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류 최초의 문명은 아시아에서 발생했다

 

 

 

 

 

<아시아 역사> 서문 중에서

 

인류 최초의 문명은 아시아에서 발생했다. 기원전 4000년경, 현재 이라크의 수메르에서 최초의 도시들이 생겨났다. 곧이어 이집트에서도 도시들이 생겨났지만, 고대 서아시아의 뿌리를 형성하는 데 중대한 영향을 미친 건 수메르인이었다. 아시리아 왕들의 행적이 담긴 고문헌은 현대의 우리에게 수메르인의 심오한 사상을 전해준다. 1872년에 진행된 아시리아 왕궁 서고의 문헌을 해독하는 작업은 엄청난 반향을 일으켰다. 성경의 이야기로 알고 있던 노아의 홍수 이야기가 바빌로니아 신화의 한 대목과 상당히 유사하다는 사실이 밝혀졌기 때문이다. 노아의 방주 신화가 수메르 신화인 아트라하시스의 이야기에서 비롯되었다는 사실을 학자들이 확인하게 되면서, 지구상에서 가장 오래된 이야기들 가운데 몇몇이 이곳에서 발원했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1장에서는 고대 서아시아에서 수메르의 후계 국가인 바빌로니아・아시리아・페르시아 제국을 통해 수메르인의 유산을 살펴본다. 페르시아의 세력을 꺾은 사람은 알렉산드로스 대왕이었다. 알렉산드로스의 영토는 인도 북서부까지 뻗어나갔을 정도였다. 하지만 알렉산드로스의 제국은 이 막대한 영토를 관리하기에 역부족이었고, 재정비를 마친 페르시아가 지중해에서 로마 제국과 맞닥뜨린다. 아시아와 유럽 세력의 일진일퇴는 중세의 십자군전쟁과, 오스만투르크의 발칸 반도 점령까지 이어지게 된다. 고대에도 대륙 간 전쟁은 이미 종교적 성향을 띠고 있었다. 수메르의 다신교사상이, 기독교에 의해 예수 유일신사상으로 상당부분 대체되고 있었기 때문이다. 기독교인이 예수에게 대입한 개념은 수메르 신의 죽음과 부활의 개념이었으며, 놀랍게도 이러한 개념을 훗날 이슬람의 무함마드가 차용했다.
2장은 기원전 2200년경, 인더스 강 유역에서 발생한 인더스 문명에 관한 이야기로 시작한다. 세계에서 두 번째로 오래된 문명이라서 문자판독이 불가능한 부분이 많아 완벽하게 이해하는 건 어렵지만, 고고학적 유물들이 인도인의 삶에 중대한 영향을 끼친 종교적 전통을 보여준다. 인도의 세정의식이나 요가・모신숭배 등이 기원전 1750~1500년 사이 인더스 강 유역에 자리 잡고 있던 아리아인에게 전파되었다.
아리아인은 전차부대를 앞세워 인도를 침략했고, 이후 전차는 아리아인 문화의 상징이 되었다. 인도의 대서사시 『마하바라타Mahabharata』에는 전차의 효용을 극찬하는 내용이 등장한다. 『마하바라타』는 세계에서 두 번째로 긴 장편 대서사시이다. 인도네시아 중앙부에 있는 섬 술라웨시에 거주하던, 말레이-폴리네시아어계에 속하는 부기스족은 대서사시 『라 갈리고La Galigo』를 저술했다. 오직 『라 갈리고』에서만 인간세상에 내려와 사람이 된 신의 후예인 샤웨리가딩의  업적을 대대적으로 칭송하고 있다. 반면 아리아 문화에 호락호락하게 길들여지지 않은 것도 있었다. 최초의 범아시아적 종교 불교가 그런 경우이다. 오히려 붓다의 교리가 서서히 아리아인의 정신을 물들였고, 아리아인이 역으로 자신들의 삶에 불교를 받아들이는 일이 일어났다.
마우리아 왕조와 쿠샨 왕조의 왕들이 불교를 후원했으며, 수도승들이 불교를 중앙아시아로 전파했다. 수도승들의 왕성한 포교활동 덕에 불교는 저 먼 동아시아의 중국・한반도・일본에까지 전해졌다. 쿠샨족은 중앙아시아 민족들 가운데 유일하게 인도 북부를 통치했다. 인도 북부의 토착민족인 굽타족이 세운 굽타 왕조의 통치기에 인도는 태평성대를 누렸다. 훈족이 밀려들어오기 전까지 말이다. 아틸라의 후예 아니랄까봐 훈족의 왕 미히르쿨라도 농경민족의 삶을 폐허로 만들어버리는 것을 즐겼다. 굽타 왕조 말기의 통치자들은 불교를 배척하고 힌두교를 숭상했다. 7세기에 이슬람교가 인도에 전파되었다.
하지만 남아시아의 대표적인 종교는 여전히 힌두교였다. 3장에서는, 아시아에서 세 번째로 오래된 동아시아 문명 발상지에 대해서 주로 살펴볼 것이다. 상나라와 주나라 황제들의 행보에서 중국만의 고유하고도 지속적인 문화의 형성과정을 볼 수 있다. 중국문화는 장구한 세월 동안 면면히 이어져 내려왔다. 하나의 흐름을 가진 문화가 무려 기원전 221년부터 기원후 1912년까지 지속된 것이다.
진시황의 통치 하에 중국이 통일되기 전, 유교와 도가가 출현하여 통치사상의 자리를 놓고 자웅을 겨뤘고, 중국 황제들은 가족중심적 사상이라 할 수 있는 유교를 선택했다. 서아시아나 남아시아의 다른 고대 문명의 중심지와 상당히 멀리 떨어져 있었던 덕에 중국은 고유한 세계관을 정립할 수 있었다. 중앙아시아 초원지대의 유목민은 두고두고
중국의 골칫거리였다. 결국 이 문제의 해결을 위해 중국의 농업지대와 유목민의 초원지대 사이에 만리장성이 축조되었다. 하지만 유목민들이 연합을 이루게 되면서, 만리장성만으로는 중국의 안전을 담보할 수 없는 시대가 열렸다. 316년 중국은 거의 대부분의 북부영토를 중앙아시아의 유목민들에게 빼앗기고 말았다. 대표적인 유목민인 훈족의 침입과, 그로 인한 게르만족의 이동으로 멸망하고 만 서로마 제국의 쇠망사를 떠올리게 하는 대목이다. 하지만 두 국가의 쇠락을 동일선상에 놓고 평가할 것은 아니다. 역사의 흔적이 되어버린 라틴어와는 다르게 중국어는 온전히 살아남아 유구한 역사의
기억을 후대에 전했다. 중국을 침략한 이민족들이 한족의 언어를 자신들의 공식언어로 채택했을 정도였다. 이처럼 칼과 공포로 제압할 수 없는 힘을 가지고 있었던 언어는 중국어 말고 페르시아어가 유일하다. 아랍어들의 각축장에서도 꿋꿋이 살아남은 페르시아인의 아름다운 언어 말이다. 하지만 이 과정에서 페르시아어도 상당부분 변질된 것만은 사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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