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죽음은 정말 나쁜 일인가

먼저 죽음이 정말 나쁜 일인지, 그렇다면 그 이유를 생각해보자. 이렇게 암울한 주제에서 출발하는 까닭은 죽음이 왜 나쁜 일이며, 죽음을 왜 두려워하는가를 생각해보는 것이야말로 삶의 가치가 무엇인지 밝혀내는 데 도움이 되기 때문이다. 따라서 죽음이 죽어가는 자에게 나쁜 일인가 하는 문제를 집중적으로 다루고자 한다. 사람이 죽을 때면 뭔가 나쁜 일이 일어나는 것일까? 한 사람의 죽음은 남은 이들에게 사랑하는 사람을 잃었다는 충격과 더불어 큰 영향을 미친다. 그러므로 죽음이 왜 나쁜 일인지는 그들에게 미치는 영향으로 설명할 수 있다.
하지만 죽음을 앞에 둔 사람에게 나쁜 일이 일어나고 있다고 생각해야 할까? 위로하려고 하는 말이기도 하지만, 우리는 죽어가는 자에게 그 죽음이 나쁜 일이 아닐지도 모른다는 역설적인 견해를 가질 수 있다. 사람이 죽으면 슬퍼해봐야 별 수 없다는 변명은 그래봤자 너무 늦은 일이라는 순리적인 사고를 인정하는 데서 출발한다.
인간은 죽음의 두려움에 사로잡혀왔다. 윌리엄 던바1가 1504년에 발표한 위대한 시 「시인의 죽음을 슬퍼하노라Lament for the Makaris」에 나오는 다음 구절을 생각해보자.
나 건강했고 즐거움에 넘쳤건만
이제 큰 병을 얻어 괴로움을 안고
무기력에 빠진 채 창백한 얼굴로
죽음의 두려움에 떨고 있네
이 시에서 던바는 자신이 사랑하던, 그동안 알고 지냈던 시인들의 죽음을 슬퍼한다. 그들은 차례로 죽어갔다. 그리고 언젠가는 자신에게도 죽음이 찾아오리라는 생각을 한다. 시인은 자신이 한때는 건강했고 행복했건만 이제는 병들고 쇠약해져 죽음의 두려움에 떨고 있음을 심란해한다. 늙은이라면 누구나 이런 경험을 할 터이다. 하지만 이런 경우가 아니더라도 영원히 살 수 없다는 사실을 안다면 죽음의 두려움 앞에서 초연할 사람은 없을 것이다. 살아 있는 이상 죽음은 반드시 거쳐야 할 길목이다.
인간은 피할 수 없는 죽음의 두려움을 극복하기 위한 방편으로 사후의 삶을 그려보기도 한다. 사후에 어떤 일이 일어날지 불확실하지만, 삶이 무한정 지속될 수 있다면 극단적인 파멸을 내다볼 일은 없으리라. 하지만 여기서는 사후에 또 다른 삶이 있는지에 관해서는 논의하지 않을 터이다. 또한, 죽음에 관한 논의를 진행하면서, 우리의 논의 목적에 맞게 ‘죽음’이 극단적이고 돌이킬 수 없는 절멸을 뜻한다고 가정할 터이다. 사후에는 삶이 없다고 생각해서가 아니라 사후에 삶이 있느냐 없느냐 하는 문제는 여기서 논할 바가 아니기 때문이다. 우리의 진정한 관심은 무엇이 삶을 가치 있게 만들어 주는가다. 결국, 우리 존재가 돌이킬 수 없는 종말을 맞이한다면, 우리 안에 있는 그 무엇이 죽음을 부정적으로 보게 하는가를 고민하고 그 문제에 집중하는 편이 바람직하다.
이런 맥락에서 고대의 두 철인 에피쿠로스2와 루크레티우스3가 내세운 주장을 살펴보아야 한다. 두 사람은 인간이 죽음에 관심을 두지 않아도 된다고 했다. 일단 자신의 상황을 바르게 이해하면 두려움이나 분노 같은 파괴적인 정서에 휩쓸릴 필요가 없음을 이내 깨달을 것이라고 주장했다. 그러면서 이들은 고요한 사색의 삶을 추구했고 여기서 가장 중요한 부분은 죽음의 두려움을 극복하는 것이다. 이들의 주장을 대표하는 몇몇 구절을 살펴보자. 에피쿠로스는 말한다.
죽음을 아무것도 아닌 것으로 여기도록 네 자신을 스스로 길들이라. 선과 악을 구별하는 건 인간의 지각이지만, 죽음은 모든 지각을 앗아 가느니. 그러므로 죽음이란 모든 악 가운데 가장 두려운 악이로되, 우리가 존재한다면 죽음이 오지 않은 것이고, 죽음이
오면 우리는 존재하지 않는다. 따라서 죽음은 우리에게 아무것도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