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생명의 신성함’에 대한 비평

지금까지 살펴보았듯이, 인간 완성도의 기준을 따를 때 제기되는 한 가지 문제점은 그 ‘합격선이 어느 정도인가’ 하는 것이다. 태아가 발달해가는 과정에서 정확히 어느 지점부터 생명의 권리를 누리기 시작할까? 이것이 정해진다면 생명의 권리가 있는지 없는지를 명백히 가릴 수 있겠지만, 어중간한 발달 단계에서는 어떻게 할까? 바로 이 점이 논의의 해법을 찾는 데 중요하다. 이 문제에서 파생된 한 가지 주장이 바로 ‘합격선이 너무 높다’는 주장이다. 육식의 권리나 동물실험의 권리를 옹호하려는 논자는 높은 수준으로 발달하지 못한 존재는 오로지 사용 가치만 있을 뿐이어서, 함부로 낭비할 것은 아니지만, 우리의 중요한 목적을 위해 쓰일 수 있다고 주장하려 할 것이다. 문제는(싱어가 지적한) 수많은 인간, 예컨대 심각한 지적 장애인들도 그러한 발달 수준에는 이르
지 못한다는 사실이다. 우리가 앞서 열거한 능력에 비추어, 수많은 형태의 ‘고등’ 동물들을 특정 부류의 인간보다 가치 있는 존재로 간주할 수 있을지 모른다. 그렇다면 이러한 주장에 따라 심각한 지적 장애인들을 먹을거리나 실험대상으로 삼을 수 있을까? 그럴 수 없다면 이번에는 동물의 권리를 보호하려는 논자들이 들고 일어설 것이다. 그들은 우리가 따르려는 논리를 가리켜, 아무런 합리적 근거 없이 다른 종에 비해 자신이 속한 종만을 우대하려는 노골적인 편견이라고 비난할 것이다.
이런 식의 비난은 한 걸음 더 나아가 다음과 같은 논리로 발전한다. 인간 완성도의 기준이란 인간중심적인 발상임이 틀림없다. 이러한 발상은 인간을 도덕적 우주의 한가운데에, 그리고 발달과정의 맨 꼭대기에 놓는다. 또한, 이러한 발상은 인간 이외의 모든 만물을 인간의 능력에 미치지 못한다 하여 ‘더 낮은’ 존재로 치부한다. 이렇듯 인간에 중심을 두는 관점은 예컨대, 신이 인간을 창조하면서 자신의 이미지를 닮도록 했다고 믿는 유대 기독교 신앙에 깃들어 있다. 그리하여 이 신앙은 인간이 도덕적 우주의 가장 특별한 자리에 놓인다는 믿음을 강화한다. 그러나 이러한 종교적 관점이나 신화를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인간에게 특별한 가치와 품위를 부여하고 성스럽고도 도덕적으로 특별한 지위를 부여하는 것이 인간의 뛰어난 특징과 능력 때문이라고 믿어야 할까? 신이 인간에게 세상의 ‘지배권’을 부여했다는 것을 믿지 않는다면, 동식물에는 사용 가치가 있을 뿐이고 인간에게는 내재적 가치가 있다는 생각에 만족하며 살아야 할까? 아리스토텔레스는 인간 존재를 특별히 가치 있게 만드는 것은 인간에게는 동물과 구별되는 특징이 있기 때문이라고 주장했다. 그중 가장 중요한 것은 바로 합리적으로 사고하는 능력이다(비단 그것만이 아니라, 마치 움베르토 에코의 소설 『장미의 이름The Name of the Rose』에서처럼, 웃는 능력을 비롯한 수많은 인간의 특징을 내세울 수 있지 않느냐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을지 모른다). 잠시 인간이 아닌 사자가 그 자리에 있다고 상상해보자. 사자는 특별한 대우를 받을 자격기준을 전혀 다른 방식으로 내세우지 않을까?
그런데 여기서 잠시 생각해보아야 할 것은 생명의 신성함을 내세우는 사상 또는 각각의 개인이 성스러운 존재라 하여 개개인 사이에 장벽을 세워 놓는 사상이다. 회의론자는 이러한 사상이 주로 신이 인간을 사랑하되 부모가 자식을 사랑하듯이 조건 없이, 그리고 각 개인 하나하나를 구별하여 사랑한다는 기독교 사상에 젖은 서구문화에서 나왔
다고 지적할 것이다. 이러한 기독교 전통을 부정한다면, 회의론적 비평가는 모든 사물을 합리적으로 봐야 한다고 또다시 지적할 것이다. 지금까지 보아왔듯이 인간 생명의 신성함을 내세우는 사상은 인간이 인간을 대하는 방식과 선택할 수 있는 행위의 형태에 일정한 한계를 설정한다. 총 잡은 사내 이야기에서 이러한 예를 살펴보았다. 빚을 갚는 것은 좋은 일이지만 다른 사람에게 빚을 졌다는 사실이 빚을 벗어나는 방식에 대하여 어떤 한계를 설정했다. 빚을 청산하려고 채권자를 죽여서는 안 된다는 것이었다. 그러므로 생명이 신성하다고 믿는다면 목적을 달성하는 방법에도 마땅히 한계가 있어야 한다. 한편 회의론자는 생명이 신성하다고 믿는 사람은 모든 일마다 해도 좋을지 아닐지를 물어야 하느냐고 다시 반문할 법하다. 우리는 모두 빚을 없애려고 채권자를 죽여도 된다는 생각에 반론을 제기하겠지만, 생명을 성스러운 것으로 볼 때 오히려 끔찍한 결과를 불러오는 사례도 있음을 알아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