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덕은 우리에게 남을 도울 의무를 얼마나 요구하는가

 

 

 

 

 

지금 세계는 심각한 불평등으로 속을 끓이고 있다. 어떤 나라 사람들은 기본 욕구를 충족하며 잘 사는가 하면, 다른 나라에서는 생존을 위해 심각한 투쟁을 벌인다. 어떤 나라에서는 식량이 남아돌아 버리다시피 하지만 다른 나라 사람들은 굶어 죽는다. 어떤 나라에서는 죽지 않아도 될 어린이가 병으로 죽었다는 소문이 돌자 공무원이 사표를 써야 하는데 반해, 다른 나라에서는 어린이의 사망이 일상사와 다름없다. 참으로 불안한 정경이다. 필자와 이 책을 읽는 여러분들은 그래도 안락하게 살고 있지만, 세계의 다른 구석에서는 비상사태가 연일 일어나고 있다.
이 장에서 다루려는 문제는 우리에게는 어느 범위까지 남을 도와줄 의무가 있는가에 관한 것이다. 현실을 돌아보면 우리는 상대적으로 남을 돕기 위해 하는 일이 거
의 없다. 개인의 수입 가운데 기부나 자선에 쓰는 비율은 대체로 낮은편이다. 부유한 나라의 지출을 보면 가장 관대한 나라라 하더라도 국제 원조와 개발에 들이는 돈은 그 나라 전체 부의 일부분에 지나지 않는다. 이러한 실상을 어떻게 보아야 할까? 다른 사람들이 죽어갈 때 도와줄 능력이 있는데도 마냥 바라보고만 있는 건 아닐까? 아니면 각 나라는 스스로 제 살길을 찾아 나서야 마땅할까?
이 장의 첫 대목에서는 세계적 빈곤문제와 빈곤한 나라에 대한 우리의 의무를 살펴보려 한다. 이와 관련한 원칙들을 찾아가는 과정에서 낙태나 그 밖의 관련 문제들에 관해 더 깊이 생각해볼 기회를 가질 것이다. 기본 관심사는 우리와 더불어 살아가는 인류를 대하는 기준이 무엇이어야 하느냐에 있다.

 

● 세계적 빈곤: 급진적 견해
세계적 빈곤은 어느 정도로 심각할까? 토머스 포지9가 인용한 최근 통계는 다음과 같다. 세계 인구 60억 가운데,

 

◆ 7억 9천만 명이 영양실조
◆ 10억 명이 안전한 물을 공급받지 못함
◆ 24억 명이 기본 위생시설을 이용할 수 없음
◆ 8억 8천만 명이 기본 건강서비스를 받지 못함
◆ 10억 명이 적당한 주거시설을 이용하지 못함
◆ 20억 명이 전기공급을 받지 못함1)

부유한 나라와 빈곤한 나라의 격차가 클 뿐 아니라 수백 수천만 명이 말도 안 되는 여건에서 살고 있다. 이렇게 살다가 죽는 사람도 부지기수다. 아이들은 성인이 되어 자립해보기도 전에 죽는다. 많은 나라의 사람들이 서른 살을 넘기기가 어렵다. 이런 상황에서 우리의 의무는 무엇일까? 먼저 무척 단순하면서 급진적인 한 가지 견해부터 살펴보자. 충분히 구할 수 있는 사람들이 죽어가는 것을 팔짱만 낀 채 바라보는 건 옳지 않다. 우리에게는 많은 사람들을 구할 수 있는 자원이 있다. 쉽게 말해서 식량을 산더미처럼 쌓아 놓고 낭비하고 있다. 우리에게 부족한 것은 세계적 고민을 풀어보려는 정치적 의지뿐이다. 부유한 자본주의 국가에서 세금을 올려 빈곤한 나라에 상당 규모의 돈을 제공하겠다는 정당은 결코 선거에서 승리하지 못한다. 하지만 조금만 생각해보면, 돕지 않으려는 자세는 정당화될 수 없다. 도울 수 있는데도 돕지 않는 것은 그들을 죽이는 것과 다름없기 때문이다. 그것은 나쁜 일이다. 연못에 빠진 아이가 허우적거리며 물로 빠져 들어가는 것을 어른이 바라보고만 있는 광경을 상상해보라.
물에 들어가 팔만 뻗어주면 되는데도 옷을 더럽히지 않으려고 그냥 바라보기만 한다. 그 사람을 비난하지 않을 사람은 없다. 어른이 아이를 빠뜨려 죽인 것은 아니라 해도, 사실상 죽인 거나 다름없다고 누구나 생각할 것이다. 가난한 나라 사람들에 대한 우리의 행태가 이보다 낫다고 할 수 있을까? 옷을 적시지 않으려고 어린이를 구하지 않았다. 그의 행태를 나쁘게 볼 수밖에 없는 것은 이 때문이다. 그런데 우리의 부를 축내지 않으려고 바라보고만 있다면 어른의 행태보다 더 나은 걸까?
우리는 여러 가지를 누리며 안락하게 사는 것을 가난한 사람들의 목숨보다 더 중히 여긴다. 연못가의 어른과 우리가 보여주는 행태가 다르다 할 수 있을까? 이렇게 볼 때 우리의 자세는 분명히 옳은 것이 아니다.
이 장에서 풀어보려는 과제 중 하나는 이 불안정한 급진적 견해가 정말 정당화될 수 있는가다. 먼저 급진적 견해가 퍼부어대는 비난에 대한 몇 가지 반론들을 살펴보자. 여기서 필자가 고려하지 않으려 하는 점 한 가지를 먼저 밝혀야겠다. 급진적 견해를 옳은 것으로 받아들이기에 앞서 시급히 해결해야 할 문제는 도움을 주기 위해 무엇을 해야 할 것인가다. 연못가의 어른이 아무것도 하지 않고 구경만 한 것은 충격적이고, 부분적으로는 그가 나쁜 사람이라고 할 수 있다. 도움을 주는 방법을 아는데도 내버려뒀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우리가 세계적 빈곤의 경우와 연못가의 예를 똑같은 것으로 보아야 할는지는 여전히 의문이다. 이는 기술적 문제이므로 여기서는 깊이 다루지 않으려 한다. 이 문제를 풀려면 철학자보다는 경제학자나 정치학자의 지식이 필요하다.
그래서 이 문제는 논외로 한다. 그렇더라도 세계적 빈곤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고 보는 이른바 낙관론자들과 해결할 수 없다고 보는 비관론자사이에는 논쟁이 진행 중임을 알아두어야 한다. 잘 알려진 비관론자들 가운데는 대체로 토머스 맬서스10의 이론을 추종하는 사람들이 많다 .
18세기 경제학자 맬서스는 굶주림은 도덕적 위기의 문제와는 상관없이 인구의 팽창을 억제한다고 주장했다. 맬서스를 추종하는 이론가들은 아사를 방지하려는 노력이 오히려 좁은 땅에 인구를 늘려 더욱 지탱하기 어려운 상태에 빠져들게 할 뿐이라고 주장했다. 인구가 늘면 이들을 먹여 살릴 길이 없으니 굶주림을 해결하려는 노력은 언젠가 닥쳐올 수밖에 없는 큰 재앙을 연기하는 데 지나지 않는다고 했다. 무엇보다 인구가 늘어감에 따라 더는 지탱할 수 없는 사태가 반드시 오고 만다는 것이다. 이미 언급했듯이 나는 낙관론과 비관론 사이에 있는 논쟁을 현명하게 중재할 처지가 아니다. 한편 급진주의자들은 장래에 더 심각한 인구문제를 가져오지 않으면서도 빈곤문제를 퇴치할 길은 분명히 있다고 주장하는데, 여기에는 다소 논쟁의 여지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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