쾌락주의: 쾌락의 요구 원칙

 

 

 

 

일부 사상가들은 인간의 삶이 기본적으로는 동물의 그것과 똑같은 바탕 위에서 이루어진다는 사상을 기꺼이 받아들였다. 그리고 이것이야말로 이제 살펴보려는 쾌락주의 이론이 힘을 얻은 이유 가운데 하나다. 인간의 쾌락pleasure에 초점을 두는 ‘쾌락주의hedonism’는 수없이 다양한 형태의 철학 이론으로 등장한다. 심리학적 쾌락주의는 인간이 궁극적으로 쾌락을 누리려는 욕망과 고통에 대한 두려움에서 움직인다고 본다. 이것은 인간의 동기, 즉 우리를 움직이게 하는 것에 관한 경험론적 가설이라 할 수 있다. 따라서 다른 동물의 행태에 관한 연구에서 발상을 얻었거나 다른 동물의 생태에서 나타나는 현상이 인간에게도 나타날 것이라는 가정에 바탕을 두었을지 모른다. 윤리학적 쾌락주의쾌락주의의 또 다른 형태다. 경험론적 가설이라기보다는 규범론에 가
까우며, 인간은 다만 쾌락을 쫓거나 괴로움을 피하고자 움직이는 존재가 아니라 마땅히 그래야 하는 존재라고 주장한다. 윤리학적 쾌락주의자들은 인간이 마땅히 해야 할 일은 쾌락을 극대화하고 고통을 극소화하는 일뿐이라고 주장한다. (그러므로 윤리학적 쾌락주의자들은 자신의 쾌락을 추구하려는 욕구와의 충돌을 무릅쓰면서까지 다른 사람에 대한 도덕적 의무에 충실해야 한다는 주장을 열성적으로 내세우지는 않았다.) 그런가 하면 또한 갈래의 쾌락주의는 동물의 행동 연구에 바탕을 두고 있으면서 규범론의 테두리에 들어간다. 이 이론은 우리가 마땅히 해야 할 바에 관해서가 아니라, 전반적으로 봤을 때 인간에게 최상의 이익과 행복이 어디에 있는지를 논한다. 공리주의적 도덕론의 고전적 형태에 가까운 쾌락주의다. 공리주의자들은 우리의 도덕적 의무가 자신만의 행복이 아닌 전체의 행복을 최대화하는 데 있다고 주장했다. 제러미 벤담Jeremy Bentham과 존 스튜어트 밀John Stuart Mill이 옹호해 마지않은 공리주의 이론은 행복을 쾌락으로 이해하는 편이 가장 좋다고 했다. 이런 형태의 쾌락주의에 따르면, 쾌락이 클수록 더 행복하고 괴로움이 클수록 덜 행복하며 인간의 선과 악은 오직 이것에 좌우된다. 이제부터 이 세 번째 쾌락주의를 살펴보자.
쾌락주의 견해의 이점 하나는 시시포스의 모습에서 느껴야 했던 두려움을 떨쳐버릴 수 있다는 점이다. 인간의 선이 오로지 쾌락에 있다면 인간의 삶은 시시포스의 경험과는 다르며, 설령 비슷해보인다 해도 그리 걱정할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결국 인간의 삶은 지독하게 운이 없는 경우가 아니라면 시시포스의 삶처럼 끝없이 불행하지만은 않
을 것이다. 시시포스의 삶에는 아무런 희망이 없고 오직 끝없는 노역만 있을 뿐이다. 한편 우리에게는 여러 가지 쾌락의 근원이 있다. 내가 잘쓰는 표현으로 지독히 운이 없는 경우가 아니라면, 사람들 대부분이 살아가는 동안 성생활, 맛있는 음식, 수면, 운동, 경기 등 수많은 쾌락을 누린다. 이렇게 보면 우리 삶은 대체로 그리 나쁘지 않으며 시시포스의 삶보다 훨씬 낫다고 확언할 수 있다. 그렇다고는 해도, 어떤 면에서는
우리의 삶이 시시포스의 삶과 닮았음을 쾌락주의자들조차 인정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쾌락 특히 강도가 높은 쾌락은 오래가지 못한다. 인간의 삶은 연속적이면서 반복적으로 쾌락을 추구하는 듯 보인다. 우리가 찾는 쾌락은 다양한데, 이 다양함이 삶의 활력소가 되기도 한다. 하지만 이런 관점에서는 인간의 삶을 끝없이 쾌락만 추구하는 것으로 그려낼 수 있음을 쾌락주의자들은 인정해야 한다. 쾌락주의의 견해는 ‘무엇 때문에 그러는가?’라는 의문에 대해 깊이 있는 대답을 마련하지 않은 채, 그저 쾌락을 누리고 괴로움을 피하는 것만 목적으로 삼는다. 여기에는 쾌락 말고는 다른 목적이 없다는 단순미가 있다. 인간의 삶에 무엇인가가 더 있어야 하지 않느냐는 의문에 대하여 ‘아무것도 없다’는 경쾌한 대답만 준비하고 있을 뿐이다. 즉 쾌락만이 우리에게 필요한 모
든 것이라고 한다.
지금까지 살펴본 쾌락주의에는 나름의 이점이 있음을 앞서 지적한 바 있다. 이 견해는 인간의 삶과 노력이 동물 세계에서 벌어지는 현상과 무척 비슷함을 보여준다. 또한, 인간의 삶에는 쾌락을 추구하고 괴로움을 피하는 것 이상의 의미가 필요하지 않으므로 시시포스의 모습에서 나타나는 인간 존재의 무의미함과 허망함에 관해 전혀 마음 쓸
필요가 없다고 권고한다. 그렇다면 쾌락주의의 견해를 따라야 할까? 삶 가운데 우리가 바라 마지않는 것이 정말 쾌락뿐일까?

이 주장이 옳은지를 가리기 위해 이제 두 가지 사고에 관한 실험을 볼 터이다. 첫 번째 실험은 인간의 생물학적 탄생과 성장이 자연적으로 이루어지지 않는 미래사회를 하나 만드는 것이다. 시험관을 통해 인간을 대량 생산한 다음 성장 과정을 통제하여 이들의 지능과 독창적 사고력의 정도를 조절한다. 사회가 요구하는 직무를 수행하는 가운데 쾌락을 찾는 인간을 길러내어 사회에서 쾌락의 총량을 극대화하고 괴로움의 총량을 극소화하려 하기 위해서다. 쾌락주의자들이 이 광경을 본다면, 인간의 삶에 강요된 좌절을 문제로 삼을 터이다. 인간은 성공 전망이 불투명한 데서 쾌락을 찾으려 한다. 인간은 어떤 특별한 사람에게서 사랑받는 일, 복잡하고 어려운 기술을 배워 숙달하는 일, 또는 그 밖의 갖가지 경쟁 마당에서 이기는 일 따위에 눈길을 빼앗긴다. 이런 것들을 쾌락의 근원으로 삼는 사람들 가운데 온전히 성공을 거둔 극소수 사람들을 제외한 대다수 사람들은 좌절에 부딪히고 말 터이다. 이런 사회에서는 인간을 운명에 길들여놓는 것이 해법이다. 아무리 지루하고 답답한 일일지라도 주어진 직무를 충실히 수행하면서 쾌락을 누리도록 조절해둔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런 사회는(이 사회가 올더스 헉슬리의 『멋진 신세계』를 대본으로 삼고 있음을 알 것이다) 다양한 등급의 인간을 길러 내어 다양한 직무에 배정한다. 그 결과, 아무리 비천한 직무라하더라도 즐겁게 수행한다. 여가를 즐길 기회를 맞이하면 훨씬 더 감각적이고 환상적인 경험을 즐기게 된다.
이 같은 사회에서 주어진 쾌락을 누리며 살아가는 사람들은 그 세계를 천국으로 여기겠지만, 다른 시각에서 보면 꿈의 실현이 아니라 악몽일 수 있다. 우리가 삶에서 가장 귀중하게 여기는 것을 포기하는 대가로 최대의 쾌락과 최소의 괴로움이 이루어졌기 때문이다. 다시 말하자면, 인간의 삶에 의미를 부여하는 것으로 여겨지는 것을 잃어버린 것이다. 헉슬리의 소설에서 주인공 격인 존 더 새비지John the Savage는 셰익스피어 작품 한 권을 들고 이 기괴한 세계에 등장하지만, 문학과 예술, 음악 따위에 관한 의식은 그만두고 셰익스피어의 작품 속 주인공을 움직이게 한 열정이나 야망조차 전혀 찾아볼 수 없다. 사랑, 기쁨, 성취,탐구, 야망, 질투, 분노……. 이 모든 것은 평균적인 쾌락의 요소로 포장되어 숨조차 쉬지 못한 채 짓눌려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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