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론이 이슬람주의에 끼친 영향

그러면 미디어는 이 문제를 어떻게 바라보고 있는지 살펴보면서 이 장을 마칠까 한다. 우선 무슬림이 일부 장악한 보스니아가 이슬람주의자들의 손아귀에 들어간 경위를 보도한 기사부터 거론해야겠다. 보스니아에서 이슬람교가 겪은 운명은 서방세계가 이슬람주의에 어떻게 대응하고 있는지 알 수 있는 본보기가 된다.
보스니아도 한때는— 인도네시아의 민간 이슬람교나 세네갈의 아프리카계 이슬람교처럼— 토속적인 매력이 물씬 풍기는 종교생활을 실천해왔으나, 1992~95년 내전에서 유럽계 이슬람교도 대부분이 목숨을 잃고 말았다. 물론 세르비아인만 인종청소에 가담한 건 아니었다. 보스니아의 유럽계 이슬람교도들은 “십자군” 을 대적한다는 신념으로 형제를 구한다던 아랍계 무슬림에게 희생되었다. 유럽 이슬람교를 살라피의 와하비주의로 대체한 아랍계 아프간인 및 와하비 사우디인으로 알려진 성전주의자들도 일부 포함되었다. 오늘날, 초기 이슬람교는 소수 지역에서만 잔존해 있는 반면, 이슬람주의와 와하비주의는 보스니아와 코소보를 장악하고 있다.
1995년 이후, 사우디아라비아는 보스니아에 와하비 이슬람교를 장려하기 위해 5억 유로를 투입했다. 사라예보에서 으뜸가는 사원은 사우디 왕 파드의 이름을 딴 것이며, 전쟁 후 포교의 일환으로 건립된 마드라사٩ 신앙학교와 유치원은 전국에 우후죽순으로 늘고 있는 추세다. 그렇다면 서방세계의 언론은 이를 어떻게 보도하고 있을까? 예를 들어, 『인터내셔널 헤럴드 트리뷴』지는 2008년 12월 27~28일자 주말 에디션에서 “이슬람교의 부흥기를 맞은 보스니아” 라는 머리기사를 실었다. 이슬람교화 아젠다에서 전통의 창조가 “이슬람교의 부흥” 과 상통하는 모양이다. 그렇다면 “부흥은 무엇을 두고 하는 말인가?” 라는 질문에 대해 본지 기자는 다음과 같이 기술했다. “전쟁 전까지만 해도 전신을 가린 여성이나 긴 턱수염을 한 남성은 듣도 보도 못했지만, 요즘은 흔히 눈에 띈다.” 기자는 그 이유를 “정체성을 건전하게 주장하게 된 무슬림의 부흥” 에서 찾았으나, 실은 사우디 와하비주의가 추구하는 이슬람화의 결과라고 해야 옳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터내셔널 헤럴드 트리뷴』지는 이런 점을 축소하고 “이슬람교의 원리주의는 기우에 불과하다” 고 밝힌, 보스니아의 친사우디 이슬람교 법전 전문가mufti(무프티) 무스타파 세리스의 발언을 인용했다. 그리고 그것도 모자라 “보스니아 문화 및 정치의 이슬람화” 를 “전쟁 당시 세르비아인과 크로아티아인이 무슬림을 잔인하게 진압했던 사실을 정당화하기 위해 세르비아 민족주의자가 기도한 것” 이라고 일축한 “무슬림 지도자와 서양 분석가” 의 말도 인용・보도했다. 그러고 난 후 기자는 “미국, 당신네는 무슬림을 죽일 작정인가?” 라는 슬로건으로 마침표를 찍었다.
이 기사는— 그 밖에도 고를 만한 기사는 얼마든지 있지만— “이념의 전쟁” 이 벌어지고 있는 현 실정에서 이슬람주의와 이슬람교를 솔직히 말한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가를 실감케 한다. 이슬람주의자들은 자신들을 비판하는 논객들을 “이슬람혐오증 환자” 로 몰아세우는가 하면 포위된 이슬람교와 무고하게 희생된 무슬림을 들먹이기도 했다. 이는 일부 서양 학자와 여론주도자들이 희생자에 대한 동정심이 발동한 나머지 이런 중상모략에 가담한 결과로, 기독교인의 죄책감에도 영향을 미쳤다. 따라서 와하비주의와 이슬람주의를 지지하면서 보스니아의 유럽계 이슬람교가 말살될 것을 걱정한다면 여러분 역시 세르비아인의 대량살상에 가담한 동맹 취급을 받을 것이다.
그런데도 그런 위험은 감수할 가치가 있다. 기만 여부를 떠나서 이슬람주의자들은 신앙관이 다른 자들과는 말을 섞지 않는 데다, 서방 논객들과 의견이 다른 무슬림들을 각각 “십자군” 과 “불신자(쿠파르)” 라고 폄하하고 있다. 물론 서방세계에도 이슬람교에 대한 편견이 존재하므로 그들 역시 이를 바로잡기 위해 노력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이슬람혐오증” 은 이슬람주의의 손아귀에 넘어간 무기가 되어 이성적 담화나, 이슬람교의 편견을 제거하는 데는 별로 도움이 되지 않는다. 따라서 나는 이슬람혐오증을 “이
슬람 때리기” 로 바꾸고 싶다. 이슬람주의를 비판한다고 해서 이슬람교의 명예가 떨어지는 건 아니다. 예컨대, 이슬람교를 신봉하지 않는 무슬림도 정치색을 띤 이슬람교를 더 잘 이해하거나 격렬히 비판하기도 한다.
이 책은 독자가 이슬람주의를 고찰하여 이슬람주의자들의 전체주의 사상에 적절히 대응하는 데 보탬이 되기 위해 쓴 것이다. 나는 “온건파 이슬람주의자” 와 “테러리스트” 가 구별된다는 그릇된 가정에 근거한 이슬람주의를 좌절시키고 싶다. 이 같은 오류는 진보・민간 이슬람교 및 이슬람주의의 차이로 바꾸어야 할 것이다. 진보・민간 이슬람교는 “무슬림 사회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적지” 않으므로 비중이 적다고 지적한 『포린 어페어스』지의 기사는 옳지 않다. 서양 전문가들은 이슬람주의의 기만전술을 의식하고 그들의 발언을 무조건 액면 그대로 받아들여서는 안 될 것이다. 아울러 서방세계는 이슬람주의자들을 상대할 때 안보에 중점을 두되 진보주의 이슬람교와는 대화를 우선시해야 한다.
오바마 정부는 이슬람교와의 전쟁으로 변질되어 버린 “테러와의 전쟁” 을 폐지했으니 칭찬을 받아 마땅하다. 이슬람주의자들은 “포위된 이슬람교” 라는 인상을 널리 심어주기 위해 테러와의 전쟁을 은근히 바랐다. 그런데 미 행정부는 무슬림의 관심사에 더 관심을 두고 있어 핵심을 잘못 짚고 있다. “온건파 이슬람교” 로 가장한 이슬람주의를 달래기 위해 “종교의 자유를 제쳐두는 것” 50은 “테러와의 전쟁” 못지않게 위험하다. 그런 까닭에 패트릭 프렌치가 『뉴욕 타임스』지에 기고한 사설을 읽으니 좀 안심이 된다.
이슬람세계를 몸소 체험한 프렌치는 오바마 행정부가 “현실로 임박할 이슬람주의의 위협을 감지해야 한다” 며 “천년왕국을 신봉하는 이슬람주의자들은 현재 민족국가인 파키스탄을 파괴할 음모를 꾸미고 있으며, 이미 전략에서 승리했다고 믿는다. … 오바마 대통령은 파키스탄과 아프가니스탄에서 온건파의 세력이 기울기를 바라겠지만 파키스탄계 탈레반이 승리를 자축하고 있으므로 그의 뜻대로 되기는 어려울 것이다. … 따라서 그들과 상대하려면 당근을 건네는 것이 상책” 이라고 역설했다.51 이는 이슬람세계를 통틀어 이슬람주의가 겨냥하고 있는 민족국가라면 모두 적용될 것이다. 정책입안자들이 이슬람주의의 담화 조건에 굴복하지 않고 그들과 인연을 맺는다면 이슬람세계에 대한 서방세계의 입장은 전도유망하리라 본다. 이슬람교와 서방세계의 교량을 건설하려면 먼저 이슬람주의와 이슬람교의 차이를 인식해야 한다.
정책입안자와 학자들은 이슬람혐오증을 운운하는 이슬람주의자들에게 협박을 받아온 탓에 학자들은 모호한 입장으로 자신들을 보호했다. 『이슬람주의: 정치적 이슬람교를 둘러싼 쟁점Islamism: Contested Perspectives on Political Islam』(2009)의 공동 저자인 리처드 마틴과 아바스 바르제가르는 그들의 저서가 “이슬람주의에 대한 논쟁을 해결” 한다거나 “이슬람주의의 효용” 을 둘러싼 논쟁에서 어떤 입장도 취하지는 않는다고 밝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이슬람주의를 버린 두 저자, 이를테면 이슬람주의와 이슬람교의 차이에 “불쾌하다” 는 토를 단 도널드 에머슨과, “이슬람주의라는 용어를 사용하지 말아야 한다” 고 역설한 다니엘 바리스코를 설득했다. 『이슬람주의: 정치적 이슬람교를 둘러싼 쟁점』은 폴 버먼이 이슬람주의를 비판적인 시각으로 서술한 책에 나타난 의혹에 대하여 증거를 제시했다. “이슬람주의 조직은… 제삼자가 의당 생각하는 방식에 대한 분석 카테고리를 제 나름대로 끄집어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