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아를 ‘단순한 하나의 세포 덩어리’로 표현

 

 

 

 

우리는 앞에서 낙태에 찬성하는 주장을 살펴보며 태아를 ‘단순한 하나의 세포 덩어리’라고 표현한 바 있다. 아무런 느낌이나 의식이나 의지가 없는 단순한 하나의 유기체로 본 것이다. 신생아는 그보다는 진보한 상태에 있겠지만, 정상적인 인간의 완성도 기준에서 보면 미숙할 것이다. 그렇지만 유아와 태아 사이에 나타나는 차이는 동물과 식물 사이에 나타나는 차이와는 많이 다를 것이다. 이는 잠재력을 염두에 둔 것이다. 식물과 연체동물 그리고 소와 양 같은 것들은 현재 상태보다 훨씬 더 수준 높은 상태로 발달할 수 없다. 그러나 다른 모든 조건이 같다고 가정할 때, 태아나 유아는 크게 발전하여 훨씬 더 높은 수준으로 올라갈 것이다. 바로 여기서, 생명의 신성함을 내세우는 사람은 낙태에 반대할 명분을 찾아낸다. 육식하는 사람은 낙태에 찬성할 수밖에 없다는 결론에 반대할 수 있는 것은 태아에게 완전한 성인으로 발전할 잠재력이 있고, 따라서 그에 상당하는 내재적 가치를 지니기 때문이다. 비록 태아의 현재 상태가 단순한 세포의 집합체에 지나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태아에 깃들어 있는 내적 구조는 엄마의 적절한 도움을 받아 온전한 인간의 기준을 충족하는 존재로 발달해갈 것이다. 그 반면, 식물과 연체동물은 말할 것 없고, 소나 양은 아무리 시간이 지나도 결코 그렇게 발달할 수가 없다.
생명을 신성한 것으로 보는 견해는 안락사에 대해서도 앞선 예와 비슷한 문제에 부딪힌다. 우리가 보았듯이, 인간 완성도의 기준에서 보면, 동물에게는 내재적 가치가 없으므로 육식해도 좋다고 할 만한 이유가 충분하다고 할 것이다. 그렇지만 같은 논리를 연장해가면, 식물인간이나 알츠하이머로 지적 장애가 심각한 사람 역시 내재적 가치가 없거나 상실한 것으로 보아야 한다는 말이 성립한다. 지적 악화 과정이 돌이킬 수 없는 단계에 이르러 더 수준 높은 단계의 능력을 영영 회복할 수 없음이 분명해질 수도 있다(물론 안락사에 반대하는 사람들은 회복할 수 없다는 것을 과연 누가 어떻게 판정하느냐고 반문할 수 있겠지만). 이것이 사실이라면, 그 환자는 온전한 인간 완성도의 기준에 비추어 더는 사람 대접을 받지 못한다. 나아가 낙태문제에서는 태아의 발달 잠재성을 고려할 수 있었으나, 이런 환자에게서는 그 같은 잠재성을 전혀 찾아볼 수 없다. 환자는 자꾸만 상태가 나빠지다 결국 죽고 말 것이다. 그런데도 생명의 신성함을 내세우는 논자들이, 그와 반대되는 대안을 제시하면서 이 환자가 온전한 사람으로 돌아올 가능성이 없다고 해도 한때는 온전한 사람이었음을 주장한다면, 이에 귀 기울일 필요가 있다. 돌이킬 수 없을 정도의 지적 장애에 빠진 사람을 죽음으로 몰고 가는 것은 모두 꺼리기 때문일까? 이때 안락사를 정당화할 수 있을까? 여기서 제기되어야 할 또 하나의 문제는 본래부터 심각한 지적 장애를 안고 태어난 사람을 대하는 우리의 태도에 관한 것이다. 이런 지적 장애인에게는 아무런 내재적 가치가 없다고 보아야 옳을까? 그리하여 편의에 따라 이들에게 안락사를 시행해도 되는 것일까?
끝으로 다시 동물문제로 돌아가자. 우리는 인간적 완성도의 기준을 내세우는 논리를 육식을 옹호하는 논리와 같은 것으로 간주했다. 그 논리가 다른 영역에 어떻게 적용되는지를 살펴본 사람은 다음과 같이 논고하려 할 것이다. 지적 장애인의 안락사가 허용될 수 있다는 주장은 받아들일 수 없다. 지적 장애인도 여느 사람과 다름없이 생명의 권리를 지닌다. 이들 장애인이, 그 논리에서 주장하는 것처럼 인간적 완성도의 기준을 충족하지 못한다는 점은 인정하지만, 처음부터 장애인에게는 기준이 너무 가혹할 정도로 높게 설정되었다. 본래부터 지적 장애를 안고 태어난 사람들을 편의에 따라 아무렇게나 다루어서는 안 되므로 이들을 위해 인간적 완성도의 기준을 낮춰야 한다. 지적 장애인을 볼 때, 인간은 괴로움과 즐거움을 느끼고, 의사소통하고, 감정에 반응하고, 지적 사고를 하는 능력이 있는 한, 생명의 권리를 지닌다고 할 것이다. 그렇지만 더 수준 높은 능력을 지닌 몇몇 종류의 동물에게도 이런 능력이 있음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러므로 논리상 일관성이 있으려면, 육식을 옹호하는 논리에 반대해야 마땅하다. 지적 장애인에게 생명의 권리가 있다면, 마찬가지로 고등동물에게도 생명의 권리가 있다고 보아야 하기 때문이다.
지금까지 우리는 마음대로 처분해서는 안 될 만큼 어떤 생명에 가치를 부여하는 것이 무엇인가에 관하여 생각해보았다. 어떤 생명에는 왜 이러한 가치가 있는가를 설명하기 위해 인간이 할 수 있는 복합적인 일들을 살펴보았다. 그러나 바로 앞 단락에서 제시한 주장은 이에 관한 논의가 그릇된 가정을 하고 있다는 점을 지적한다. 즉 모든 인간에게 그런 복합적 행위들을 할 능력이 있다는 식으로 가정한다는 것이다. 실제로 세상에는 그런 능력이 없는 일단의 사람들, 예를 들면 심한 지적 장애를 가진 사람들이 존재하는 것 또한 사실이다. 그렇긴 하지만 우리는 이들이 오직 사용 가치만을 지닌다고는 생각하지 않으려는 경향이 있다. 그런데 이 장애인들이 진정 생명의 권리를 지닌다면, 동물이 세련된 행위를 할 능력이 없다는 이유만을 내세워 육식을 정당화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렇게 해도 된다면, 극심한 지적 장애인을 처분하거나 심지어 먹는 것도 허용되어야 하지 않을까? 그러므로 앞의 주장은 하나의 도전장이 아닐 수 없다. 결국 비교적 지능이 발달한 동물까지 포
함할 정도로 인간 완성도의 기준을 낮춰서 극심한 지적 장애인들까지 구제대상에포함하거나, 동물은 물론 지적 장애인들도 포함될 수 없을 정도로 인간 완성도의 기준을 높이지 않을 수 없다. 우리가 동물을 죽일 수 있다고 생각한다면 그것은 곧 일부의 어떤 인간들을 죽일 수 있다는 주장을 받아들이는 결과가 된다.
피터 싱어는 이런 식의 주장을 내세워 모든 동물을 평등하게 다뤄야 한다는 논리를 전개했다.1) 그는 육식은 할 수 있지만 상태가 심각한 장애인을 죽여 없애는 것은 허용될 수 없다는 식의 상식론적 견해를 비판한다. 그의 견해에 따르면, 이것이야말로 아무 원칙적 근거조차 없는 인간의 종적 편견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것은 인종차별이나 성적 학대 같은 다른 모든 형태의 차별과 마찬가지로, 지지를 받을 수 없다고 그는 주장한다. 싱어는 이를 가리켜 동물에 대한 ‘종차별주의speciesism’로서 도덕적 상태에 대한 무지라고 했다.
이 절의 논의는 아직 낙태나 안락사, 동물의 권리 같은 여러 문제 영역에 대한 종합적 평가를 하지 않았다. 그러나 우리는 각 영역에 관한 논의에서 핵심을 이루는 문제를 살펴보았다. 말하자면 그 문제란 어떤 존재가 생명의 권리를 인정받기 위해 갖추어야 할 요건에 관한 것이었다. 우리가 (1) 모든 존재에게 생명의 권리가 인정되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하고, (2) 어떤 존재에게 생명의 권리를 인정하고 다른 존재에게는 부정하는 것은 단순한 변덕이나 즉흥에서가 아니라고(또는 변덕이나 즉흥이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하는 한, 이러한 요건은 인정될 듯하다. 이것이 옳다면 특정 부류의 존재를 죽이는 것이 허용되는지를 판단하기 위해 적어도 부분적으로 그러한 요건이 무엇인가 하는 문제와 어느 특정 존재가 그러한 요건을 충족하는가 하는 문제를 고려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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