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음이 나쁜 일은 아니라는 획기적인 주장

그런데도 일부 철학자들은 죽음을 나쁜 일로 받아들일까 하는 문제를 놓고 고민했다. 죽음이 나쁜 일이라면, 그 나쁜 일로 괴로움을 겪을 사람이 누구인지 알아낼 수 있을까? 어떤 사람이 그에 해당할지 알아낼 수 있는 건 그들이 죽기 전뿐이다. 사후에는 죽음이 그들에게 좋은 일이었는지 나쁜 일이었는지 가릴 방법이 없다. 이러한 난제를 풀려면 선과 악을 본질적인 것과 상대적인 것으로 나누어 생각해야 한다.
본질적인 선은 다른 사물과의 관계에 얽매이지 않고 좋은 일로 받아들일 만한 일을 말한다. 상대적인 선은 다른 사람, 사물, 주변 환경 따위와 어떤 관계에 있느냐에 비추어 설명할 수 있는 선이다. 예를 들어, 학급에서 1등을 했다면 좋은 일이다. 다른 사람들보다 뛰어나다는 증거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한 사람만 들여다봐서는 그 사람에게 좋은 일이 있는지 없는지 알 길이 없으며, 그의 주변을 살펴보아야 한다. 반면, 쾌감이 좋은 일이라고 가정해보자. 그가 쾌감을 어떻게 느끼느냐를 살펴본 후에야 그것이 좋은 일인지를 알 수 있다. 그의 주변까지 굳이 돌아보지 않아도 된다. 이런 관점이 죽음에 관한 논의에서 적절한 까닭은 다음과 같다.
죽음을 본질적인 악으로 여긴다면 거기에는 악이라 할 것이 전혀 없을 것이다. 그 사람이 놓인 주변 환경을 제쳐둔 채 단순히 그만을 들여다보고 죽음이 그에게 나쁜 일이라고 볼 것은 아니다. 그렇지만 죽음을 잠재적으로나마 상대적인 악이라고 생각한다면, 죽음이 아니었다면 일어났을 법한 다른 사실에 비추어, 과연 그 죽음을 나쁘다고 할지
의문을 품을 수 있다(흔히 오늘날의 철학자들은 이를 가리켜 ‘역사실적 가능성counterfactual possibilities’이라 하는데, 실제 일어난 일과 다르게 펼쳐질 법한 가능성을 말한다). 가장 확실한 예를 들자면, 죽었다는 사람이 죽지 않고 살아 있을 가능성이다. 이 경우, 죽음이 본질적인 악이라 하더라도 그에게는 나쁜 일이 될 터이다. 죽음이 아니었다면 일어났을 법한 시나리오만큼 죽음이 좋은 일이 아니라면 말이다.
루크레티우스와 에피쿠로스는 죽음이 나쁜 일은 아니라는 획기적인 주장을 내놓았다. 이에 대해 우리는 가치 있는 것을 앗아간다면 죽음은 나쁜 일이라는 답을 힘들게 찾아냈다. 설령 에피쿠로스 식의 논리가 그릇됐음을 안다 해도, 죽음이 나쁜 일임을 입증하려면, 과연 삶이 잃어서는 안 될 만큼 귀중한지를 살펴보아야 한다. 문제는 삶의 혜택이 무엇이냐다. 죽음에 관한 우리의 관심이 어디에 뿌리를 두는가를 알아내는 순간, 삶의 혜택에 관한 집착을 마주한다. 우리는 왜 살아 있음을 귀하게 여길까? 거기서 얻는 혜택은 무엇일까? 몇몇 사람의 삶이 다른 사람들의 삶보다 나을 수 있을까? 삶을 낭비하는 일이 가능할까? 몇몇 사람의 목숨이 다른 사람들의 목숨에 비해 가치 있다고 판단하는 것을 받아들일 수 있을까? 몇몇 사람의 삶이 다른 사람들의 삶보다 더 의미가 있을까? 이러한 문제들을 지금부터 살펴보려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