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앙아시아 민족은 판이하게 다른 세계관을 가진 민족이었다
<아시아 역사>(지와 사랑) 중에서

4장에서는 중국 북부지역을 정복한 중앙아시아 민족에 관해 알아볼 것이다. 그들은 유럽인뿐만 아니라 여타 아시아인과도 판이하게 다른 세계관을 가진 민족이었다. 전차부대와 기마부대가 흙먼지를 날리면서 내달리던 유라시아 초원지대가 어떻게 대륙 간 교두보 역할을 하게 되었는지에 대해 밝혀진 건 극히 최근의 일이다. 당시 대부분의 유목민들이 대서양의 기류가 초원을 우거지게 만들어주는 땅을 찾아 서쪽으로 이동했다. 하지만 어찌된 일인지 동쪽으로 이동한 토카라족에게 전차기술을 전수받았다. 토카라족은 원래 러시아 초원지대에 살던 사람들이었다. 만리장성 축조로 동아시아를 침략할 가능성이 적어진 이후에는 유목민들이 서쪽으로 이동하는 것이 일반적이었기 때문에, 토카라족의 동진은 매우 예외적인 일이었다. 중앙아시아를 둘러싸고 있던 각국의 지도자들은 이 초원지대를 활보하는 유목민들을 애물단지 취급했다. 이러한 풍조는 투르크족과 무굴족이 각각 중앙아시아와 남아시아에 거대한 제국을 건설하고 나서야 점차 자취를 감추었다. 하지만 티무르가 건설한 대제국의 영고성쇠는 중앙아시아에 당연한 일은 아무것도 없다는 사실을 증명했다.
5장에서는 서아시아의 중세에 관해 살펴볼 것이다. 이 시기에 두 번째 범아시아 종교인 이슬람교가 발흥했다. 예언자 무함마드의 사역은 아시아 대륙에 엄청난 영향을 끼쳤다. 그의 놀라운 교리는 성전에 몸을 바친 아라비아 병사들에 의해 중앙아시아와 남아시아로 전파되었다. 또한 이슬람교로 개종한 인도 상인들이 무역을 하면서 이 신흥 종교를 말레이 반도와 필리핀・인도네시아까지 전파했다. 가장 중요한 사건은 예루살렘과 메카 모두를 이슬람교의 성지로 지정한 것이다. 카바 신전으로 순례하는 이슬람교도들의 관행을 통해 아시아 전역 이슬람교도들의 통합이 가능해졌으니 말이다.
무함마드 사후 이슬람교 지도부에 불화가 싹텄다. 권력투쟁의 소용돌이 속에서 무함마드의 후계자로 지목된 네 명 가운데 세 명이 암살당했다. 그 중엔 무함마드의 사위 알리 이븐 아비 탈리브도 포함되었다. 우마이야 왕조와 아바스 왕조가 자리 잡은 후에야 당파를 가르고 정쟁을 일삼는 동족상잔의 비극이 자취를 감추었다. 750년에는 무함마드의 사위 알리를 살해한 데 대한 뒤늦은 복수가 우마이야 왕조에 피바람을 일으키는 일이 다시 한 번 벌어지기는 했지만 말이다. 아바스 왕조가 몰락한 후, 이슬람의 맹주 자리를 꿰어찬 건 이슬람교를 선도한 셀주크투르크 제국이었다. 이 비운의 제국은1095~1229년 십자군 전쟁을 겪게 된다. 이후 맹렬한 기세로 셀주크투르크를 압박해들어온 몽골군으로 인해 나라 전체가 엄청난 혼란에 빠지고, 이어서 출현한 사파비 왕조 페르시아와 오스만투르크 제국이 아라비아의 맹주를 탐내기 시작한다. 이 강대했던 제국의 통치자들이 건립한 놀라운 기념건축물들을 오늘날 이스파한과 이스탄불에서 접할 수 있다.
6장은 이슬람교의 인도 전파에 대한 이야기로 시작한다. 힌두교와 불교국가들이 인도 남부와 스리랑카에서 번영을 누렸지만, 남아시아는 중세로 접어들면서 외세의 지배를 받게 된다. 이슬람 세력의 거듭된 중앙아시아 침략은 조국 티무르에서 쫓겨난 칭기즈 칸의 후예 자히르 웃딘 무함마드 바부르가 1530년 무굴 제국을 건립하고 나서야 끝이 났다. 바부르는 자신을 따르던 유목민들의 통치자가 되었다. 이는 아시아 중세 역사의 한 획을 긋는 사건들 가운데 하나다. 다행히 그의 후계자인 악바르는 인도의 종교와 풍습을 적극적으로 수용하려고 했다. 악바르 대제가 세웠다는 아그라 부근에 있는 도시 파테푸르 시크리에서 지금도 그 흔적을 접할 수 있다.
육로로 오는 이방인만이 인도 아대륙을 탐낸 건 아니었다. 해로를 통해 유럽인이 인도로 몰려왔다. 최초로 아시아 해상 무역에 걸린 이권을 탐낸 건 포르투갈과 네덜란드였다. 곧이어 다른 강대국들도 이권 다툼에 속속 참가했고, 과열된 경쟁이 프랑스와 영국의 갈등을 초래했다. 이로 인해 벌어진 전쟁의 승자는 영국이었다. 1803년 아서 웰즐리(웰링턴 공작)가 인도 남부의 마라타 동맹까지 제압하면서 영국의 동인도회사는 무역독점권을 확보한다. 영국령 인도를 좌지우지하는 캘커타의 집권세력이 델리에 무굴 황제의 왕궁이 버젓하게 자리 잡고 있는 인도 아대륙의 실질적인 지배자로 등극한 것이다.
7장에서는 당나라와 송나라의 수도 장안長安과 카이펑開封을 중심으로 만개한 중국 문명의 흔적을 더듬어보겠다. 중국은 당나라와 송나라 집권기 동안 중앙아시아 민족에게 빼앗겼던 중국 북부지역을 회복하고 태평성대를 누린다. 중세 최대의 도시 당나라의 수도 장안에는 200만 명에 이르는 사람들이 거주했다. 단일 도시의 거주인구로는 당대 최대라 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