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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슬람주의와 이슬람교 - 이슬람세계에 대한 오해와 이해
바삼 티비 지음, 유지훈 옮김 / 지와사랑 / 2013년 1월
평점 :

저자 바삼 티비Bassam Tibi는 누구인가?
이 책의 저자 바삼 티비Bassam Tibi는 시리아의 수도 다마스쿠스에서 무슬림 귀족 가문에서 태어났다. 이슬람주의의 이데올로기를 비판하는 진보주의 이슬람교 학자로서 명성이 높아지자 이슬람세계에서 생명의 위협을 느낀 그는 독일에 영주했다. 그는 독일 대학에서 가르치면서 40여 년에 걸쳐 이슬람 문화를 주제로 독일어로 28권, 영어로 8권을 책으로 출간했으며, 은퇴하기에 앞서 최후의 저작으로 이 책 <이슬람주의와 이슬람교>를 출간했다. 이 책은 그가 말한 대로 15년 동안 이슬람주의를 연구한 결과물이면서 평생 연구한 내용을 정리한 것이다. 그는 예일 대학의 초청을 받아 그곳에서 이 책을 집필했고, 탈고한 후에는 두 차례에 걸쳐서 전문가 여덟 명이 검토하고 네 차례의 편집과정을 거쳐 최종 통과되었다. 그러나 예일 대학 출판부는 다시 세 명의 검토자를 선정하여 몇 차례의 원고를 수정하는 과정을 거치게 했다. 이 책은 열한 명의 전문가들로부터 인정을 받는 까다로운 검토과정을 통과했으므로 내용의 신뢰성에 문제가 없다고 본다.
이슬람주의와 이슬람교는 어떻게 다른가?
저자는 이 책에서 이슬람교와 종교를 정치의 구실로 삼는 이슬람주의는 본질적으로 다르다는 점을 역설하고 있다. 이슬람권 밖의 사람들이 이슬람교와 이슬람주의를 동일한 것으로 보는 까닭은 이슬람주의자들이 자신들의 이념의 뿌리가 이슬람교라고 확신하며 주장하기 때문이다. 이슬람주의자들은 이슬람교를 순수한 종교로 보지 않고 정치적으로 해석하여 신정정치를 실현하는 것이 무슬림의 사명으로 간주하고 17억 무슬림을 자신들의 정치적 목적에 선동하고 있다.
이슬람주의는 국가질서를 위한 정치적 수단에 불과하고 이슬람교는 그런 것과는 상관없는 무슬림의 생활양식과 세계관을 규정하는 문화적, 종교적 제도다. 이슬람주의의 정교일치 사상은 이슬람교 자체라기보다는 이슬람주의와 이슬람교의 주요 경계를 표시하는 특징이다. 이런 차이를 제대로 인식하지 못하는 영향력 있는 서양 학자와 정치가들이 중동 이슬람세계에 대한 정책을 펴기 때문에 현재 이슬람교가 문명의 충돌 혹은 문명의 위기에 분수령이 되고 있는 것이다.
간략하게 말하면 서방세계가 중동에 대한 개입으로 발생하는 문제들은 이슬람주의자들이 자신들의 정체성으로서 이슬람교를 끌어들인 점을 명확하게 인지하지 못하고 이슬람주의자들의 주장하는 내용을 그들뿐 아니라 17억 무슬림의 정체성으로 받아들이는 야기되는 것이다. 물리적으로 폭력을 사용하는 이슬람주의자들을 17억 무슬림이 지지하고 있다는 오해에서 문명의 충돌 혹은 문명의 위기가 운운되고 있는 것이다.
이슬람주의는 종교를 빙자한 정치세력이다
저자는 이슬람주의를 반대하는 무슬림으로서 다양한 문화와 종교 안에서 이슬람교가 새로이 인식되어야 함을 주장한다. 진보주의 무슬림으로서 바삼 티비는 전체주의적 이데올로기를 표방하는 이슬람주의의 전체주의적 외관은 반유대주의와 관계가 깊으며, 이슬람주의자들이 무슬림과 비무슬림의 양극화를 부추길 뿐 아니라 이슬람 공동체의 내분을 일으키고 있고, 심지어는 자기방어의 일환으로 ‘이슬람혐오증’을 꾸며내는 데 대해 깊은 우려를 나타내고 있다. 무엇보다도 이슬람주의자들이 자살테러 등 폭력으로 세계를 위협하는 데도 서양의 학자와 정치가들이 이슬람교와 이슬람주의의 차이를 제대로 알지 못해 정치적으로 혼선을 빚는 데 대해 이슬람교 연구에 전념해온 학자로서 바삼 티비는 이슬람주의가 종교를 빙자한 정치세력이며 신정정치를 추구하는 폭력집단임을 거듭 역설한다.
책의 주요 내용
저자가 이 책에서 가장 역설하는 점은 “이슬람주의는 신앙이 아닌, 정치질서에 중점을 두면서도 단순한 정치가 아니라 종교화한 정치라는 점에서 이슬람교가 아니다”라는 것이다. “종교화한 정치”는 이 책을 이해하는 데 필히 숙지해야 할 개념이다. 이슬람주의자들이 원하는 “종교화한 정치란 국민의 주권이 아닌, 알라의 뜻에서 비롯된 정치질서를 장려하는 의미를 포함하고 있다.” 이는 이슬람교에는 없는 내용이다. 따라서 이슬람주의는 이슬람교의 부흥이 아니라 전통과는 거리가 먼 선입견을 부추긴다. 바삼 티비는 이슬람주의가 전통을 꾸며낸 경위와 그 이유를 이 책에서 상세하게 서술하고 있다.
문명의 충돌 혹은 문명의 위기는 이슬람주의자들이 세상을 다시 만들겠다는 야망을 실현하려고 폭력까지도 서슴지 않는 데서 비롯되었다. 이슬람주의는 “폭력 위에 군림하는 것이 아니라 세계질서 위에 있으며, 이데올로기의 중심은 단연 질서nizam(니잠)에 있다. 이슬람주의의 정치질서가 바로 새로운 세계질서인 것이다.” 바삼 티비는 정치색을 띤 이슬람교의 기원은 1928년 당시 카이로의 수니파-아랍 이슬람교에서 창설된 무슬림 형제단의 출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면서 이슬람주의가 1979년 이란에서 벌어진 시아파인 호메이니가 주도한 혁명에서 비롯된 것이 아님을 강조한다. 수니파 이슬람주의가 호메이니 사상보다 역사가 훨씬 깊다고 말한다. 그는 이슬람주의자들이 유대인을 “세계의 원수”로 규정하고 있는데, 그 기원을 이슬람교와 유대교의 세계질서를 둘러싼 경쟁의식에서 찾는다. 그는 무슬림 형제단이 창설될 당시만 해도 이스라엘이라는 국가는 존재하지 않았음에도 무슬림 형제단이 이슬람교에 대항하는 “유대인의 모략”과 스스로 투쟁을 벌이고 있다고 간주하는 부분에서 경쟁의식의 실마리를 발견하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이슬람주의식 유대인혐오증이 이스라엘-팔레스타인 분쟁에서 비롯되었으므로 그것이 일단락되면 곧 사그라질 것으로 보는 견해는 어불성설에 불과하다고 주장한다. 그는 “무슬림 형제단의 역사를 감안해볼 때, 정치색을 띤 이슬람교는 중동 분쟁과는 관계없이 유대인을 문제 삼아 왔다”고 주장한다.
이슬람주의와 이슬람교의 차이는 폭력의 정당화 혹은 성전聖戰(지하드)를 거론할 때 특히 부각된다. 이슬람교 학자로서의 저자는 지하드를 ‘자기수련’이자, 코란에 따르면, 포교의 일환으로 불신자와 벌이는 물리적 투쟁의 실천임을 강조한다. 자기수련과 물리적 투쟁은 서로 떼려야 뗄 수 없는 지하드의 정의다. 그렇지만 테러가 아니다. 신실한 무슬림은 지하드를 종교적 의무이자 이슬람교의 사명에 저항하는 세력을 끊는 방어 전쟁으로 지하드를 이해한다. 이에 반해 이슬람주의의 지하디스트(성주의자)의 정치적 아젠다는 경쟁문명에 대항하는 전쟁이라는 문화적 맥락에서 제기된다. 따라서 이슬람주의를 세계질서를 둘러싼 문명의 경쟁에서 바라보아야 한다.
바삼 티비는 “폭력을 행사하려는 의지는 지하디스트 이슬람주의의 기본 특성이긴 하나 그 자체가 목적이 아니라 수단일 뿐이다. 목표는 단연 이슬람교의 질서가 될 것”이라면서 지하드운동의 폭력은 테러행위이므로 자기수련과 물리적 투쟁으로서의 고전 지하드 윤리와는 서로 일치하지 않는다고 주장한다. 이러한 주장은 무슬림으로서 이슬람세계에서 비난을 자초할 수 있다. 그렇지만 신실한 무슬림으로서의 그는 이슬람주의 때문에 17억 비이슬람주의 무슬림이 폭력을 정당화하는 사람들로 인식되므로 앞장 서 이슬람주의를 반대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