루크레티우스는 말한다

 

 

 

네 앞날에 고통과 번민이 기다리고 있다는 건 네가 존재하는 것으로, 때가 되면 차례로 겪게 되느니. 하지만 죽음은 모든 수난을 견뎌온 우리의 존재를 부정하고 이러한 운명의 굴레에서 우리를 구출한다. 그로부터 우리에게 안식이 찾아오고 죽음을 두려워할 까닭이 없어진다. 사라지지 않는 죽음이 언젠가는 사라지기 마련인 삶을 앗아가는 순간, 더는 존재하지 않는 자에게 고통이 있을리 없으며 처음부터 태어나지 않은 자와 다를 바가 없게 된다. 우리가 태어나기도 전에 지나가 버린 영원함을 돌아보라. 그리고 그것이 우리를 아무것도 아닌 것으로 얼마나 철저하게 여기는지를 새겨 보라. 이것이야말로 대자연이 우리를 비춰 주는 거울인 것이다. 우리는 이 안에서 사후에 이어질 시간을 보게 된다. 그 속에 우리를 겁에 질리게 하거나 우리의 기를 꺾는 그 무엇이 있을
까? 깊은 수면보다 편안하지 않은 그 어떤 것이 그 속에 있을까?

 

이들 주장에는 두 갈래의 큰 줄기가 있다. 첫 번째 주장은 에피쿠로스와 루크레티우스 두 사람이 다 같이 내세운 것으로, 고통은 살아 있기 때문에 겪는 것으로 죽음이 고통을 멈추게 한다는 것이다. 즉 ‘죽음이 운명의 굴레에서 우리를 구출한다’는 말이다. 두 번째 주장은 루크레티우스의 말 가운데 두 번째 문단에 나오는데, 태어나기 이전의 존
재하지 않음과 사후의 존재하지 않음이 정확하게 닮은 꼴이란 사실이다. 태어나기 이전에 존재하지 않음을 걱정하지 않았거늘, 사후에 존재하지 않을 것을 왜 걱정하는가. 결국, 두 가지 주장은 매우 유사하며, 존재하지 않음은 더도 덜도 아닌 그냥 존재하지 않을 뿐이라는 생각이다.
그렇다면 이러한 주장을 그대로 받아들일 수 있을까? 이들의 주장은 정말로 죽음이 나쁜 일만은 아님을 입증할까? 사실 이들의 주장에는 숨겨진 가정이 있으며 이를 파헤쳐보면 문제가 있음을 깨닫게 될 것이다. 죽음은 고통의 근원이 아니라는 사실을 보여주는 첫 번째 주장은 옳은 주장이다. 고통은 의식이 있고 또 살아 있어야 느끼는 것인데, 죽음은 그럴 가능성을 없애준다. 하지만 이 주장의 밑바탕에 흐르는 가정은 고통을 일으키는 것은 나쁜 것이며 죽음이 사람에게 고통을 주지 않으므로 나쁘지 않다는 점이다. 이 주장이 과연 옳은가 하는 의문을 품지 않을 수 없다. 이 가정을 뒤집어서 말하면 ‘알지 못하는 것은 해를 끼치지 않는다’는 말로, 곧 ‘모르는 게 약’이란 뜻이다. 솔직히 이런 주장은 고작해야 절반만 옳을 뿐이다. 한 여인의 친구들이 그녀의 뒤에서 헐뜯기를 일삼는다고 상상해보자. 아무도 그녀를 좋아하지 않으면서 겉으로만 다정한 체할 뿐이다. 다정한 체하는 친구들인 줄 모르고 아무런 괴로움도 느끼지 못하는 여인을 딱하게 여겨야 하지 않을까? 또 다른 예를 생각해보자. 어떤 사람이 오토바이 사고로 머리를 다쳐 지적 수준이 어린아이 정도로 낮아졌다고 하자. 이 사람은 별다른 고통을 느
끼지 못한다. 잘 먹고 편안하게 지내는 한 마냥 행복할 터이다. 하지만 우리는 그의 처지를 보고 안됐다고 여긴다. 따라서 우리에게 고통을 자아내는 것이 나쁜 것이라고는 할 수 없다. 죽음이 고통을 멈춰준다는 루크레티우스와 에피쿠로스의 주장이 일리가 있긴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죽음이 나쁜 일은 아니란 것을 입증하지는 못한다.
루크레티우스의 또 다른 주장에 따르면, 우리는 존재하지 않는 상태를 두려워할 이유가 없다. 그렇다면 이 말은 죽음이 나쁜 일이 아니란 뜻인가? 이 주장에 대한 우리의 답은 앞서 의문에 대한 답과 비슷하다. 비존재의 상태는 그 자체로서 전혀 나쁠 게 없다. 루크레티우스가 말했듯이, 태어나기 전의 비존재에 대해서는 걱정할 일이 없기 때문이다. 정작 문제는 죽음을 나쁜 일로 보는 까닭이 순전히 비존재의 상태가 나쁜 것이기 때문인가다. 지금까지 살펴본 주장에는 이러한 가정이 숨어 있는데, 다시 돌아보면, 그 가정의 타당성에 의문을 품지 않을 수 없다. 죽음을 걱정하는 것은 죽는 일 자체를 걱정해서가 아니다. 사실 죽음 자체는 별것이 아니다. 죽음을 두려워하는 이유는 다시는 친구들을 볼 수 없고, 맛있는 음식을 먹을 수 없으며, 생각하고 느끼고 계획을 짜고, 달릴 수 없기 때문이다. 죽음에 기가 죽는 건 바로 이런 것들 때문이다. 내가 이 순간 가치 있게 여기며 실행하던 모든 일을 사후에는 영영 할 수가 없어서다.
루크레티우스와 에피쿠로스의 주장은 죽음에 관한 우려의 참된 근원을 다루지 않았다는 데 문제가 있다. 우리가 죽으면 그때까지 누리던 모든 것을 잃는다. 죽음을 나쁜 일로 여기는 이유는 가장 귀중하게 여기는 것들을 잃어야 하기 때문이다. 죽는 것 자체야 고통스럽지 않을지 모르고, 죽음 뒤에 꼭 나쁜 상황에 놓이지는 않을지도 모른다. 하지
만 삶을 잃어버리는 일을 나쁜 일이 아니라고는 말할 수 없다. 오토바이를 타다가 뇌상을 입은 사람은 자신이 잃은 것 때문에 고통을 받지 않을뿐더러 지금의 처지가 불쾌하지도 않다. 하지만 그의 처지가 안타까운 사실은 사고가 나지 않았을 때의 처지와 비교해서 잃은 것이 너무 많기 때문이다. 죽음에 대해서도 같은 이야기를 할 수 있다. 어떤 이의 죽음이 그 사람에게 나쁜 일이었는지 판단하려 할 때 우리는 죽지 않았더라면 그가 어찌 되었을지 생각해보아야 한다. 그 사람이 누릴 뻔 했던 삶의 혜택을 죽음이 앗아갔다면, 그의 죽음은 나쁜 일이라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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