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희맹姜希孟이 누구입니까?
강희맹姜希孟(1424~1483)은 본관이 진주晉州, 자는 경순景醇, 호는 사숙재私淑齋, 운송거사雲松居士, 국오菊塢, 만송강萬松岡이다. 할아버지는 고려 말에 벼슬하여 정당문학政堂文學 겸兼 대사헌大司憲이 되었고, 조선에 들어와 동북면東北面 도순문사都巡問使가 되어 문장으로 이름이 알려졌다. 그가 휘 석덕碩德을 낳았으니, 호는 완역재玩易齋이다. 그가 강희맹의 부친으로, 박학하고 문장에 능했는데, 한번 과거 보아 합격하지 못하자 탄식하기를, “도의道義라는 숭상할 만한 것이 있거늘 무엇 때문에 과거 과목을 공부하겠는가?” 하고, 응시하지 않았다. 어머니 심씨沈氏는 영의정 안효공安孝公 휘 온溫의 따님인데, 안효공은 소헌 왕후昭憲王后(세종비)를 낳았으므로, 왕비 친가親家의 인척이 되어 경복慶福을 양성하여 문벌門閥이 빛나게 번성했다. 완역재공은 어려서 음직蔭職에 보임되어 관직을 두루 거쳐 4품에 이르렀는데, 안효공의 총애와 세력이 날로 더해지는 것을 보고 또 조급히 승진하는 것을 즐거워하지 않아서 안효공에게 관직에 임용하는 것을 늦추어 줄 것을 청했다. 안효공이 몰락하기에 미쳐 좌절한 채 다시 벼슬에 나갈 생각이 없었는데, 세종이 발탁해 중용하여 승지承旨ㆍ대사헌大司憲ㆍ이조참판吏曹參判ㆍ호조참판戶曹參判ㆍ형조참판刑曹參判을 역임하고 지돈녕부사知敦寧府事에 승진했으며, 죽은 뒤 대민戴敏이라 시호를 내렸다.
강희맹은 1447년(세종 29) 24세로 친시문과에 장원급제한 뒤 종부시주부宗簿寺主簿가 되었다. 1450년 예조좌랑과 돈녕판관을 역임하고, 1453년(단종 1) 예조정랑이 되었다. 1455년(세조 1) 수양대군이 왕위를 찬탈하고 세조로 등극하자 원종공신 2등에 책봉되었고, 그 뒤 예조참의·이조참의를 거쳐, 1463년 중추원부사로서 진헌부사進獻副使가 되어 명나라에 다녀왔다. 이듬해 부윤으로서 어제구현재시御製求賢才試에 2등으로 합격하고, 1466년 발영시拔英試에 3등, 등준시登俊試에 2등으로 급제했다. 세조의 총애를 받아 세자빈객이 되었으며, 예조판서를 거쳐 1467년에는 형조판서로 특배되었다.
1468년(예종 즉위년)에 남이南怡의 옥사獄事를 다스린 공으로 익대공신翊戴功臣 3등에 책봉되어 진산군晉山君에 봉해지고, 1471년(성종 2)에는 좌리공신佐理功臣 3등에 책봉되었다. 그해에 지춘추관사로서 신숙주申叔舟 등과 함께 ≪세조실록≫·≪예종실록≫의 편찬에 참여했다.
1473년에는 병조판서가 되고, 이어서 판중추부사·이조판서·판돈녕부사·우찬성을 역임한 뒤, 1482년에 좌찬성에 이르렀다. 인품이 겸손하고 치밀해 맡은 일을 잘 처리했으며, 또 경사經史와 전고典故에 통달했던 당대의 뛰어난 문장가였다. 사대부로서의 관인적 취향과 섬세한 감각을 가진 문인이면서도 농촌 사회에 전승되고 있는 민요와 설화에 깊은 관심을 가져 관인문학官人文學의 고답적인 자세를 스스로 파괴했다.
그의 ≪농구십사장農謳十四章≫은 생활 주변에서 채집한 농요를 모아 정리한 것으로 농민들의 애환과 당시 농정農政의 실상이 잘 묘사되어 있으며, 그의 시 중에서 그것보다 앞서는 것이 없다는 평을 받았다.
할아버지와 아버지, 형의 시집인 ≪진산세고晉山世稿≫를 편찬했으며, 세조 때 ≪신찬국조보감新撰國朝寶鑑≫·≪경국대전≫의 편찬과 사서삼경의 언해, 성종 때는 ≪동문선≫·≪동국여지승람≫·≪국조오례의≫·≪국조오례의서례≫ 등의 편찬에 참여했다.
또한, 소나무와 대나무 및 산수화를 특히 잘 그렸는데, 현재 일본의 오구라문화재단小倉文化財團에 소장되어 있는 <독조도獨釣圖>는 그의 작품으로 알려져 있다. 그리고 글씨로는 원각사비圓覺寺碑의 액전額篆, 아버지와 강지돈姜知敦 묘표의 액서額書, 합천홍류동체필암각陜川紅流洞泚筆巖刻 등을 썼다.
저서로는 성종의 명에 따라 서거정徐居正이 편찬한 ≪사숙재집私淑齋集≫ 17권 이외에 ≪금양잡록衿陽雜錄≫·≪촌담해이村談解頤≫ 등이 전하고 있다. 시호는 문량文良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