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슬람주의와 민주주의

 

 

 

 

이슬람주의가 민주주의와 화합할 수 있을까? 이 물음에 이슬람주의 찬성파와 반대파가 뜨거운 논쟁을 벌였다. 3장에서 이슬람주의식 반유대주의를 분석했지만 희망은 거의 보이지 않았다. 『전체주의의 기원』에서 반유대주의를 포함한 모든 이데올로기가 전체주의라고 주장한 한나 아렌트의 논리에 수긍한다면, 이슬람주의는 분명 전체주의적인 속성이 있으므로 비민주적인 이데올로기로 볼 수 있다.2 지금까지는 이슬람주의에 대해 간접적으로 설명했으나 앞으로는 이슬람주의 이데올로기의 창안자와 그들의 후손이 민주주의를 어떻게 생각하는지 그들에게서 직접 들어볼까 한다. 물론 그러기 위해서는 이슬람주의 지도자가 직접 쓴 문헌을 읽는 것이 중요하다. 이러한 문헌을 읽지 않은 학자들은 이슬람주의자가 서방세계의 청중을 의식한 진술과, 그들의 속내를 진솔하게 밝힌 것의 차이를 구분할 수 없다.
이슬람주의와 민주주의의 관계는 열띤 논쟁을 불러일으켰다. 2008년 『민주주의 저널』지에도 논쟁이 게재되었다. 그때 나는 “왜 그들은 민주주의자가 될 수 없는가” 라는 제목의 글을 기고한 바 있다.3 논객들 가운데 앤드류 마치는 “종교적 신념이 동기가 된” 평화주의적 이슬람주의자는 포용할 수 있다고 주장한 반면, 마크 린치는 민주주의를 도입하려는 이슬람주의자들의 의지를 의심한다면 무슬림의 “신앙과 정체성”에 “엄청난 모욕” 을 준 것으로 몰릴 수 있음을 역설했다. 내가 강조한 바와 같이, 이들의 주장은 이슬람주의와 이슬람교의 차이를 간과하고 있다. 논쟁의 핵심은 신앙이 아니라 종교화된 정치에 있었기 때문이다.
또한 제도적 이슬람주의와 지하디스트의 차이도 논쟁의 중심에 있다. 두 집단의 경계가 얼마나 모호한지는 잠시 접어두기로 하자. 지하디스트가 비민주적이라는 점은 쉽게 알 수 있으나, 제도적 이슬람주의는 민주적인 의사결정 절차에 참여하고 이를 지지할 때가 더러 있으니 어느 편인지 분간하기란 좀 어려울 것이다. 나는 민주주의를 지지한다는 이슬람주의자들은 믿지 않지만, 참여하는 정치는 찬성하고 비폭력 이슬람주의자를 범법자로 치부하는 건 반대한다. 떼려야 뗄 수 없는 참여와 위임의 차이는 최근 중동과 북아프리카 전역에서 벌어진 대규모 시위와도 관계가 깊다. 4장 후반에서 이를 좀 더 살펴보기로 하자. 린치는 『포린 어페어스』지에서 폴 버먼이 이슬람주의를 조명한 책 『지성인들의 비상The Flight of the Intellectuals』을 비평하는 가운데 제도적 이슬람주의와 지하디스트의 연결고리를 “이슬람주의 집단을 한 덩어리로 묶는 것” 으로 규정했다. 그는 “민주정치 제도 안에서 제 역할을 할 의지는 있지만 정작 진보적인 자유와 평등 및 관용과는 대립되는 가치관을 장려한다” 며 비폭력 이슬람주의자들의 문제점을 지적했다. 그렇다면 민주주의자들은 이 같은 딜레마를 어떻게 풀어야 할까? 서방세계6와 아랍 무슬림세계에서 이 주제에 대한 토론회에 참여해온 나는 민주주의가 두 가지 기둥에 기반을 둔다고 역설했다. 첫째는 가치관과 민주주의의 정치 문화이고, 둘째는 선거정치인데, 린치는 분리하고 싶어 할지도 모르지만 누구도 이 둘을 분리해선 안 된다. 그는 이슬람주의식 민주주의 비전을 가리켜 “진보적이라 규정할 수는 없지만 무슬림이… 진보적이자 민주적인 제도에 참여할 수 있는 적절한 지침은 될 것” 이라고 주장했다. 때문에 린치는 이슬람주의 지도자 유세프 알카라다위를 “민주정치 참여를 열렬히 지지하는… 비폭력 이슬람주의자들의 우상” 이라고 소개한 것이다. 알카라다위가 이슬람주의의 “우상” 이라는 점을 두고는 이견이 없으나, 과연 알카라다위나 그의 추종자가 민주정치의 의지력도 겸비할 수 있느냐는 따져봐야 마땅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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