가 생기고, 사람도 반드시 먼저 의심을 하게 된 뒤에 남의 모함을 듣는다"고 함으로써 항우에게 버림받은 범증을 묘사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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