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 번째 문명: 수메르

고대 아시아가 비밀의 베일을 벗은 건 극히 최근의 일이다. 면면히 이어져온 고대의 기록을 신주단지처럼 간직해온 유일무이한 제국인 중국을 제외하면 말이다. 아시아 대륙의 다른 나라들은 고고학자들이 오래된 문명의 자취를 발견해줄 때까지 그저 넋 놓고 기다리는 수밖에 없었다. 고고학자들의 손길은 태곳적에 아시아를 지배했던 이들이 남긴 흔적에 쉽게 닿지 않았다. 현대에 와서야 아시아의 고대유적들이 비로소 하나둘 세상 밖으로 그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한 것이다.
한 세기 반이라는 오랜 세월에 걸친 끈질긴 발굴 끝에 드디어 인도뿐 아니라 서아시아의 잃어버린 문명이 빛을 보게 되었다. 특히 북부 이라크 모술 근방의 고대 니네베 유적지의 한 고분에서 아시리아 왕가의 서고가 발굴된 건 기념할 만한 수확이었다. 최초의 문명, 그 놀라운 비밀을 꼭꼭 숨기고 있던 보물창고의 문이 열린 것이다. 인류는 이 서고에서 발견된 문서들 덕에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문명의 발상지에 한 발짝 더 다가갈 수 있었다. 인류 최초의 문명은 수메르인의 손에 의해 이곳에서 태동했다. 기원전 612년에 멸망한 니네베보다 무려 2000년 전에 세워진 세계에서 제일 오래된 도시에서 말이다. 참고로 니네베를 멸망시킨 건 신바빌로니아인(칼데아인)과 이란 종족의 일파인 메디아인 연합군이었다. 아시리아 최후의 도시 몰락으로 서아시아의 고대 역사는 막을 내렸다. 그 뒤를 이은 건 소아시아 전체를 차지한 강대한 대제국 페르시아였다.
왕궁 서고에서 발견된 문서의 해독에 세인의 이목이 집중되었다. 문서는 대부분 메소포타미아를 지배한 고 왕조 시대의 수메르인에 관한 것이었다. 가장 큰 반향을 일으킨 건 1872년에 발굴된 점토판이다. 이 점토판에는 수메르에서 가장 오래된 서사시가 새겨져 있었다. 그리고 기나긴 세월 진흙과 먼지 속에 파묻혀 있던 고대의 기록에서는 누구도 예상치 못한 이야기가 흘러나왔다. 바로 바빌로니아 대홍수에 관한 것이었다. 이 서사시에는 수메르판 노아라 할 수 있는 영웅 아트라 하시스가 등장한다. 그는 대홍수에 휩쓸린 세상을 구한다. 성서의 내용과는 달리 수메르의 대홍수는 인간의 죄업 때문에 일어난 것이 아니었다. 엄청나게 불어난 수의 인간이 내는 소음을 더 이상 견딜 수없었던 수메르의 신들은 온 세상을 물로 쓸어버리기로 결심한다. 특히 도통 잠을 이룰 수 없었던 하늘의 신 엔릴은 세상에 넘쳐나는 사람들의 수를 줄이기 위해 전염병・기아・홍수를 인간세상에 보낸다. 다행히 인간이 몰살되는 것을 그냥 두고 볼 수 없었던 물의 신 엔키가 아트라 하시스에게 인류 최후의 재난이 다가오고 있음을 알리고 우여곡절 끝에 아트라하시스가 인류의 멸망을 막아낸다.
1920년대에 인더스 계곡에서도 고대유적 발굴이 진행되었다. 인더스 강 하류의 신드 지역에서는 모헨조다로 도시유적이, 펀자브 서부에서는 하라파 도시유적이 발굴되었다. 세계 고대문명 역사의 판도를 바꾸는 획기적인 발견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이 발굴은 메소포타미아 유적의 발굴 당시에 비하면 그다지 큰 호응을 불러일으키지는 못했다. 인더스 문명의 문자를 끝내 해독해내지 못했기 때문이다. 인더스 계곡에서 발견된 유적들은 이곳에 놀라운 고대도시를 건설한 수메르 문명과 바빌론 문명의 존재를 만천하에 드러냈다. 오랫동안 인더스 계곡의 토착민으로 살면서 남다른 생활양식으로 최초의 문명사회를 일군 사람들의 존재도 함께 말이다. 저 먼 동방의 땅 중국에 문명국가가 자리 잡은 건 한참 뒤의 일이었다. 중국 대륙에서는 기원전 1650년경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최초의 왕조인 상商나라가 중국 북부 평원에 둥지를 틀었다. 인더스 문명의 영고성쇠가 끝나고도 한 세기가 더 흐른 뒤에 말이다.
인더스 계곡의 고대도시에서 발견된 유물들에 기록된 문자를 해독할 수는 없었지만, 학자들은 인더스 문명이 아시아 대륙의 종교에 큰 영향을 미쳤다는 중요한 사실을 발견했다. 인더스 문명은 아리아인의 철기문명에 의해 멸망했다. 하지만 이 고대문명은 은밀한 방식으로 침략자 아리아인에게 복수했다. 아리아인이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자신들이 침략한 인더스 문명이 품고 있던 사상에 홀린 듯이 매료되었던 것이다. 아리아인은 인더스 문명에서 널리 시행된 세정의식洗淨儀式을 그대로 흡수했을 뿐만 아니라 신성한 요가에도 푹 빠져버렸다. 아리아인은 이 금욕운동이 신성한 계시를 받는 현자에게 특별한 능력을 부여해준다고 믿기 시작했다. 인더스 계곡에서는 뿔 달린 신이 요가 자세를 취하고 있는 모양이 새겨진 인장들도 발견되었다. 요가를 하는 뿔 달린 신의 정체는 현재 힌두교의 최고신으로 받들어지고 있는 시바이다. 인더스 계곡에서 태어난 시바가 호전적인 아리아인의 인드라 신을 무찌르고 힌두교 최고신의 자리를 차지한 것이다. 인더스 계곡을 공격한 아리아인에게 승리를 안겨준 ‘파괴의 신’ 인드라가 인더스 계곡 출신 요가족에게 밀려나고 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