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이드 쿠틉과 유대인의 갈등

 

 

 

사이드 쿠틉에게 이슬람주의의 의미를 묻는 것은 마르크스주의가 마르크스에게 어떤 의미가 있는지 묻는 것과 같다. 서방세계에서 이슬람주의 조직을 지지하는 사람들이 주장하듯, 그는 주변적인 인물이 아니었다. 이슬람주의를 진지하게 연구하고 싶은 사람이라면 쿠틉의 문헌을 외면할 수 없기 때문이다. 십수 권의 소책자로 된 그의 저작은 이슬람세계의 거의 모든 언어로 번역되었다. 동남아시아나 중앙아시아, 유럽 및 중동의 서점에 있다면 그의 저서를 사볼 수 있을 것이다. 지금껏 찍은 부수만 수백만 부가 넘는다.
또한 쿠틉은 이슬람주의의 이데올로기에 유전된 반유대주의의 배후 지도자이기도 하다. 『유대인과의 투쟁Ma'rakutna ma'a al-Yahud』에서 그는 이슬람화된 반유대주의의 본질적 특징을 모두 열거했으므로 쿠틉의 반유대주의는 연구할 가치가 있다. 쿠틉은 주요 운동가이자 정치적 이슬람교가 융성하면서 환골탈태한 모델로 꼽힌다. 살라마 무사를 비롯하여, 이집트계 기독교 진보주의자들은 대량살상의 요소가 가미된 반유대주의자가 아니었다. 19세기의 레바논계 기독교인인 나집 아주리(1916년 사망) 등은 유럽식 반유대주의를 지지했다.— 예컨대, 아주리는 『아랍 민족의 각성Le Reveil de la nation arabe』(1904)에서 유대인에 대한 증오심을 불러일으켰다. 그러나 아주리는 외부에서 도입되어 더는 추가할 것이 없는 이데올로기를 번역한 데 지나지 않아 대중의 호응을 얻지는 못했다. 인기가 식은 까닭은 아주리가 아랍어가 아닌 프랑스어로 글을 쓴 기독교인이라서가 아니다. 아랍 및 무슬림세계의 현지 문화는 아직 반유대주의에 친숙하지 않아 그의 사상이 너무 난해하게 느껴졌기 때문이다.
범아랍 민족주의자들 중 사티 알후스리는 친독일 노선의 “아버지” 로 사이드 쿠틉에 빗댈 만한 인물이다. 기록에 따르면, 그의 추종세력은 이라크의 나치 독일과 손을 잡았으나 알후스리 자신은 반유대주의를 언급하지 않은 것으로 나타났다. 민족주의자들은 나치와 기꺼이 동맹을 맺으려 했는데,— 분명 비열한 짓이다— 그럼에도 반유대주의는 이슬람주의자들과 마찬가지로, 이데올로기의 중심을 차지하지는 않았다는 것이다.
범아랍 민족주의에서 이슬람주의로 전환된 계기는 1967년, 이스라엘이 아랍군을 소탕하여 패전한 세속주의 정권을 축출한 6일전쟁이었다. 수십 년간 변두리 이데올로기였던 이슬람주의는 돌연 힘과 호응을 얻게 되었다. 쿠틉은 세상을 떠나기 전에 이를 보지 못했다. 1966년, 그는 범아랍 민족주의의 영웅이자 이집트 대통령인 가말 압델 나세르에 의해 공개 처형되었으나, 반유대주의의 이슬람화를 위한 근간은 이미 마련된 상태였다.
쿠틉은 『유대인과의 투쟁』에서 무슬림이 유대인과 싸워야 하는 보편화된 전쟁을 거론하며, “물질적 소득도 없는데 기꺼이 자신의 목숨을 희생한다” 며 참전한 젊은이들의 공로를 치하했다. 그리고 유대인은 애당초 이슬람교의 주적인 데다 전쟁을 바라기 때문에 무슬림이라면 그들과 싸워야 마땅하다고 강조했다. 유대인은 이슬람교를 파괴하기 위해 사악함을 드러냈다는 이유로 비난받았다는 것이다. 쿠틉은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우리가 영원히 종식되지 않는 전쟁을 치르고 있는 까닭은 유대인이 더도 말고 덜도 말고 이슬람교를 진멸시키는 데에만 혈안이 되어 있기 때문이다. 이슬람교가 유대인을 정복한 이후, 용서를 모르는 그들은 갖은 모략과 술책을 구사하는가 하면, 이슬람세계를 상대로 비밀리에 대리전을 벌이기도 했다. 이스라엘 밖에서는 유대인이 군대를 조직하지 않았으므로 보편화된 전쟁에 군인은 투입되지 않는다고 그는 기술했다. “유대인은 무기를 들고 전장에 투입되는 것이 아니라, 사악한 근성 및 기만전술과 더불어, 중상모략과 음모와 술책 등을 동원하여 이념의 전쟁을 벌인다” 는 것이다. 따라서 민주주의와 글로벌 지하드 간의 “이념의 전쟁” 27은 서양 논객들이 지어내기도 했지만 이슬람주의자들이 스스로 창출해냈다고도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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