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처학자梅妻鶴子 임포의 ‘동산에 작은 매화’

 

 

 

앞서 ‘이백李白의 과장은 그의 호탕한 성격을 드러내준다’는 제목으로 그의 시 두 편을 소개했는데, 북송北宋의 임포林逋(967~1028)는 이백과는 전혀 다른 성격의 시인이었다. 사물을 바라보는 눈이 매우 섬세하여 글로 한 폭의 그림을 그렸다. 그야말로 ‘그림 같은 시’를 지었다.

임화정林和靖으로 불린 임포는 중국말로 린푸이다. 전당(장쑤성 항주) 사람으로 평생 독신으로 항주(항저우) 서호西湖(시호)의 고산孤山에 은거하며 홀로 청빈하게 살면서 학문을 좋아하고 시사서화詩詞書畵에 모두 능했다.

중국에 서호西湖라는 이름을 가진 호수가 800개가 될 정도로 아주 많은데, 가장 유명한 것이 항주의 서호이며, 세계적인 명성을 지닌 담수호이다. 이 글을 쓰면서 그곳에서 배를 타고 안개 속을 나아가던 때가 선명하게 떠오른다.

항주는 시인들과 관련이 많은데, 임포에 앞서 당나라 중반 덕종 정원唐貞元(785-804) 연간에 백거이白居易가 항주로 임명되어 무너진 제방이 농사를 망치는 것을 보고 제방공사를 다시 했다. 백거이는 더 길고, 튼튼한 둑을 쌓게 했는데, 이로 인해 수원이 풍부해지면서 가뭄을 해갈했다. 이것이 지금의 백제白堤이다. 그는 둑 옆에 수양버들을 심고는 매일 산책하고, 공사를 감독했다고 한다. 임포 이후에는 철종 원우(1086-1094) 때 소동파(소식蘇軾)가 항주에 임명되어 왔다. 이때 다시 농민들은 가뭄으로 고생을 하게 되었는데, 웃자란 수초들 때문에 물대기가 힘들게 되었던 것이다. 소동파는 호수 바닥에 침전된 진흙을 모두 파내게 했는데, 이것이 기존의 백제보다 세 배는 더 길고, 넓었다. 이게 나중에 소동파의 성을 따서 소제蘇堤가 되었다.

임포는 서호의 동산에 살면서 매화 300본을 심고 학 두 마리를 기르며 20년 동안 성안에 들어오지 않고 풍류생활을 한 것으로 전해진다. 그야말로 고독을 즐긴 시인으로 아내가 매화이고 아들이 학이란 뜻의 매처학자梅妻鶴子라는 말을 들었을 법하다. 이백이 여기저기 돌아다닌 데 비하면 한 곳에 머물러 산 임포에게서 과장이 나타날 리 없다. 그 자신이 학이 되어 임포의 집에는 학이 세 마리였다는 생각이 든다.

임포가 매화를 소재로 지은 8수의 시가 있는데 가장 유명한 것이 <산원소매山園小梅>이다. ‘동산에 작은 매화’라는 뜻이다. 물에 거꾸로 비친 매화의 정취에 감동하여 그 자리에서 지은 것으로 짐작된다. 매화향기가 암향暗香(어두울 암)이란 별명을 얻은 것은 임포 덕분이다. 향기는 보이지 않으니, 어둠에 숨은 것처럼 은근하다. 그것이 살그머니 떠오르니(浮動), 달빛에 스며들어 달빛에 떠돈다. 멋진 표현이다.

 

衆芳搖落獨暄姸중방요락독훤연; 모든 꽃이 시들어 떨어져도 홀로 아름답게 남아

占盡風情向小園점진풍정향소원; 마음속의 정이 작은 동산을 향하네.

疏影橫斜水淸淺소영횡사수청천; 성긴 그림자 맑고 얕은 물이 비스듬히 기울고

暗香浮動月黃昏암향부동월황혼; 그윽한 매화 향기는 달빛 어린 황혼에 떠도네.

霜禽欲下先偸眼상금욕하선투안; 흰 두루미는 내려앉기 전에 주위를 훔쳐보고

粉蝶如知合斷魂분접여지합단혼; 나비가 알게 되면 (그 모습에) 넋을 잃기 십상인데

幸有微吟可相狎행유미음가상압; 다행히 시를 읊조리고 함께 친할 수 있으니

不須檀板共金尊불수단판공금준; 단판이나 금술잔도 다 필요 없다네.

 

단판檀板은 박자拍子를 치는 데 사용한 널빤지 모양의 것으로, 참빗살나무檀로 만들었다.

 

단편은 우리나라에서도 사용되었는데, <세조실록>에 이런 내용이 있다.

 

登俊試崔適等 奉箋謝恩 進豐呈 上御勤政殿受之…上 令四妓及登俊試人 就前起舞 又命永順君溥 執檀板 領樂 極歡

등준시에 합격한 최적 등이 전문을 받들어 은혜를 사례하고 풍정을 바치니, 임금이 근정전에 나아가서 이를 받았다.…임금이 네 명의 기생과 등준시에 합격한 사람으로 하여금 앞에 나아와서 일어나 춤추게 하고, 또 영순군 이부에게 명하여 단판을 쥐고 악공을 거느리게 하고 지극히 즐거워하였다

 

‘霜禽欲下先偸眼 粉蝶如知合斷魂흰 두루미는 내려앉기 전에 주위를 훔쳐보고 나비가 알게 되면 (그 모습에) 넋을 잃기 십상인데’ 이 구절은 현대 중국어에서는 ‘흰 두루미가 곧 내려앉을 때에는 먼저 매화꽃 봉오리를 훔쳐본다. 매화가 이렇게 아름다운 줄 나비가 알았더라면 마땅히 일찍이 넋을 잃었을 것이다’라고 번역한다고 한다.

 

임포는 젊은 시절 강회지방江淮地方을 주유周遊하면서 40세가 되도록 각지의 산수를 두루 돌아보았으나, 모두 자기 고향 서호만은 못함을 알고 행랑을 거두고 집으로 돌아와 서호의 북쪽 고산 북쪽자락에 초려草廬를 묶고 살았다. 그는 비록 은거했지만, 그의 도덕과 문장이 당대를 풍미風靡하여, 조야朝野를 막론하고 그를 사모하는 많은 사람들이 자주 찾아왔다.

항주태수를 지낸 설영薛映과 이급李及은 매번 그를 찾아 올 때마다 하루 종일 환담을 나누다 돌아갔다. 임포는 고산에 살았던 20년 동안 시내를 들어간 적이 없었다. 그는 유명한 정치가이자 문학가 범중엄范仲淹(989~1052)과도 친밀하게 지냈다. 범중엄은 장쑤성江蘇省 쑤저우蘇州 출생으로 1038년 이원호李元昊가 서하西夏에서 제위帝位에 오르자, 산시경략안무초토부사陝西經略安撫招討副使가 되어 서하 대책을 맡고, 그 침입을 막았으며, 그 공으로 추밀부사樞密副使가 되고, 이어 참지정사參知政事(부재상에 해당)로 승진하여 내정개혁에 힘썼다. 범중엄은 임포를 칭송하는 다음과 같은 시를 지었다.

 

기풍이 중후하더니, 문장은 더 없이 맑은 경지로구나!

 

시인들마다 특별히 마음을 빼앗긴 것을 가지고 있는데, 진晉나라의 도연명陶淵明은 <귀거래사歸去來辭>에서 “어둑어둑한 서산에 해질 때까지 외로운 솔 쓰다듬으며 배회하노라”고 했고, 왕헌지王獻之는 대나무의 기상을 사랑하여 “나는 하루도 이 벗이 없으면 못사노라”고 했으며, 초나라의 굴원屈原은 <이소경離騷經>에서 “아침에는 목란에서 떨어지는 이슬을 마시고, 저녁에는 가을 국화의 지는 잎을 먹는다”고 했다. 송나라 주돈이周敦頣는 연꽃을 특히 사랑하여 <애련설愛蓮說>에서 “세상 사람들은 모란을 좋아하지만 자신은 홀로 진흙 속에서 나왔으면서 더러움에 물들지 않고, 맑은 물살에 씻기면서도 요염하지 않으며, 멀리 바라볼 수는 있어도 함부로 할 수 없는 연꽃을 사랑한다”고 했다. 그들에 반해 임포는 “성긴 그림자 맑고 얕은 물이 비스듬히 기울고”라는 말로 매화에 대한 사랑을 노래했다.

 

매화의 향기는 왕안석王安石에게도 붓을 들게 하여 다음과 같은 시를 쓰게 만들었다.

 

墻角數枝梅 담 모퉁이에는 매화 몇 가지

凌寒獨自開 추위를 이기며 홀로 피었구나.

遙知不是雪 멀리서도 눈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음은

爲有暗香來 전해오는 그윽한 향기 때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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