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엘리트주의

이 절에서는 앞에서 말한 아리스토텔레스의 견해에 숨어 있는 문제가 무엇인지 살펴보려 한다. 첫 번째 문제는 어떤 활동이 다른 활동보다 더 가치가 있다는 주장에는 비평의 여지가 있다는 점이다. 이런 비평은 “어떤 것이 정말로 가치 있다는 것을 누가 결정하는가?”라는 의문에서 시작한다. 예를 들어, 영국에서는 이런 비평의 한 갈래로, 사람들이 고상한 활동이라고 말하는 것은 사실상 상류층의 전유물인 활동을 가리키며, 그런 활동을 하고 싶어 한다는 건 상류층이 되고 싶다는 것과 같다는 말을 흔히 듣는다. 이를테면 어떤 사람들이 ‘좋은 취향’을 지니고 있음을 인정한다는 것은 곧 그들을 우리와는 아주 다른 상류층에 속하는 사람들로 인정한다는 뜻이 된다. 영국인은 좋은 취향을 가졌다는 말을 대부분 좋은 매너를 지녔으며 정통 영어(특정 종류의 억양과 더불어)를 쓴다는 뜻으로 이해한다. 영국 텔레비전 방송에서 하류층의 억양을 쓰는데도 매너가 좋다는 사회자를 보았는가? 이런 식의 비평론은 좋은 취향 내세우기가 지배층이 하류층에 대한 지배력 장악의 방편이라고 주장한다. 이렇게 보면, 계층 간 공개적인 전쟁은 아니더라도 이론 간 전쟁이 벌어질 수밖에 없다. 그리고 하류층이 좋은 취향이나 바
람직한 생활양식에 관한 지배층의 관념을 받아들이는 순간, 이 전쟁의 승리는 지배층에게 돌아간다. 따라서 이러한 비평의 논지에 따르면, 어떤 활동이 다른 활동보다 가치 있다는 아리스토텔레스의 견해를 받아들이는 순간, 우리는 알지 못하는 사이에 지배층에 아부하는 처지가 된다. 그리하여 어떤 방식으로 살아야 하는가에 대해 그들의 결정만 바라봐야 하는 게임에 발을 들여놓는 셈이 된다. 어떤 생활방식이 다른 생활방식보다 가치 있는지에 대한 판단은 실상 개인이 결정할 문제다. 그렇지 않은 방향으로 이끌리는 움직임은 단순한 엘리트주의나 속물주의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
이 비평은 두 가지 방식으로 이해할 수 있다. 하나는 비평하는 사람이 어떤 활동이 다른 활동보다 가치 있다는 아리스토텔레스의 견해를 수용하면서도 무엇이 가치 있는가 하는 문제가 지배층의 사고에 휘둘린다는 주장이다. 지배층은 자신들의 생활방식을 좋은 취향의 표준으로 내세워 지배력을 유지하려 한다. 이 견해는 사회주의 관점에서 자
본주의 사회를 비판하는 사람들이 전통적으로 내세워온 논리의 바탕이 되었다. 예컨대, 오늘날 자본주의 사회에서 ‘좋은 취향’은 귀족주의 풍을 띠면서 한편으로는 큰돈을 들여 ‘최신형 제품을 선뜻 사서 쓰는 것’으로 부유함을 과시하려는 태도와 연결된다. 사회주의 견해를 지닌 사람들은 가치 있는 활동은 수입이나 귀족주의와는 아무 관련이 없다고 주장할 터이다. 가치 있는 활동은 누구에게나 열려 있는 공동체, 우정, 교육 같은 것과 관련되어 있다는 것이다. 이 견해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이론을 거세게 비평하려 하지 않고, 어떤 활동이 다른 활동보다 가치 있다는 주장을 수용하면서, 한편 지배층의 사고방식에 쉽사리 휘둘리지 말라고 경고한다. 어떤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될 때에는 그 생각이 어디에서 나왔으며 신뢰할 만한 생각인지 늘 자신에게 물어보라고 권고한다.
그렇지만 더 과격한 비평가들은 어떤 것이 다른 것보다 가치가 있다는 생각 자체를 배격한다. 이런 관점에서는 좋은 취향이란 있을 수 없다. 존재하는 것은 주관적 의견일 뿐이다. 어떤 이는 푸시핀을 즐기고 어떤 이는 시를 좋아한다. 이 비평은 어떤 이는 자신의 견해를 객관적인 것으로 잘 포장하여 다른 이들이 쉽게 받아들이도록 하는데(다
른 이들을 움직이는 힘을 확보하기 위해서이리라), 이것이야말로 환각이 아닐 수 없다고 주장한다. 호소력이 있는 객관적인 기준이 없다는 것이다. 좋은 취향이란 있을 수 없으며 개인적 취향만이 있을 뿐이다. 이 급진적인 견해는 미셸 푸코(푸코는 지식에 관한 모든 주장은 힘을 얻으려는 술책에 지나지 않는다고 설파한다.7)) 같은 사상가들과 연결되어 있으며, 아리스토텔레스의 이론을 철저히 거부한다. 하지만 이 대목에서 우리는 다음과 같은 의문을 제기하지 않을 수 없다. 어떤 활동이 다른 활동보다 가치 있다는 생각을 버린다면 사회 비평이 설 자리가 얼마나 남을까?
비평적 사회이론들은 전통적으로 압제자의 사슬에서 인간성을 해방하려면 사회개혁이 필요하다고 주장해왔다. 이런 관점에서 볼 때, 현대의 자본주의 사회가 갖는 문제는 그것이 인간의 잠재력을 제약하여 생활방식을 비좁은 테두리에 가둬놓는다는 것이다. 또한 그 이유가 불가피해서가 아니라 특정 사회(예를 들어, 계급) 구조를 유지하기 위해서라는 것이다. 이런 식의 사회이론은 전형적으로 어떤 형태의 혁명적 변화를 거쳐서라도 인간의 잠재력이 실현되는 더 나은 상태를 실현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인간의 ‘잠재성’에 관한 이런 사고 자체가 아리스토텔레스적이다. 그들은 인간의 활동에는 중요한 것이 있고, 현재 사회에서 허용되지 않는 활동 또한 있다고 전제한다. 이와 같은 아리스토텔레스의 이론을 포기한다면 정작 나쁜 일이란 것이 있는지에 대한 의문
이 제기될 것이며, 특히 삶에서 진정으로 가치 있는 것을 추구할 수 있는 대안을 찾기가 더욱 어려워질 것이다.
여기서는 급진적 비평론을 더 깊게 파고들지 않겠다. 과연 무엇이 의미가 있고 가치가 있는지를 가려낼 객관적인 기준을 내놓기가 어렵기 때문이다. 의미 있는 관념이라는 것을 만든 것은 분명 인간이다. 인간을 떠나서 의미 있는 것은 세상에 있을 수 없다. 우주는 수많은 분자들이 존재하면서 그것들의 활동이 이루어지는 장소일 뿐, 의미를 위한장소가 아니다. 어떤 의미에서는 틀림없는 사실일 터이다. 신의 존재를 믿지 않거나 우주에 어떤 의미를 부여해야 한다고 생각하지 않는다면, 더욱 그렇게 보일지 모른다. 하지만 동시에 우주는 우리가 하는 일의 의미를 찾을 수 있는 곳이기도 하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이 말의 뜻을 더 분명하게 설명하기 위해, 사물의 가치에 대한 생각이 바뀌는 사례를 떠올려보자. 나는 재즈를 좋아하지 않았는데 새로 나온 앨범을 들어보라고 거듭 권하는 친구 때문에 그것을 ‘듣게’ 되었다. 또 어느 날 디킨스가 훌륭한 소설가인지 아닌지에 대한 생각이 뒤바뀌었다. 몰타 위스키를 처음 마실 때는 재떨이에 술을 따라 털어넣은 듯한 맛이었는데 어느 샌가 무척 고상하고 놀라운 맛이 되었다. 어찌 된 일인가? 두 가지로 설명할 수 있다. 하나는 내가 알지 못하는 사이에 마음이 바뀐 것이다. 어느덧 위스키 맛과 재즈 소리에 익숙해진 이유다.
또 다른 설명은 새로운 것들을 차례로 배우고 익혔다는 것이다. 디킨스의 책을 감상이나 재미로 건성건성 읽은 것이 아니라 주인공의 수난에서 드러나는 저자의 인간성과 동정심을 이해한 탓이다. 두 번째 방식으로 사물을 설명할 때, 취향을 단순히 개인의 견해에 따른 문제로 치부할 수 없다. 취향도 발전할 수 있는 것이며, 교육을 거쳐 훈련된다는 생각이 바탕에 깔린 것이다. 이러한 활동을 거치면서 의미와 경험을 찾을 수 있다고 생각해야 한다. 이런 경험을 할 가능성이 있기에, 아리스토텔레스의 견해를 완전히 부정하기가 어렵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