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창호: 2천만을 이웃 국민으로 두는 것이 일본의 복福이다

 

 

1937년 5월 20일에 상경하겠다고 말한 안창호는 설사로 자리에 누워서 일어나지 못하다가 6월 중순에 종로경찰서 유치장으로 잡혀왔습니다. 수양동우회 회원들은 종로경찰서 유치장과 경기도 경찰부 유치장에 나누어져 있었습니다.

서울 지방법원 검사가 종로경찰서로 출장 와서 안창호에게 “지금까지 잘못하였느냐” “세상에 나가면 무엇을 하겠느냐”고 두 가지를 묻자 안창호는 “지금까지 수양동우회에 관하여서나 기타에 관하여서는 잘못한 일이 없다. 또 세상에 나가서 무엇을 하겠다는 점에 대하여서는 아무 말도 하기를 원치 아니한다”고 대답했습니다. 검사가 “너는 독립 운동을 계속할 생각이냐?”고 묻자 그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렇다. 나는 밥을 먹는 것도 대한의 독립을 위하여, 잠을 자는 것도 대한의 독립을 위하여서 해왔다. 이것은 나의 몸이 없어질 때까지 변함이 없을 것이다.” 검사가 조선의 독립이 가능하다는 것을 무엇으로 믿느냐고 묻자 그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대한 민족 전체가 대한의 독립을 믿으니 대한이 독립할 것이요, 세계의 공의公議가 대한의 독립을 원하니 대한이 독립이 될 것이요, 하늘이 대한의 독립을 명하니 대한은 반드시 독립할 것이다.” "너는 일본의 실력을 모르느냐?“는 검사의 심문에 안창호는 이렇게 답했습니다.

 

나는 일본의 실력을 잘 안다. 지금 아시아에서 가장 강한 무력을 가진 나라다. 나는 일본이 무력만한 도덕력을 겸하여 가지기를 동양인의 명예를 위하여서 원한다. 나는 진정으로 일본이 망하기를 원치 않고 좋은 나라가 되기를 원한다. 이웃인 대한 나라를 유린하는 것은 결코 일본의 이익이 아니 될 것이다. 원한 품은 2천만을 억지로 국민 중에 포함하는 것보다 우정 있는 2천만을 이웃 국민으로 두는 것이 일본의 복福일 것이다. 그러므로 대한의 독립을 주장하는 것은 동양의 평화와 일본의 복리까지도 위하는 것이다.

 

이광수는 안창호 등 44명이 1937년 7월과 9월에 수차례에 걸쳐 나누어 수감되고, 나머지 80여 명의 회원들은 기소유예로 풀려났다고 기록했습니다. 그러나 다른 기록에는 1937년 6월부터 서울지회 관계자 55명, 11월에 평양, 선천지회 관계자 93명, 이듬해인 1938년 3월에 안악지회 관계자 33명 등 모두 181명이 붙잡혔다고 적혀 있습니다. 그리고 그들 가운데 49명이 기소되었고, 57명이 기소유예, 75명이 기소중지처분을 받았으며, 기소된 49명 가운데서 1938년 3월 사망한 안창호를 제외한 41명이 재판에 회부되었다고 적혀 있습니다. 기록에 의하면 그들에 대한 예심이 1938년 8월에 종료되고, 1939년 12월 경성지방법원에서 전원 무죄를 선고받았으나, 검사의 공소로 1940년 8월 경성복심법원에서 이광수 징역 5년, 김종덕 등 4명 징역 4년, 김동원 등 4명 징역 3년, 조병옥 징역 2년 6월, 오봉빈 등 7명 징역 2년, 나머지는 징역 2년에 집행유예 3년을 각각 선고받았다고 했습니다. 1941년 11월 경성고등법원 상고심에서는 전원 무죄판결을 받았다면서 그 무렵에 수양동우회사건 관련자 대부분이 친일파로 전락하여 일제에 충성을 바쳤으므로 그들을 처벌할 필요가 없었던 것이라고 적혀 있습니다. 그러나 4년 5개월간의 구금기간 동안 일본 경찰의 혹독한 고문으로 최윤세崔允洗(이광수의 기록에는 최윤호崔允鎬), 이기윤李基潤은 옥사하고, 김성업金性業은 종신지질終身之疾(죽을 때까지 고칠 수 없는 질병)으로 불구가 되었다고 합니다.

이광수는 재판부가 수양동우회는 흥사단과 동일한 것으로 조선의 독립을 목표로 한 단체임을 회원들로부터 고백하도록 만들어 기소된 피고들의 방증을 삼았으며, 조선총독부에서는 상해에까지 손을 뻗쳐서 상해에 있는 흥사단 원동 지부로 하여금 흥사단이 독립 운동 단체임을 자인하고 자진 해산한다는 성명서를 발하게 했다고 적었습니다.

수양동우회사건은 검거, 공판, 판결에 이르기까지 일절 신문 보도를 금했으므로 상세한 내용은 제대로 전해지지 않고 있습니다. 일제는 안창호를 포함하여 많은 저명인사들을 재판에 회부한 것이라서 인심에 끼칠 영향을 꺼렸던 것입니다.

1937년 6월 28일 서대문 형무소에 수감된 안창호에게 친구 윤치호와 안창호를 평소에 흠모하던 김성수가 영치금을 보내주었고, 조선총독부에 보석금을 제출하여 석방, 구명 운동을 했습니다. 안창호의 병세가 심하여 12월 보석을 신청하여 받아들여져 12월 24일 신병으로 병보석 출감하여 경성제국대학(현 서울대학) 부속병원에 입원했습니다. 이광수는 안창호가 대전 감옥 이후 숙환인 소화불량으로 몸이 쇠약해진 데다 폐환이 급성으로 진행된 것이라고 기록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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