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네 번째 성스러운 진리(도성제道聖諦): 팔정도(八正道)

고통에서 벗어나려면 구체적으로 무엇을 해야 하는지 우리 모두 궁금해 할 것이다. 해답이 늘 마음에 드는 건 아니겠지만 망상에 빠져 있다면 자유는 노예처럼 보이고 불행이 행복을 가장하게 된다. 자유를 찾는 데 커다란 희생과 고통이 뒤따르고, 우리가 즐기는 많은 것들을 포기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이는 망상에 빠진 마음의 속임수다.
어떤 의미에서 해탈의 길은 매우 단순하다. 옛날 다른 스승 밑에 있던 한 남자가 붓다에게 붓다의 제자는 어떻게 수행하는지 물었다. 붓다는 자신의 제자는 걷고, 앉고, 먹고, 쉰다고 답했다. 남자는 어리둥절했다. 그는 붓다에게 자신과 친구들 역시 그렇게 한다고 말했다. 그러나 붓다는 거기에 한 가지 차이가 있음을 지적했다. 붓다의 제자들은 걸을 때 걷고 있다는 사실을 알았던 것이다. 앉아 있을 때는 앉아 있음을 알았다. 음식을 먹을 때는 먹고 있다는 사실을 알았다. 그리고 쉴 때는 쉬고 있음을 알았다. 다시 말하면, 현재의 순간으로 돌아가고, 우리 주변에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아는 것 자체가 깨우침인 동시에 깨우침의 수행인 것이다. 현재 일어나는 일에 충실하다면 근심과 희망, 탐욕과 성냄에 얽매이지 않을 것이다.
붓다는 네 가지 성스러운 진리와 함께 중도 또한 가르쳤다. 깨우침으로 가는 길은 감각적 즐거움에 치우친 한쪽 길과 엄격함, 혹독한 금욕주의, 그리고 고행이 있는 반대편 길 사이에서 중도를 따르는 것이다. 붓다는 두 극단적인 길은 의미가 없다고 가르쳤다. 두 길 모두 둑카다. 우리가 이해하기 어려운 것은 제한 없는 즐거움의 추구가 위험하다는 점이다. 우리는 즐거움과 행복을 동일시하는 경향이 있다. 그렇기 때문에 어느 쪽을 선택해도 바람직하지 않지만, 즐거움을 추구할 가능성이 매우 높다. 그러나 즐거움이 반드시 우리에게 유익하지는 않으며 미래에 고통을 초래할 수도 있다는 점을 알 수 있다.
해탈에 관한 구체적인 방법을 알기 원하는 사람들을 위해 붓다는 네 번째 성스러운 진리, 즉 팔정도八正道를 제시했다. 팔정도는 깨우침과 진정한 행복의 방향으로 이끌어주는 삶의 길이다. 팔정도는 다음과 같다.
• 정견正見 바른 견해
• 정사유正思惟 바른 생각
• 정어正語 바른 말
• 정업正業 바른 행위
• 정명正命 바른 생계
• 정정진正精進 바른 노력
• 정념正念 바른 마음챙김
• 정정正定 바른 집중
팔정도에서 붓다가 의도하는 바가 무엇인지 살펴보자. 첫째로 주목해야 할 점은 붓다가 아무렇게나 도덕규범을 처방한 게 아니라는 사실이다. 그래서 ‘정samyak’으로 번역된 용어는 선한, 유익한, 고통에서 벗어나는, 혹은 웰빙과 행복에 도움이 되는 무엇으로 이해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붓다는 둑카에서 자유로워질 수 있는 방법으로 팔정도를 권한다. 팔정도는 현실이 열반의 본질이라는 진리로 우리를 안내하기 때문이다. 팔정도는 그 성격에 따라 지혜, 수행, 행동 수행, 정신 수양의 세 가지로 분류할 수 있다.
지혜 수행, 정견과 정사유는 팔정도에서 지혜의 요소에 속한다. 사물을 바르게 보고, 사물이 실제로 존재하는 방식에 따라 생각하면 우리가 보는 만물의 비영구적 속성과 무아를 인식할 수 있다는 의미다. 다시 말하면 여기에서 지혜를 완전히 수행하는 일은 단순히 지적인 앎이 아니라 꿰뚫어 보는 통찰이다. 만물을 무상과 무아로 보는 건 만물을 단순히 분리된 사물로 보지 않고 우주의 완전한 발현으로 본다는 의미다. 우리는 꽃에서 비, 흙, 햇빛 그리고 궁극적으로 그 밖의 모든 것을 본다. 정견과 정사유를 행하는 일은 만물을 이러한 관점에 비추어 본다는 의미다. 만물을 무상과 무아에 비추어볼 때, 자연스럽게 자무량심과 비무량심이라는 결론에 이르게 된다.
또한 정사유는 바른 의도를 의미한다. 이런 의도는 긍정적 혹은 부정적 업業을 쌓게 한다. 다른 사람들에게 뜻하지 않게 해를 끼쳤다면 그것이 나쁜 업은 아니다. 더 나아가 자신과 다른 사람들을 위하려는 분명한 의도로 수행하면 진심으로 최선을 다하는 힘이 생겨난다.
우리는 현재 망상에 빠진 어리석은 마음이 이끄는 방식대로 살고 있다. 그 방식에는 거짓된 희망만 있어서 어김없이 우리에게 실망을 안겨주고 우리를 점점 더 깊은 둑카의 늪으로 몰아간다. 우리는 이전과 같은 삶의 방식을 고집하며 파격적으로 통찰을 바꾸려고 하지 않는다.
붓다가 제안하는 행동의 변화는 정어, 정업, 정명이다. 바른 말에는 진실함과 자애로움이 있어야 한다. 또한 남의 사생활에 대한 소문이나 확실치 않은 사실 또는 사회에 분란을 일으키는 말은 하지 말아야 한다. 대수롭지 않거나 의미가 없는 대화를 삼가는 것도 여기에 포함된다. 그렇다고 모든 대화가 반드시 지적이어야 한다는 의미는 아니다. 식사를 함께 할 때 음식이 맛있다고 말하거나 아름다운 나무를 가리키는 일은 듣는 상대가 현재의 순간으로 돌아오도록 한다는 의미에서 바른 말이다. 바른 행위란 해롭지 않으며 유익하고 자애로운 행동이다. 자애롭지 못한 행동은 만물이 상호 연결되어 있음을 의식하지 못하게 하고 분리, 고립, 소외의 망상을 깊어지게 한다. 바른 행위는 상호 연관성, 즉 우리 밖의 존재로 보이는 것이 사실은 우리 자신이라는 통찰을 바탕으로 한다. 결국 ‘안’이니 ‘밖’이니 하는 용어는 궁극적인 실재가 아니다. 바른 삶은 가능한 한 다른 사람들에게 피해를 주지 않고 살아가는 것을 의미한다.
불교와 관련된 예로 무기 또는 곡차를 만들거나 도살하는 것은 멀리해야 할 직업이다. 이런 가르침은 비교적 명료하지만, 정명을 수행하다 보면 곧 애매한 상황을 많이 접하게 된다. 우리가 아이스크림 장사로 생계를 꾸린다고 하자. 언뜻 보면 그 직업에 아무런 문제가 없다. 그렇지만 비만과 관련된 건강 문제로 고통받는 사람이 많은 곳에서는 그리 떳떳하지만은 않다. 다시 말하면 핵심은 일상에서 상호적으로 존재하고 자애의 통찰을 바탕으로 행동해야 한다는 점이다. 오로지 유익하기만 한 직업은 없겠지만, 우리는 바른 방향으로 나아가도록 최선을 다해야 한다.
정신 수양
정신 수양에는 정정진正精進, 정념正念, 정정正定이 있다. 정정진은 건전한 정신 상태를 구축하는 일이다. 우리는 의식의 정원에서 분리와 망상에 뿌리를 둔 분노와 질투 같은 요소는 멀리하고 자애로움, 행복, 평화 같은 긍정적인 요소에 물을 주는 법을 배워야 한다. 이 점을4장 에서 이미 살펴보았다.
의식의 정원을 가꾸는 한 가지 전략으로 모든 빈터를 원하는 식물로 가득 채워 잡초가 애초에 발을 붙이지 못하게 하는 방법이 있다. 마찬가지로 우리의 의식을 건전한 정신 상태로 부지런히 채운다면 불건전한 정신 상태가 출현할 공간이 줄어들 것이다. 물론 불건전한 정신 상태도 조금씩 계속해서 출현할 것이다. 그럴 때에는 앞서 설명한 대로 마음을 챙겨 대응하면 된다.
바른 정념이란 현재의 순간에 일어나는 일을 알아차리는 것이다. 마음을 챙겨 주의 깊게 살피면 우리 의식의 정원에서 사랑스러운 식물들이 자라나 번성하게 된다. 그렇게 되면 자연스럽게 불건전한 정신 상태는 힘을 잃고 좀처럼 생겨나지도 않으며 생겨난다 하더라도 그 시간이 점점 짧아진다.
정정은 바른 집중과 관련이 있다. 정념은 야간 경기에 사용하는 거대한 조명과 같다. 넓은 광선으로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비추고 한 번에 많은 것들을 보여준다. 반면 집중은 레이저 광선과 같다. 마음을 챙기면 우리 주변과 마음 속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알아차릴 수 있다. 많은 것들 가운데 아름다운 구름을 알아차릴 수도 있다. 그러면 하던 일을 멈추고 심호흡하며 구름에 모든 관심을 기울인다. 깊이 집중하면 우리와 구름이 분리되어 있다는 느낌이 점차 사라진다. 그리고 구름과 깊이 연결되어 있음을 느낄 것이다. 우리와 구름은 모두 물이다. 이 상태에서 정념은 바른 집중의 단계로 이어진다. 그러나 두 단계는 모두 두려움과 집착이 없는 명료한 의식의 바탕에서 이루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