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창호의 최후

 

 

안창호의 입원 소식을 듣고 미국의 동지들이 치료비를 송금해왔습니다. 그를 스승처럼 따르던 이광수는 고급 한약을 보냈지만 합병증으로 인해 병세가 나아지지 않았습니다. 결국 안창호는 경성제국대학 대학병원에 입원하게 되었습니다. 엄중한 경계를 무릅쓰고 병실로 그를 위문하고, 혹은 식료품을, 혹은 금전을 두고 간 독지가도 있었습니다. 안창호의 제자인 박정호 등 그의 입원 중 시중을 들었으며 나중에는 그의 독립 운동 동지인 이갑의 딸 이정희가 거들면서 번갈아가며 그의 시중을 들며 끝까지 지성껏 병간호를 했다고 합니다. 윤치호와 이광수, 김성수 등이 병원비를 지불했고 수시로 그를 찾아 문안했습니다.

이광수는 당시의 상황을 이렇게 기록했습니다.

 

도산의 병상에 임종까지 붙어있던 이는 그의 생질 김순원과 또 청년 박정호 두 사람이었다. 그러나 경찰의 미움을 받아가면서 도산의 병실에 매일 출입하여 비밀히 외계와 연락하는 일을 한 것은 오吳 모某였다. 오씨는 이번 수양동우회사건에 기소유예로 석방된 이로서 도산을 아직도 찾아다닌다 하여 경찰에서 여려 번 다시 잡아넣는다는 위협을 받았다. 조각가 이국전李國銓이 도산의 데스마스크를 떴으나 그것은 빼앗기고, 이국전과 그의 선생 김복진金復鎭은 경찰의 추포追捕를 당하였으나 하룻밤의 유치와 후욕만으로 면하였다.

 

훗날 전하는 말로는 안창호는 타계 전날인 3월 9일에도 어디 조용한 집을 하나 얻어 거기서 정양하기를 원하여 방문한 사람들에게 집에 관한 이야기를 했다고 합니다. 그 후 그는 무의식 상태에 빠졌고, “목인아 목인아, 네가 큰 죄를 지었구나!” 하고 웅장한 음성으로 복도에까지 울리도록 몇 차례 외쳤다고 합니다. 그러고는 유언도 없이 자정이 넘어서 세상을 떠났습니다. 병명은 간경화와 폐렴 등의 합병증이었습니다. 머리맡에는 외조카 김원순과 조카딸 안성결이 있었다고 합니다. 김순원金順元은 이듬해에 보통전문학교 학생으로서 사상사건으로 검거되어 2년 후에 옥사했다고 합니다.

안창호의 유해는 시체실로 옮겨졌습니다. 이광수는 다음과 같은 기록을 남겼습니다.

 

도산의 친형 치호와 친매 김성탁 목사 부인과 질녀 맥결 등이 오고, 평양에서는 도산의 평생의 친우요 동지인 오윤선, 조만식, 김지간 등이 왔다. 장례에 관하여서는 경찰의 간섭이 심하고 또 주장할 사람이 없어서 2, 3일 장지를 결정치 못하다가 마침내 동대문 밖 망우리 묘지로 정하고 20인 이내에 한하여 장지까지 가기를 허락한다는 경찰의 명령으로 극히 적막하게 장송하였다. 묘지 들어가는 데는 그 뒤 수주일이나 양주 경찰서원이 파수하여 묘지에 들어가는 사람을 수하誰何(누구냐고 불러서 물어 보는 일)하였고, 그 후에도 1년간이나 묘직墓直(남의 뫼를 지키고 거기에 딸린 일을 보살피는 사람)에게 도산의 분묘를 묻는 사람이면 주소 씨명을 적게 하여서 도산의 산소를 찾는 이는 경찰이 모르게 정로로 가지 아니하고 길 아닌 데로 산을 올라야 하였다. 도산이 돌아가매, 미국 그 유족에게는 전보로 부고를 보내고 아무도 오지 말라고 당부하였다.

 

기록에는 안창호의 장례식을 흥사단과 수양동지회 회원들의 주도로 거행되었고, 윤치호, 이광수, 김성수, 여운형, 여운홍, 윤치영, 장택상 등이 참석한 것으로 되어 있습니다. 조선총독부는 만일의 소요사태를 막는다는 이유로 헌병을 보내 망우리 묘소 장지의 출입을 통제, 감시했습니다. 후에 강남구 신사동의 도산공원으로 이장되면서 그의 구 묘소가 있던 묘터(애제자 유상규의 묘소 뒷편)는 원형 보존되고 있습니다.

안창호의 장례식에 참석할 수 없었던 이승만은 그를 추도하는 한자로 된 만시晩詩를 지어 보내 애도를 표했습니다. 그 뒤 윤치호와 이광수, 김성수 등에 의해 추도식이 지속되었고, 해방 후에도 김구의 귀국 이후, 김구, 김성수, 이광수 등에 의해 추도식은 계속 이어졌습니다. 제1공화국 기간 중에도 흥사단과, 그를 존경하던 김성수, 장택상, 그리고 한때 그의 수양동우회 회원이었던 조병옥 등에 의해 계속 추모 사업이 그치지 않았습니다.

1962년 안창호에게 대한민국 건국공로훈장 대한민국장(훈 1등)이 추서되었습니다. 그 뒤 서울특별시 강남구 신사동에 있는 도산공원으로 미국에 매장된 아내 이혜련의 시신과 함께 이장, 안장되었습니다. 2000년대 이후 미국 로스앤젤레스에는 그의 이름을 딴 인터체인지(2002년)와 우체국(2004년)이 세워졌으며, 2012년 1월에는 애틀랜타에 있는 마틴 루터 킹 센터 내 명예의 전당에 아시아인 최초로 헌액獻額(공을 인정받아 명예로운 자리에 올려지는 일)이 이루어졌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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