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리에 있어 급진주의자들의 주장

 

 

 

 

 

급진주의자들의 주장에 대한 몇 가지 반응을 더 살펴보자. 윤리학을 연구하는 사람이 가장 주목할 만한 것은 상황적 도덕에 관한 급진주의 이론에 의문을 제기하는 반론이다. 두말할 나위 없이, 급진주의 이론가들의 도덕적 주장은 연못가에 서 있던 어른의 사례에 초점을 맞춘다. 그러므로 급진주의적 견해에 이의를 제기하려는 사람 역시 우선 이 사례에 초점을 맞춰야 한다. 급진주의 이론가들의 주장에 대응하는 전략은 두 가지로 생각할 수 있다. 먼저, 연못가의 어른이 도움을 제공하지 않은 것을 정말 나쁘다고 봐야 하느냐란 의문이다. 둘째로는 설령 그 어른이 정말 나빴다 하더라도 그 어른이 놓인 상황이 지금 우리가 놓인 상황과 같다고 할 수 있느냐란 의문이다. 그렇다면 이제 급진주의적 견해에 대한 반론을 다음과 같이 고찰해볼 수 있다.
첫 번째 반론: 죽어가는 사람의 바로 옆에 서서 구경만 하는 것과, 보이지 않는 지구의 반대편에서 사람들이 죽어간다는 소식을 듣는 것은 많이 다르다. 연못가의 어른은 어린이의 목숨에 냉담했다. 하지만 개발도상국에서 죽어가는 사람들의 이야기는 훨씬 간접적으로 들려온다. 신형 오디오나 유명 디자이너의 의상을 구입하는 데 돈을 쓰면서 옥스팜11에는 돈을 기부하지 않는다 해도, 연못에 빠져 허우적거리는 어린이를 못 본 체하고 지나치는 것과 똑같은 냉혈이라고 할 수는 없다.
두 번째 반론: 급진주의 이론가들은 사치품을 구입하는 데 돈을 쓰면서 옥스팜에 기부하지 않는 것이 굶주리는 사람들의 목숨보다 자신의 사치품을 더 중히 여기는 일이라고 비난한다. 그러나 이 상황에서는 매우 중요한 것 한 가지를 고려해야 한다. 그 돈을 내가 벌었다는 사실이다. 그 돈은 내 것이므로 내 맘대로 써도 된다. 물론 돈을 기부하면 나는 더 착한 사람이 될 것이고, 또 자선을 하는 건 바람직한 일일 것이다. 그러나 내가 번 돈을 어떻게 쓰든지 그건 온전히 나의 자유다.
세 번째 반론: 돈을 기부하지 않는 것이 사람을 죽이는 것과 똑같이 나쁜 건 아니다. 살인은 무고한 목숨을 일부러 빼앗는 짓이다. 거기에는 죽이는 행위가 있어야 한다. 급진주의 이론가들은 죽이는 행위와 죽게 내버려두는 행위를 혼동한다. 돈을 기부하지 않는 것은 살릴 수 있는 사람들을 죽게 내버려두는 결과를 초래한다. 그렇지만 죽게 내버려두는 것이 반드시 사람을 직접 죽이는 것만큼 나쁘다고는 할 수 없다.
이 장의 나머지 부분에서는 두 번째와 세 번째 반론이 제기하는 문제들을 살펴보려 한다. 그에 앞서, 첫 번째 반론에서 시작된 논쟁이 어떻게 진행되는가를 간단히 살펴보자. 먼저 급진주의자들은 첫 번째 반론에 타당성이 없다고 주장하면서 자신들의 견해를 변호하려 할 것이다. 멀리 있는 생명이라고 가치 없다고 말할 수는 없다. 심리학적으로 보면 가까이에서 일어나는 비극을 더 절박하게 느끼는 건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이런 심리적 성향을 상황의 도덕과 혼동해서는 안 된다. 인간의 생명은 비할 데 없이 귀중한 것이다. 따라서 그에 깃든 가치를 존중하고 보호해야 한다면, 마땅히 인종, 색깔, 신앙 따위를 가리지 않고, 또한 고난에 빠진 사람들이 어느 나라에서 태어났는가에 상관없이, 모든 인간에게 똑같은 의무를 지워야 한다. 방글라데시에서 태어나 곤경에 처한 사람보다 캐나다나 프랑스에서 태어나 곤경에 처한 사람에게 더 큰 도움을 주어야 할 까닭이 무엇일까?
이에 대하여, 첫 번째 반론을 내세우는 사람들은 할 말이 많을 것이다. 먼저 인간의 생명이 지닌 가치는 평등한 것이기에, 어디서 살든지 모든 인간에 대하여 우리가 똑같은 기본 의무를 져야 한다는 급진주의자들의 주장이 옳다는 것은 인정할 것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하더라도 모든 사람을 똑같이 도와줄 의무가 있는 것은 아니다. 우리가 지상의 모든 인간에게 어느 정도의 의무를 지고 있음은 사실이지만, 우리에게는 친구, 가족, 학생, 선생님, 고용주, 피고용자, 그리고 더불어 살아가는 수많은 시민들이 있지 않은가? 본래 나와 특별한 인연도 없이 멀리서 굶고 있는 가난한 사람들보다는 곁에서 살아가는 친구와 가족, 동료 학생들과 선생님 같은 사람들을 먼저 도울 의무가 있고 나아가 그럴 권리가 있다는 것은 지극히 자연스러운 생각이다. 어디서 살든 모든 인간을 똑같이 대해야 할 기본 의무를 진다는 급진주의자들의 주장이 옳기는 하지만, 그런 식의 의무만 지는 것은 아니다. 급진주의자들은 우리가 너무 이기적이어서 굶주린 사람들의 이익보다는 자기 이익을 앞세운다는 식으로 나쁜 그림을 그려낸다. 하지만 실상은 그 그림보다 훨씬 복잡하다. 가까이 있는 사람들의 문제를 더 심각하게 생각하는 것은 비단 심리적 성향의 문제만은 아니다. 이것이야말로 상황의 도덕을 제대로 이해한 데서 나오는 태도다. 가족, 친구, 선생님과 학생처럼 가까운 이들과 맺어진 특별한 관계에서 가장 핵심적인 부분은 이들을 위해 우리의 시간과 자원을 쓰는 일이다. 우리에게 특별한 관계가 전혀 없다면, 우리의 삶은 의미를 잃고 만다. 이러한 터에, 굶주린 사람들을 위해 많은 자원을 퍼붓는 것이 정말 필요한 일일까? 아무리 양보하더라도 극심한 곤경에 처한 사람들이 필요로 하는 것과 특정한 관계를 맺은 사람들이 필요로 하는 것의 균형을 찾아야 할 터인데, 급진주의자들은 이를 옳게 헤아리지 못한다.
이렇게 시작된 논쟁은 더 발전할 여지가 있다. 예컨대, 급진주의자들은 곁에 있는 사람들과 더불어 우정을 나누고 공동체를 가꾸어나갈 특별한 의무가 우리에게 지워진 건 사실이지만, 이런 생각은 단순히 우리 문화와 사회에 폭넓게 깔린 사고방식을 반영하는 것일 뿐이라고 주장할 것이다. 다른 문화와 다른 시대에 사는 다른 사회의 사람들은 친구와 우정에 대하여 우리와는 전혀 다른 개념을 지녔을 터이다. 그러므로 가족이나 우정에 대한 우리의 관념을 보편적인 것으로 보아서는 안 된다. 친구나 가족을 향한 충심의 관념은 부자를 늘 부자로 살면서 불운한 사람들을 그냥 무시해 버리는 실질적인 효과를 가져오므로 특히 그러하다. 가까이에 있는 사람들을 우선시하는 도덕 관념은 우리가 가지고 있는 것을 지키기에 연연하면서 궁핍한 사람들에게 등을 돌리는 태도를 정당화한다. 이것이야말로 탐욕적인 우리 사회, 곧 전형적인 자본주의 사회(‘각자가 자신만을 위하고’, ‘제 살길만 찾으면서 남을 거들떠보지 않는’ 사회)가 빚어낸 결과물이라고 급진주의자들은 주장할 것이다. 정작 문제는 빈곤한 사람들을 먼저 돌봐야 한다는 급진주의 관점에 있는 게 아니라 우리 사회에 깊이 뿌리박은 사고방식에 있는 게 아닐까? 이 논의는 일단 여기서 접기로 하고, 급진주의 견해에 대한 두 번째, 세 번째 반론을 살펴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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