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자漢字의 수입輸入과 이두문吏讀文의 창작
조선 상고上古에 조선인은 한자漢字를 썼을 것으로 추정됩니다. 한자漢字가 어느 때에 한반도에 알려졌는지는 알 수 없으나 한반도와 중국 대륙이 붙어있으므로 역사 기록記錄이 있기 전부터 중국인과 조선인의 왕래가 있었을 것입니다. 한자가 한반도에 유입된 것은 역사 기록 이전의 일이었을 것입니다. 단재 신채호는 왕검王儉이 아들 부루夫婁를 보내 도산塗山에서 우禹를 보고 금간옥첩金簡玉牒의 문자를 가르쳐주었는데, 그 문자는 곧 한자였을 것이므로 조선인이 한자를 사용한 것은 오래된 일이었다고 주장합니다.
조선인은 한자의 음音 혹은 뜻義을 빌려서 이두문吏讀文을 만들었습니다. 이두문은 국서國書 혹은 향서鄕書, 가명假名 등으로 불리었고, 고려 시대 이후에 비로소 이두문으로 불리었습니다.
흔히 이두문을 신라의 설총薛聰이 지은 것이라고 말합니다. 설총의 생몰연대는 알 수 없으나 그가 태종무열왕太宗武烈王 때인 654-657년에 태어나 경덕왕景德王 때까지 살았던 것으로 추정됩니다. 그의 아버지가 원효元曉이고 어머니는 요석공주瑤石公主로 알려졌습니다. 그의 신분은 6두품頭品 혹은 득난得難으로 두품층 가운데 가장 높은 등급이었습니다. 설총은 강수强首(?-692), 최치원崔致遠(857-?)과 함께 신라의 3대 문장가로 꼽힙니다.
유교정치 이념을 확립하는 데 큰 영향을 끼친 강수는 머리뼈의 생김새가 특이하여 무열왕이 그를 ‘강수선생’이라고 불렀다고 합니다. 설총과 같은 신분인 강수는 부모의 반대를 무릅쓰고 신분적으로 미천한 부곡釜谷의 대장장이 딸과 결혼할 정도로 진취적인 성향을 지녔다고 합니다.
경주 최씨의 시조 최치원의『난랑비서문鸞郞碑序文』은 유명한데 신라 시대의 화랑도花郞道를 말해주는 귀중한 자료입니다.
신채호는 설총 이전의 진흥황(540~575) 순수비에도 이두문이 발견되므로 설총 이전에 만들어진 것이 확실하다고 말합니다.
그러면 이두문은 언제 만들어졌을까?
신채호는 임금을 왕검王儉으로 번역하여 왕王은 그 자의字義(즉 임금)에서 소리의 초반初半을 취하여 님으로 읽고, 검儉은 그 자음字音(검)에서 소리의 전부全部를 취하여 금으로 읽었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펴라’를 ‘낙랑樂浪’으로 번역하여 락樂은 자의字義(편하다)에서 소리의 초반初半을 취하여 펴로 읽고, 랑浪은 그 자음字音에서 소리의 초반初半을 취하여 라로 읽은 것이 곧 이두문의 시초였다면서 적어도 지금으로부터 3천여 년 전(기원전 10세기경)에 이두문이 제작된 것이라고 주장합니다.
그림이 발전하여 문자文字가 되고 상형자象形字가 발전하여 성음자聲音字가 되는 것은 인류문화사의 통칙이므로 상형자인 한자를 가져다가 성음자인 이두문을 만든 것은 페니키아인이 이집트 상형자의 편방偏旁을 따다가 ‘알파벳’을 만든 것과 같은 사례로 볼만한 문자사文字史 상의 하나의 진보進步라고 신채호는 말합니다. 후세의 거란어, 여진어, 일본어 모두 이두문을 모방한 것이므로 인류문화에 기여한 공덕이 적지 않다고 주장합니다.
신채호는 유감스러운 점으로 자음子音과 모음母音을 구별하지 못한 것으로 예를 들면 ‘가’는 자子 ‘ㄱ', 모母 ‘ㅏ'의 음철音綴(음을 모은 것)이며, ‘라’는 자子 ‘ㄹ’, 모母 ‘ㅏ'의 음철音綴인데도 이를 구별하지 않아서 한 음철이 한 자子가 되어 ‘가’는 ‘가加’ 혹은 ‘가家’로 쓰고, ‘라’는 ‘량良’ 혹은 ‘라羅’로 써서 음자音子의 수효가 너무 많았다는 점을 꼽았습니다.
두 번째 유감스러운 점으로 음표音標를 확정하지 못한 것이니, 예컨대 ‘백白’ 한 자子를, ‘백활白活’(발괄, ‘하소연’이란 뜻)이라 써서는 ‘발’로 읽고 ‘위백제爲白齊’(하제, ‘하올지어다’라는 뜻의 존칭어)라 쓰면 ‘살’로 읽게 되고, ‘의矣’ 한 자子를 ‘의신矣身’(의몸, ‘이 몸, 저’란 뜻의 자칭 대명사)이라 쓰면 ‘의’로 읽고, ‘교의敎矣’(이사되, ‘말씀하시되’란 뜻의 존칭어)라 쓰면 ‘되’로 읽게 되어 그것을 읽는 법에 아무런 준칙이 없었다는 점을 꼽았습니다.
세 번째 유감스러운 점으로 상음하몽上音下蒙(앞의 음 일부가 다음의 것과 합쳐지는 현상)의 이치를 명확히 정해놓지 않은 것이니, 예컨대 ‘달이’를 ‘月伊’(달이)로 쓰지 않고 ‘月利’(달리)라 써서 ‘달이’로 읽고, ‘바람이’를 ‘풍이風伊’(바람이)로 쓰지 않고 ‘풍미風未’(바람미)라 써서 ‘바람이’로 읽음으로써 언어의 근간과 지엽枝葉이 서로 뒤죽박죽이 되었다는 점을 꼽았습니다.
그러므로 이두문으로 적은 시詩나 글文은 물론이고 인명이나 지명이나 관직명 같은 것도 오직 같은 시대, 같은 지방의 사람들만이 그 관습에 의해 서로 해독할 수 있을 뿐이, 다른 시대, 다른 지방 사람들은 입을 벌릴 수도 없었습니다.
고대인이 이두문을 쓴 지 1천여 년 동안 이처럼 불만스러운 점들을 개정하지 못한 원인은 어디에 있을까?
신채호는 당시에는 에 의한 외환外患에 시달렸기 때문에, 정치상 비밀을 지키기 위해 일체의 문자를 적국인들이 이해하지 못하게 하기 위해 이같이 불통일, 불확실한 글을 쓴 것이고, 또한 삼조선三朝鮮이 붕괴하여 열국이 병립하게 되자 한 조선 내에도 상호 적국이 많아서 하나의 명사나 하나의 동사, 하나의 토씨를 더욱더 다종다양하게 씀으로써 동부여 사람이 북부여의 이두문을 알지 못하고, 신라인이 고구려의 이두문을 알지 못했던 것이라고 주장합니다. 이는 당시 사람들의 학적學的 재지才智가 부족해서가 아니라 주로 정치상의 장애로 말미암아 그렇게 된 것이었다고 주장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