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세 번째 성스러운 진리(멸성제滅聖諦): 고통을 끝낼 수 있다

 

 

 

이런 통찰이 우리를 자유로워지게 만들 수 있다면, 그것을 우리의 일부분이 되게 해서 세상을 바라보는 우리 시각의 바탕이 되게 해야만 할 것이다. 그렇게 하면 자유와 행복은 자연스레 따라오게 된다. 고통이 사라지면 웰빙과 행복이 환하게 빛을 발할 것이다.
불교에서 흥미로운 점은 이 세 번째 성스러운 진리이다. 즉 고통을 끝낼 수 있다는 것이다. 고통을 끝내려면 현실의 본질을 깊고 명료하게 보아야 한다. 이는 토스트기에 끼어 타기 시작하는 빵 조각을 칼로 빼내려 할 때와 같다. 지적인 사고에 따르면 이 행동이 좋은 생각이 아님을 알지만 실제로 한 번 감전되고 나면 그 사람의 앎은 더 이상 지적인 사고에 그치지 않는다. 이제는 토스터기에 칼을 넣으면 위험하다는 경고도 필요 없다. 스스로 그러지 말아야 한다고 다짐할 필요도 없다. 그 사람은 안다. 이런 종류의 앎이 고통에서 벗어나는 데 필요한 효과적인 통찰의 앎이다.
우리는 둑카가 발생할 때 그것에 주목하면서 둑카의 진리를 확실히 알게 되지만 긍정적인 측면에서 고통을 끝낼 수 있다는 진리 또한 분명히 알게 된다. 고요하고 만족스러운 상태에 있을 때, 일어나 무엇인가를 하려는 원초적 근질거림이 없을 때, 혹은 무엇인가 기분전환거리를 찾을 필요가 없을 때, 현실에 충실할 때 심오한 행복, 평화, 만족을 찾을 수 있다. 무엇이 이러한 경험을 이토록 즐겁게 만드는가? 엄밀히 말하면 그 순간에 탐욕도 성냄도 우리에게 영향을 미치지 않기 때문이다. 우리는 단지 존재할 뿐이다. 의식은 균형을 이루고 조화롭다. 그런 경험이 매우 드물게 잠깐 일어나더라도 우리는 그 경험을 알아차리고 확대하고 증가시킬 수 있다.
고통을 끝내는 방법을 완전히 이해하기란 쉽지 않다. 그러나 그 방법을 맹목적으로 받아들일 필요가 없다. 약간만 훈련하면 누구나 이런 경험을 어느 정도 맛볼 수 있다. 좋아하고 싫어하는 구별을 조금만 덜 하더라도 좀 더 폭넓고 큰 평화와 행복을 체험할 수 있다. 그렇게 되면 선호하는 대로 일이 진행되지 않더라도 문제가 될 것이 없으며 마음이 편안해지는 체험을 하기 시작한다. 이렇게 쉽게 우리는 자신을 돌볼 수 있다.
어떻게 하면 탐욕을 버리고 둑카를 멈출 수 있을까? 탐욕과 다툴 필요가 없다. 다툼을 벌이면 그 문제는 더 심각해진다는 사실을 명심하라. 마음을 챙겨 일어나는 일들을 알아차리고 그대로 두면 된다. 그리고 탐욕과 성냄만이 아니라 의견, 믿음, 견해까지 모두 놓아버리면 우리를 기다리는 근본적인 행복에 점차 다가설 수 있다. 지나친 탐욕과 애착을 모두 버렸다 해도 슬픔 그리고 다른 감정들이 의식 속에 나타나게 된다. 이것이 반드시 고통이 있음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붓다가 되는 일은 금속 덩어리처럼 감성을 잃어버린다는 의미가 아니다. 성불은 인간성의 완성이지 파괴가 아니다. 그러므로 슬픔이 생길 때 억누르지 않고 의식한다면 슬픔이라는 정신 상태는 무상하며 무아라는 사실을 알 수 있다. 그럼으로써 슬픔은 머무르지 않고 지나가는 것이다. 저항하고 싸움을 걸 때 고통이 다가온다. 자신에게 “난 슬퍼, 정말 지독하군! 끔찍해! 이건 말도 안 돼! 난 항상 행복해야 해” 하고 말할 때 고통이 존재한다. 완전한 붓다라면 슬픔을 겪는 동안 그것을 문제로 보지 않고 그 체험을 거부하지 않으며 슬픔이 자연히 흘러가게 할 것이다.
때때로 하나의 이미지가 우리가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된다. 고통이 끝남을 상상할 때는 공양 그릇을 앞에 두고 평온하게 앉아 있는 붓다의 모습을 생각하라. 공양 그릇에는 좋은 것이 놓이기도 하고 끔찍한 것이 놓이기도 한다. 그러나 붓다는 탐욕과 성냄의 밀고 당김을 식별하지 않으므로 어떤 경우에도 동요하지 않는다. 그의 마음은 불안하거나 고통받지 않는다. 붓다는 공양 그릇에 무엇이 담기더라도 그것에 충실하고 행복해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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