춘원 이광수 도산 안창호를 만나다

 

 

<무정>, <유정>, <> 등 많은 소설을 쓴 작가로 유명한 춘원春園 이광수李光洙(1892~1950)는 일본 유학 중에 소설과 시, 논설 등을 발표했고, 귀국 후 오산학교에서 교편을 잡다가 망명, 1919년 도쿄의 조선인 유학생의 2·8 독립선언을 주도하고 2·8 독립선언서를 기초한 후 3·1 운동 전후 상하이로 건너가 상하이 임시정부에 참가하고 <독립신문>을 발행했습니다. 1921년 귀국 후에는 동아일보와 조선일보 등의 언론에 칼럼과 장·단편 소설, 시 등을 발표했습니다. 그는 유교적 봉건 도덕, 윤리관을 비판하고 여성해방과 자유연애론을 주장하기도 했습니다.

이광수는 안창호, 윤치호, 김성수 등의 감화를 받아 민족개조론과 실력양성론을 제창했으며, 1922년 흥사단興士團의 전위조직으로 독립 계몽운동 단체였던 수양동맹회修養同友會를 조직하고, 안창호를 도와 흥사단 국내 조직과 수양동우회에 적극 참여했습니다. 19261월에 설립된 수양동우회는 표면상으로는 안창호의 무실역행務實力行을 지도이념으로 하는 수양단체였으나 실제로는 독립운동단체로, 1913년 민족부흥을 목적으로 설립된 흥사단의 계열단체였습니다.

1913513일 안창호가 샌프란시스코에서 창립한 흥사단의 표어 무실역행은 실사구시實事求是 못지않게 우리나라 근대사의 중요한 표어이자 현상이었지만, 뚜렷한 주목을 받아오지 못한 이유는 이 운동의 창시자 안창호 선생과 무실역행을 유지해온 흥사단에 대한 사람들의 이해가 부족했기 때문입니다. 무실역행 사상은 율곡 이이가 37살 때에 갓 스무 살이 넘은 선조에게 치인의 도리를 가르치기 위해 쓴 <동호문답東湖問答> 일곱 번째 장제목이 무실위수기지요務實爲修己之要이라서 무실務實로서 수기修己의 요체를 삼는다는 이 말을 안창호가 받아들여 표어로 삼은 것으로 추정됩니다. 무실務實이란 실을 힘쓰자는 뜻으로 실은 진실, 성실, 거짓 없는 것을 말하는데 안창호가 여기에 역행力行이란 말을 붙여 무실을 행동으로 옮길 것을 강조했습니다.

안창호는 저술이나 연설을 통해 자신이 율곡의 무실위수기지요에 관해 말한 적이 없으며, 율곡을 인용하거나 언급한 적조차 없는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안창호가 우연의 일치로 무실이란 말을 사용했을 것이란 추측도 가능합니다.

이광수와 관련하여 계속 말하자면, 그는 수양동우회 사건을 계기로 변절한 이후 대표적인 친일파로 규탄 받았습니다. 일제 강점기 후반에는 민족성, 인간성의 개조를 주장했고 한때 나치즘 등에도 공감하기도 했습니다. 그렇지만 이광수는 안창호, 윤치호의 사상적 계승자이기도 합니다. 193912월 이후 이광수는 자발적으로 창씨개명에 동참할 것을 권고하여 지탄을 받았습니다. 해방 후 백범일지의 교정, 윤문과 안창호의 일대기 집필을 주관했습니다. 1949년 반민특위에 기소되었으나 석방되었고, 19506월 한국동란 때 서울에 있다가 북한 인민군에게 납북되었습니다.

소설가로서의 이광수는 구한말과 일제강점기에 '만인의 연인'이라는 별칭과 함께 청소년 남녀의 우상이었고, 최남선, 홍명희와 더불어 조선의 3대 천재로 대표되었던 인물입니다.

이제 와서 새삼 이광수를 거론하는 건 그의 행적을 더듬어 그를 재조명하려는 의도에서가 아니라 도산 안창호의 일대기 집필을 그가 주관했으므로 그가 정리한 안창호의 전기를 통해 안창호에 관해 좀 더 자세히 알아보고자 하는 의도입니다.

이광수가 안창호와 인연을 맺은 것은 앞서 언급한 대로 1919년 도쿄의 조선인 유학생의 2·8 독립선언을 주도하고 2·8 독립선언서를 기초한 후 3·1 운동 직후 상하이로 건너가 임시정부에 참가하여 독립신문사 사장을 역임하면서 부터였습니다. 안창호는 3·1운동 직후 상하이로 가서 임시정부 조직에 참가하여 내무총장·국무총리대리·노동총장 등을 역임하며 <독립신문獨立新聞>을 창간했습니다.

<독립신문>의 사장 겸 편집국장으로 활동한 이광수는 조선인 모두가 독립을 준비하기 위해 각자가 힘을 기르고 노력해야 한다는 안창호의 준비론에 공감을 느껴 흥사단에 참여했으며, 30세가 되던 1921년에 귀국하고 이듬해에는 흥사단의 이념을 실천하기 위한 수양동맹회를 발기했습니다. 그는 1923년 동아일보사에 입사한 이후 1933년 조선일보사 부사장으로 자리를 옮겨 1934년 사임할 때까지 언론인으로 활동했습니다. 또한 1924년 방인근의 출자로조선문단을 창간 주재하고, 수양동맹회를 동우구락부와 합해 동우회로 확대 개편한 이후인 1926년에는 기관지동광을 창간하여 주요한과 함께 잡지를 주재했습니다. 이광수는 1937년 수양동우회 사건으로 체포되어 안창호와 함께 병보석으로 출감할 때까지 서대문 형무소에서 5개월 동안의 영어생활을 했습니다. 그가 친일 활동에 가담하기 시작한 것은 1939년부터였습니다. 그때부터 이광수는 민족을 배반하고 일제에 협력하는 변절의 길을 걷게 되지만, 인간적으로 안창호에 대한 존경심은 변치 않았다고 합니다. 그러니까 해방 후 <도산 안창호>라는 전기 소설을 쓸 수 있었겠지요.

제가 앞으로 몇 차례에 걸쳐 기고하려는 안창호에 관한 글은 이광수의 <도산 안창호>에서 추출한 것입니다. ‘안창호를 검색해도 얻을 수 없는 자료가 <도산 안창호>에 있기 때문이며, 비록 변절자가 되었지만 한때 최남선, 홍명희와 더불어 조선의 3대 천재로 알려진 이광수가 안창호에게 존경심을 가지고 쓴 글이라서 참고하여 소개하려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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