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자墨子의 사상은 공자孔子의 사상과 어떻게 다릅니까?
전국시대 초기의 사상가인 묵자墨子 및 그의 후학인 묵가墨家의 설을 모은 <묵자墨子>가 현존합니다. 유가가 봉건제도를 이상으로 하고 예악禮樂을 기조로 하는 혈연사회의 윤리임에 대하여, 오히려 중앙집권적인 체제를 지향하여 실리적인 지역사회의 단결을 주장하고 있습니다. <묵자>는 53편이라고 하나, <한서漢書>지志에는 71편으로 되었습니다. 최종적으로 성립된 건 한漢나라의 초기까지 내려간다고 추정됩니다. 그 내용은 다방면에 걸쳤으나, 중심이 되는 것은 상현尙賢, 상동尙同, 겸애兼愛, 비공非攻, 절용節用, 절장節葬, 천지天志, 명귀明鬼, 비악非樂, 비명非命의 10론十論을 풀이한 23편입니다.
겸애兼愛란 사람은 자신自身 자가自家 자국自國을 사랑하듯이 타인他人 타가他家 타국他國도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비공론非攻論은 여기서 비롯되었습니다. 유가儒家의 인仁이 똑같이 사랑愛을 주의主意로 삼으면서도 존비친소尊卑親疎의 구별이 있음을 전제로 하는 데 반해, 겸애는 무차별의 사랑인 점이 다르고, 또한 사랑은 남을 이롭게 하는 것이지만, 그것은 이윽고 자신도 이롭게 한다는 겸애교리兼愛交利를 풀이한 것입니다. 절용節用은 사치를 삼가고 생산에 힘쓰며 소비를 줄이라고 설파하는데, 구체적으로는 장례를 간소하게 치르라는 절장론節葬論과 음악音樂을 허식이라 하여 물리치는 비악론非樂論으로 전개됩니다.
공자孔子(기원전 551-479)가 춘추시대 말기의 사상가인데 비해 묵자墨子(기원전 480?~390?, 이름은 적翟. 그의 행적은 분명하지 않습니다)는 전국시대(기원전 475-221) 초기의 사상가입니다. 춘추전국시대의 사회적 변화를 공자와 묵자 모두 사회적 위기로 보았습니다. 공자는 당대를 천하무도天下無道로 보았고, 묵자는 불인不仁, 불의不義의 이기적, 파멸적 사회로 보았습니다. 공자가 서주西周 이래의 예禮, 악樂 등에 나타난 귀족지배층의 통치인 덕치德治 이념을 통해 회복維新하려고 노력한 데 반해 묵자는 귀족지배층의 예禮와 악樂을 철저히 부정하고 유가儒家의 덕치德治 이념 대신에, 생산에 참여하는 모든 만민의 철저한 공동적 연대와 그를 통한 상호 이익의 증진 속에서 사회의 문제를 해결하고자 했습니다.
묵자가 바라본 사회의 가장 심각한 문제점은 생산활동에 직접 종사하고 있는 일반 백성이 기본적으로 삼환三患을 알고 있다는 사실이었습니다. 삼환이란 “배고픈 자가 먹지 못하고, 추운 자가 옷을 입지 못하며, 노역하는 자가 쉬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묵자는 삼환을 해결하기 위해 겸상애兼相愛, 교상리交相利를 주장했습니다. 묵자는 모든 구성원들 상호간의 사랑인 겸상애兼相愛와, 아울러 상호간의 물질적 이익 증대를 뜻하는 교상리交相利를 통해서 사회적 혼란을 바로잡을 수 있다고 보았습니다. 간단히 말해 공자가 통치자 계층의 도덕성 제고에 관심을 가졌다면, 묵자는 피통치자 계층의 민생 문제에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 같은 민생의 해결이라는 공리주의적인 입장에서 묵자는 한가한 예술적 정서, 즉 악樂의 추구보다는 만민이 생산에 종사할 것을 역설했습니다. 묵자 사상의 특유함은 인간의 본질을 노동하는 존재로 본 것입니다. 묵자가 말한 의義는 만민이 노동을 통해 자기소유를 확보하고 서로 물질적 이익을 도와주는, 즉 만민 평등의 겸상애兼相愛의 관점에서 서로가 물질적으로 돕고 사는 교상리交相利의 현실적 실현에 있었던 것입니다. 묵자는 나아가서 인간의 운명론을 배격하고, 인간사회의 모든 문제가 천명天命의 문제가 아니라 인간의 노력 여하, 즉 강强, 불강不强의 문제였습니다. 따라서 인간은 스스로 자기문제의 해결을 위해 힘을 써야强 한다면서 인간의 실천적 노력을 특히 강조했습니다.
급격한 사회변화에 의해 사회구성에 항구적인 제도가 결여된 과도기적인 춘추전국시대에 만민 평등의 공리주의와 현자賢者 독재론을 표방한 묵가의 학설은 유가의 학설과 대항하면서 상당한 영향력을 발휘했습니다. 그러나 과도기가 끝나고 진한秦漢 이래로 토지사유를 중심으로 하는 지주, 관료계층의 엄격한 가부장적 신분사회로 정착되면서 사회의 상하계층적 차별을 무시하고 만민공동의 공리를 주장하는 묵가의 학설은 그 기반을 잃게 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