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슬람주의의 세 권위자와 서방세계의 세 가지 혼란

사이드 쿠틉이 쓴 책으로 가장 영향력 있는 책 『진리를 향한 이정표』로 이야기를 시작할까 한다. 여기서 그는 “병든 서방세계” 가 민주정치와 함께 와해되는 까닭을 진단했다. 서양은 “역사가 귀환” 하여 세계를 장악할 가상의 이슬람 세력으로 대체되어 무슬림의 영광이 도래할 거라는 것이다. 이 같은 사상은 무슬림 문헌에서 대부분 분명히 명시되어 있다. 쿠틉에 따르면 “서방세계에서… 인류는 분명히 벼랑 끝에 있다. 이미 그렇듯이, 민주정치가 붕괴된 이후… 서양인의 통치는 곧 와해될 전망이다. … 주요 가치관과 대안이 있는 것은 이슬람교뿐이며… 긴장이 극에 달한 시기인 바로 지금 이슬람교와 무슬림 공동체가 세상을 장악하게 될 것” 이라고 한다 이것이 알카라다위도 역설하는 이슬람교식 해결책이다.
이슬람주의의 창시자 중, 쿠틉에 버금가며 역량이 그와 동일한 인물인 인도계 무슬림 아부 알랄라 알마우두디는 훨씬 더 강력한 어조로 민주정치를 규탄했다. 무슬림 형제들에게 솔직히 말하건대, 민주정치는… 여러분이 종교와 교리로 포용하고 있는 이슬람교와는 대립되며, 여러분이 믿고, 무슬림이라는 정체성을 규정해준 이슬람교는 이런 가증스런 제도[민주정치]와는 크게 다르다. … 민주정치 제도가 장악한 곳에는 이슬람교가 없고, 이슬람교가 지배하는 동시에 민주정치 제도가 양립하는 곳은 없다. 1966년, 쿠틉이 공개 처형되자, 그로부터 10년 후에 알마우두디가 세상을 떠났다. 쿠틉의 계승자로 널리 알려졌고 현존하는 이슬람주의자들 가운데 가장 영향력을 떨치고 있는 인물로는 유수프 알카라다위를 꼽을 수 있다. 알자지라 방송이 입지를 넓힌 결과, 그는 “세계적인 무프티” 로 불리기도 한다. 알카라다위는 1967년 6일전쟁에서 아랍이 참패한 이후 처음 알려지기 시작했으며, 그의 저작은 종교와 무관한 정권을 두고 법적인 권위가 실추되는 데 기여했다. 그의 저서 『이슬람교식 해결책과 도입된 해결책al-Hall al-Islami wa al-hulul al-mustawradah』은 이슬람교의 가치관을 위해 서방세계의 가치관을 배격하는 삼부작 중 첫 번째다. 알카라다위는 판결(파트와)을 모두 공포하는데, 이는 영향력이 상당했다. (파트와란 바른 행위를 위한 가르침과 지침을 포함한 법적 판결을 일컫는다. 살만 루슈디에 사건 이후, 서방세계는 파트와를 사형으로 알고 있으나 이는 사실과 다르다.) 알카라다위는 민주정치를 비롯하여, 차용된 문화를 모두 “외부에서 도입된 해결책” 이라며 배격하고 조롱했다. 그의 판결 중 하나를 살펴보면, “진보 민주주의라는 용어는 유럽에 기원을 두었다는 점을 반영한다. … 진보 민주주의 사상은 식민지를 통해 무슬림의 생활에 유입되었다. … 이 사상의 배후에는 종교가 정치 그리고 국가와 분리된다는 사악한 식민지적 개념이 어렴풋이 보인다” 고 한다. 그 이면에는 낯설지 않은 악역도 있다. “식민주의를 표방하는 십자군과 전 세계의 유대인은 이슬람교 안에서 혼돈 상태fitna(피트나)를 선동한 장본인이다.” 12 피트나에는 이중적인 의미가 있다. 문자 그대로는 성적인 위험을 뜻하나, 무슬림은 비무슬림이 일으켜 무슬림이 휘말리게 된 격렬한 싸움(피트나 전쟁)을 가리킬 때도 피트나라 한다.
알카라다위에 따르면, 이슬람교는 “차용된 해결책의 대안으로 샤리아를 내놓았다” 고 한다. 이슬람식 샤리아국가는 “이슬람세계에서 실패한 진보 민주주의” 를 대체해야 하는데, 그 까닭은 민주정치가 “외부에서 유입된 것으로” 이슬람교와는 거리가 멀기 때문이다. 이슬람주의자들이 다 그렇듯, 알카라다위 또한 유럽에서 서양인과 대면할 때에는 그런 주장을 삼간다. 현지에서는 민주정치를 지지한다는 이야기다. 이처럼 한 입으로 두 말을 하니 서방세계가 이슬람주의를 알다가도 모르는 것이다.
정치적 이슬람교에서 명망 있는 세 권위자의 주장을 액면 그대로 받아들인다면, 추후의 논의도 필요 없이 이슬람주의가 민주정치와는 양립할 수 없다는 결론에 이를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내가 왜4 장을 쓰고 있는 걸까? 증거는 분명하지만 글을 쓰는 것이 쉽지는 않다. 다수의 서양 학자들은 민주정치— 서방세계가 듣기 좋은 대로 재단된— 를 두고 이슬람주의자들이 밝힌 엇갈린 주장을 곧이곧대로 믿는 탓에, 결론도 천차만별이다. 이 같은 혼동의 주요 원인은 이슬람주의와 이슬람교의 차이를 간과한 데서 비롯된다. 종교적 윤리 체계이자 신앙의 원천인 이슬람교는 종교개혁의 의지가 결합된다면 얼마든지 민주정치와 양립할 수 있다. 코란에 기록된 “슈라shura” 는 아랍어로 “협의” 라는 뜻이다. 비록 민주정치란 뜻은 아니지만 오늘날, 근대화된 문화14라는 걸림돌을 해결하고, 민주정치를 이슬람교에 도입할 생각이라면 슈라는 민주정치 윤리로 새롭게 해석될 수 있을 것이다.
서방세계가 혼동하게 된 두 번째 요인은 포스트모더니즘이 근대화의 보편성을 배격한 데 있다. 여기서 이슬람주의는 “다른 근대화” 의 일종으로, 민주주의와의 관계는 서방세계의 기대와는 다를 것이라는 입장이 대두되었다. 그러나 이는 정치적 이슬람교가 권좌에 오르기 위해 투표함을 사용했다가 목적이 성취되면 즉시 민주정치의 원리를 헌신짝처럼 버리듯, 임시 변통에 불과한 것이다. 이슬람주의 조직체가 호소력을 얻고 그 이데올로기가 국민의 선택 사안으로 승격된다면 민주정치의 구색— 껍데기뿐인—을 이용해먹는 작태는 심심치 않게 벌어질 공산이 크다. 오늘날, 중동국가의 민주정치는 독재주의 정권이 아닌 이상 이슬람주의를 배제할 여건이 못된다. 그러나 이슬람주의가 민주주의와 양립할 수 없는 까닭에 민주주의 제도에 참여하는 이슬람주의는 딜레마를 일으키고 있다.
끝으로 이슬람주의자들과 손을 잡고 중동을 민주화하려는 미국 정책 입안자도 혼동의 원인이 된다. 그들은 역사에서 뼈저린 교훈을 얻지 못한 것 같다. 1980년대에 침략한 소련을 상대하던 아프간 이슬람주의 단체 무자히딘을 미국이 지원한 것은 엄청난 실수였다. 그것이 결국에는 탈레반으로 이어졌으니 말이다. 그러나 9・11테러 사태가 터지자 부시 행정부는 “테러와의 전쟁” 의 일환으로 탈레반 소탕작전을 펼쳐 지하드 테러를 지원한 혐의가 있는 무슬림을 모두 와해시켰으나 지하드운동을 막지는 못했다. 그런 다음에야 비로소 이라크와 팔레스타인에서 이슬람주의자들을 권좌에 앉히게 된, “민주화 정책” 이란 허울 아래 국민을 홀린 광기가 출현하게 된 것이다. 조만간 이집트도 같은 전철을 밟게 될 것이다. 이렇게 “정권교체” 도 해보았지만 민주정치가 확립되지 못한 까닭은 무엇일까? 서양의 정책입안자들이 이슬람교와 이슬람문명에 대해 무지했다는 점이 가장 큰 이유일 것이다. 오바마 행정부가 색다른 화해정책을 펼치긴 했으나, 그 역시 아랍세계의 민주정치와 민주화를 분명히 이해하지 못했을 뿐 아니라 이슬람주의를 충분히 분석하지 못했다는 방증이다. 이슬람주의자와 서양의 지지자들로 이루어진 이슬람주의 당이 서유럽의 기독교 민주당에 견줄 수 있다고 하나, 이는 틀린 발상이다. 그들과는 달리, 이슬람주의 당은 종교와 관계가 깊은 데다— 그래서 세속화의 탈피를 현안으로 상정한다— 민주화의 의지는 투표함에서 끝나기 때문이다. 이런 난잡한 세상에서 이슬람주의를 둘러싼 진실을 운운하는 건 헛된 수고에 불과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