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종황제의 퇴위와 칠적七賊
1907년 광무황제(고종高宗, 1852~1919)가 헤이그 평화회의Hague peace conferences에 이상설, 이준, 이위종 등 밀사를 파견했습니다. 1899년과 1907년에 러시아 황제 니콜라이2세(1868~1918)의 발의에 의해 네덜란드의 헤이그에서 열린 두 차례의 국제회의였는데, 평화를 확보하는 방법의 연구를 우선적인 목적으로 했기 때문에 평화회의라 했습니다. 두 번째 회의는 1907년 6월 15일부터 10월 18일에 걸쳐 개최되었으며 라틴아메리카 제국을 추가한 44개국이 참가했습니다. 회의에 참가를 요구하다 거절되어 이준이 할복자살한, 소위 밀사사건은 파장을 불러왔는데, 일본 외무대신 임훈이 직접 서울로 와서 광무황제가 황태자에게 양위하도록 강요했고, 징병령 실시라는 핑계로 한국의 군대를 해산했습니다.
이준의 사인死因과 관련하여 언론매체들은 다르게 보도했습니다. <대한매일신보> 1908년 7월18일 호외에는 “어제 동경 전보를 접한 즉 이준 씨가 분기를 이기지 못해 자결하여 만국사신 앞에 열혈熱血을 뿌려 만국을 경동하였다더라”라고 되어 있고, 다음날 <황성신문>에는 “이준 씨는 분기를 이기지 못하여 자기의 복부를 할부割剖하였다는 전보가 동우회중同友會中으로 도래하였다는 설이 유有하더라”라고 했습니다. 이준의 죽음을 처음 보도한 일본의 <진서신문鎭西新聞>은 “이준은 안면에 종기가 나와서 절개했는데 절개한 곳에 단독丹毒이 침입하여 이틀 전에 사망하고 어제 장의를 집행…”이라고 보도했습니다. <대한매일신보>와 <황성신문>의 기사는 ‘하였다더라’라는 식이었고, <진서신문>은 사실을 확인한 듯한 보도를 했습니다. 1956년 이준의 사인을 둘러싸고 논란이 분분하자 국사편찬위원회에서 조사위원회를 구성하고 1개월 동안에 걸쳐 각종 문헌자료의 기록과 각계인사의 증언을 검토한 뒤 할복자살은 민족의 공분을 이끌어내기 위한 허구였다고 밝혔습니다.
조사결과 당시 <대한매일신보> 주필이었던 양기탁이 단재 신채호, 배델과 협의해 이준의 분사를 할복자살로 만들어 신문에 쓰게 했다는 증언이 나왔습니다. 이위종이 <만국평화회의보the Courrier de la Conference de la paix>와 가진 인터뷰에서 할복에 관한 언급은 없이 이렇게 말한 것으로 전해졌습니다. “이준 선생은 뺨에 종기를 앓기는 하였으나 매우 건강했다. 세상을 떠나기 전까지 아무 것도 먹지 않았으며, 세상을 떠나기 전날 의식을 잃은 것처럼 잠들어 있었다. 저녁 때 의식을 되찾아 갑자기 벌떡 일어나더니 ‘이 나라를 구해주소서 일본이 우리나라를 강탈하려 합니다’하면서 가슴을 쥐어뜯다 숨을 거두었다.” 이위종의 말은 이준의 할복자살 소식이 조선 전토로 이미 번진 뒤였습니다.
그렇지만 당시에는 이준이 할복자살한 것으로 전해져 민심이 들끓었고, 서울에는 해산당한 군대와 민중의 시위 반항이 일어나 수일 동안 피를 흘렸으며, 각지에서 의병이 봉기하여 일군에게 진정될 때까지 3만 명이나 전사했습니다. 이광수는 다음과 같이 적었습니다.
그러나 조정에는 인물이 없을뿐더러 벌써 이른바 칠적七賊이라는 친일파가 발호하여 송병준 같은 자는 광무황제에게 일본으로 가서 사죄를 하고 하세가와 일본군 사령관 앞에 친히 가서 사죄하라고 권하였고, 이병무, 조중응 같은 자는 황제 앞에서 혹은 칼을 빼기도 하고 혹은 전화선을 끊음으로 임금을 협박하여 일본의 요구에 응종케 하였다. 이완용이 친일파의 괴수인 것도 점차로 탄로 났다.
헤이그 특사사건 후에 황제 양위운동을 벌여 친일활동에 앞장선 송병준宋秉畯(1858~1925)은 민영환閔泳煥의 식객食客으로 있다가 무과武科에 급제, 수문장守門將, 훈련원판관訓鍊院判官, 오위도총부도사五衛都摠部都事, 감찰監察 등을 역임했고, 1882년 임오군란壬午軍亂 때 간신히 피신했습니다. 수구파守舊派에 속했던 그는 1884년 갑신정변甲申政變을 일으킨 김옥균金玉均을 살해하려고 일본에 건너갔으나 도리어 설득당해 그의 동지가 되었으며, 1886년 귀국해서는 김옥균과 통모한 혐의로 투옥되었으나 민영환의 주선으로 출옥, 흥해군수興海郡守, 양지현감陽智縣監 등을 역임하다 정부가 체포령을 내리자 다시 일본으로 피신했습니다. 1904년 러일전쟁이 발발하자 일본군의 통역으로 귀국한 후부터 완전히 친일파로 돌아섰고 일본의 주구走狗 노릇을 하기 시작했는데, 귀국 즉시 윤시병尹始炳과 함께 유신회維新會를 조직하고 다시 이용구李容九와 함께 일진회一進會를 만들어 나라를 일본에 넘겨주기 위한 전초작업을 시작했습니다. 1907년 이완용李完用 내각이 들어서자 농상공부대신農商工部大臣, 내부대신을 역임했고, 국권피탈을 위한 상주문上奏文, 청원서를 제출하는 매국행위를 했으며, 그 후 일본에 건너가 국권피탈을 위한 매국외교를 했습니다. 국권피탈 후 일본정부로부터 자작子爵을 수여받았고, 조선총독부중추원고문朝鮮總督府中樞院顧問이 되었으며, 1920년에는 백작伯爵에 올랐습니다.
이완용 내각의 군부대신서리시종무관장으로 광무황제의 양위와 군대해산에 적극 협조한 공로로 이병무李秉武(1864~1926)는 종1품으로 특별승자特別陞資되었고, 훈2등태극장勳二等太極章과 일본 정부로부터 훈1등욱일장勳一等旭日章을 받았습니다. 1909년 친위청장관, 시종무관장을 지내다가, 1910년에는 대훈이화대수장大勳李花大授章을 받았으며, 국권피탈에 적극적으로 협조하여 자작이 되었습니다.
1894년 의친왕 수행원으로 일본에 다녀온 뒤 외무아문의 참의가 된 조중응趙重應(1860~1919)은 이듬해 4월 외부교섭국장으로 보임되었으며, 동시에 각 항구 거류지 조사정리위원을 겸임했습니다. 1898년 김홍집 내각이 붕괴되자 직책을 빼앗기고 국사범國事犯으로 몰려 일본으로 망명했습니다. 1907년 5월 이완용 내각의 법부대신에 임명되었으며, 형법개정총재도 역임했습니다. 1910년 8월 일제로부터 이화대수장李花大綬章을 받았으며, 한일합병조약 때 조약에 찬성하여 칠적七賊으로 규탄의 대상이 되었습니다. 1910년 일본정부로부터 자작 작위를 받았으며 조선총독부 중추원 고문을 지냈습니다.
칠적七賊이란 광무황제를 강제로 폐위시킨 일곱 대신大臣들로 총리대신 이완용, 내부대신 임선준, 탁지부대신 고영희, 군부대신 이병무, 법무대신 조중응, 학부대신 이재곤, 농상공부대신 송병준을 말합니다. 이들은 헤이그 밀사사건이 일어나자, 일본의 사주를 받아 고종황제에게 책임을 추궁하여, 1907년 7월 19일에 강제 퇴위시키고 순종황제를 즉위시켜, 그해 7월 24일에 한일 신협약을 체결하게 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