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가法家란 무엇이며 상앙商鞅은 누구입니까?

 

 

전국시대戰國時代에 출현하여 유가儒家의 자연법적인 예禮에 대해 실정법적인 법의 우위를 주장한 법가法家는 예가 지연적, 혈연적 공동체를 결합하는 것이었지만, 춘추시대春秋時代 중기 이후의 생산력의 발전에 의한 공동체의 붕괴는 예를 대신하는 법에 의한 지배를 요구했습니다. 전국시대 제자백가 가운데 유일하게 법가가 당대의 사회경제적인 근본 변화를 역사의 정당한 발전에서 필연적인 과정으로 파악했습니다. 이러한 사회 변화의 근원적 와중에서 법가는 농업 생산의 증대와 다른 한편 전통적인 세습귀족제의 폐지를 통한 효율적인 관료제의 확립을 노리는 강력한 농업정책을 제창했습니다. 그리고 보편적 공평무사한 법에 의한 통치로 구귀족의 특권을 제한함으로써 군주의 통치권을 강화시키려는 군주절대주의 실현을 주된 내용으로 하고 있습니다. 이는 새로이 대두하는 관료제적 절대주의 국가의 정치적 이해를 대변하는 것이었습니다.

초楚나라를 저지하고 중원제국 주도권을 장악한 위魏나라의 문후文侯(기원전 445∼396 재위) 아래서 일했던 이리李理(기원전 445~396)는 농업정책에 개혁을 꾀하는 법령을 편찬했고, 위韋나라의 귀족 출신으로 위앙韋鞅 혹은 공손앙公孫鞅이라 불린 상앙商鞅(?~기원전 338)은 법령을 편집, 공개하여 그에 따른 신상필벌信賞必罰을 단행, 부국강병책을 이루었습니다. 사마천司馬遷의 <사기史記> ‘상군열전商君列傳’에는 상앙의 인물됨과 그가 진秦나라에서 실시한 사회개혁의 개괄적인 내용 및 그것에 대한 비판적 평가가 간결하게 적혀있습니다. 여기서 상군商君이란 상앙을 말합니다. 상군商君으로 불린 것은 그가 상商 지방의 땅을 하사받았기 때문입니다.

 

상군商君은 타고난 자질이 각박한 사람이다. 그가 효공孝公에게 벼슬자리를 얻으려고 제왕帝王의 치술로써 허튼 이야기를 한 것을 보면 그의 본바탕이 아님을 알 수 있다. 그는 총신을 통해 등용되었으며, 공자건孔子虔에게 형벌을 주었고, 위나라의 장군 공손앙公孫鞅을 옛 우정을 미끼로 사로잡았으며, 조량趙良의 말을 좇지 않았다. 이것은 또한 상군의 인정머리 없음을 충분히 나타내준다.

 

상앙은 사회개혁을 통해 봉건적 구제도를 철저하게 파괴하고 군주의 절대권력 확립에 필요한 혁신적인 조치를 강구했습니다. 그는 귀족들의 세습적 특권을 박탈하고자 했을 뿐만 아니라 절대군주의 존재를 위협하는 지식인들의 자율적이고 비판적인 사상 논의를 엄금할 것을 요청했습니다. 이런 일련의 강압적, 전제주의적 조처로서 상앙은 당시 낙후된 진秦나라를 정치적, 사회적, 경제적으로 부강하게 만들었으며 이것을 토대로 진나라는 후일 천하를 통일할 수 있는 역량을 갖추게 되었습니다.

상앙의 사회개혁을 강력하게 추진한 진나라의 효공이 죽자 상앙은 수구적인 관료세력의 반격을 받아 비참한 종말을 맞았습니다. 상앙은 법률의 효용이란 인간들의 상호투쟁과 변란을 방지하고, 동시에 인간들의 토지재산과 등급을 규정하기 위한 것에 있다고 주장했습니다. 따라서 군주와 관리의 사명은 인간들의 분쟁과 갈등을 법적으로 해소시킬 수 있는 강력한 법의 제정과 그 시행을 통한 사회적 안정의 확보와 유지에 있다고 설파하고 있습니다. 이 같은 신념하에 상앙은 전통적인 관습禮敎을 개혁 없이 인습하는 것에 반대했습니다. 그는 더 나아가 인간의 본성이란 근본적으로 실리타산적인 존재라는 현실적인 인간관에서 출발하여 유가의 주장처럼 인간의 실천적 도덕의지에 호소하는 덕치를 반대했습니다.

한韓나라 학자이자 정치가이며 사상가로 한나라의 소후昭侯를 섬겨 재상宰相으로서 15년간 나라를 태평하게 다스린 신불해申不害(?~기원전 341)는 독특한 술론術論을 지녔는데, 그 술術이란 군주가 뜻하는 바를 신하가 모르게 하여 상벌의 위력으로써 신하로 하여금 그 능력을 다하도록 하는 것이었습니다. 조나라 사람으로 제齊나라의 선왕宣王 때 직하稷下의 학사學士를 지낸 신도愼到(기원전 395~315)는 인간 사회의 권위를 중시하여 권위에 의해 세勢를 이용할 때야말로 사람은 자기의 능력에 관계없이 다른 사람을 제압할 수 있다고 말했습니다. 한비자韓非子는 상앙의 법, 신불해의 술, 신도의 세를 비판 종합하여 법가 이론을 완성했습니다. 이사李斯(기원전 280?~208)는 한비자의 이론을 전면적으로 계승하여 진秦나라의 지배에 구체적으로 적용했습니다. 한漢나라도 표면적으로는 유교를 국교로 한 덕치주의를 표방했지만 그 내실은 법치주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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