둑카에 대한 의식이 도움을 준다

 

 

둑카가 생긴다 싶으면 우리는 도망치지 말고 가능한 한 그것을 명백히 바라보아야 한다. 둑카를 의식하면 깨우침을 얻을 수 있는 에너지가 생겨나는 까닭이다. 슬픔은 평화를 찾는 동기가 된다.
둑카의 진리를 인정하면 의식이 분명해지고, 열리며, 왜곡되지 않는다. 우리가 고통스런 현실을 부정하면 행복과 자유, 깨우침을 위해 써야 할 많은 정신적 에너지를 허비하는 셈이다. 현실을 부정하면 결국 아픔만 커진다. 우리 앞에 장애물이 있다는 사실을 부정하고 그 장애물을 통과하려고 해봤자 우리만 다치게 된다.
우리가 고통을 깊이 살필 때 고통에서 벗어나는 길을 알 수 있다. 그러나 고통이 없는 척한다면 어떻게 그 고통을 볼 수 있단 말인가? 둑카를 다루는 일은 북극성을 등지고 남쪽으로 걷는 것과 같다. 우리는 둑카의 작용을 보면서 행복의 방향으로 나아갈 수 있다. 둑카를 부정하면 우리 마음의 고통이 커질 뿐이다.

이것이 둑카다
둑카가 추상적이거나 이론에만 머물러 있다면, 둑카에 대한 의식이 우리에게 도움이 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이 가르침을 일상과 연관시킨다면 우리는 자유로워질 수 있다.
일상에서 둑카가 일어날 때마다 의식하라. 부정하지 마라. 직장에 늦어서 허둥지둥 달려갈 때 둑카를 느끼는가? 중요한 회의가 염려될 때 둑카를 느끼는가?
시장에서 길게 줄서서 기다릴 때 안달하는 둑카를 느끼는가? 미리 앞일을 너무 많이 생각하고 현재의 순간에 집중하지 못해 마음이 어지러운 미묘한 둑카를 인식할 수 있는가?
둑카가 생길 때마다 자신에게 분명히 말하라. “이것이 둑카다.” 단순히 진리를 인정함으로써 안도감을 느껴라.

 

● ● 두 번째 성스러운 진리(집성제集聖諦): 고통에는 원인이 있다
한 남자가 텅 빈 아파트로 귀가한다. 가구는 모두 사라지고 없다. 아내가 휘갈겨 쓴 쪽지가 싱크대 위에 놓여 있다. “당신 곁을 떠나요.” 아무런 이유가 없다. 연락할 방법도 없고 한마디 상의도 없었다. 텅 빈 아파트에 단지 이 쪽지뿐이다.
간혹 이런 일이 있다. 이런 상황에서 우리는 둑카의 영역에 있게 된다. 이것이 가장 기본적이고 명백한 형태의 고통 가운데 하나다.
이 남자가 겪는 고통의 원인samudaya으로 작용했을 많은 요인들을 상상할 수 있다. 남자가 모질어서 아내가 더 이상 참지 못하고 떠났는지도 모른다. 어쩌면 아내는 안정된 관계보다는 변화와 자극이 필요했는지도 모른다. 아니면 사랑하는 사람이 생겼을지도 모른다. 동성애자라서 더 이상 정상적인 결혼생활을 참지 못했을 수도 있다. 성적인 면이나 신뢰의 면에서 남편과 사이가 나빠졌을 수도 있다. 경제적인 문제로 마침내 결별에 이르게 되었는지도 모른다. 가능성들은 많다.
그렇지만 조금만 더 깊이 들여다본다면, 붓다의 눈으로 이 남자의 불행을 바라본다면 어떨까? 현재 그가 느끼는 슬픔의 원인은 무엇일까?
붓다의 통찰로 볼 때, 여기서 슬픔의 원인은 궁극적으로 붓다가 갈애渴愛라고 일컬었던 ‘갈증’ 혹은 ‘갈망’ 때문이다. 앞서 언급한 요인들도 작용했겠지만, 근본적인 원인은 바로 갈망, 집착 그리고 애착이다. 집착이 없다면 고통도 없을 것이다.
물론 자기 아내를 원하는 이 남자를 비난하려는 건 아니다. 우리는 이런 처지에 놓인 사람들을 동정한다. 이는 비난할 문제가 아니라 인과관계의 문제다. 갈증이나 갈망 때문에 본질이 무상과 무아인 것에 집착할 때, 많은 복합적인 요인들로 생겨나는 것에 집착할 때, 그 결과는 고통이다. 때때로 그런 것이 아니라 항상 그렇다. 몇몇 사람들에게만 그런 것이 아니라 모든 사람에게 그렇다. 우리 가운데 몇 명이나 세상에서 가장 사랑하는 사람을 잃게 될까? 우리 혹은 우리의 동반자가 죽거나 또는 이혼하거나 관계가 끝나서 결국에는 우리 모두가 사랑하는 사람을 잃게 된다. 우리 가운데 몇 명이나 자신이 가장 사랑하는 사람과 궁극적으로 헤어지게 될까? 어느 누구에게도 예외는 없다.
그러나 우리가 애착을 버린다면 고통도 사라질 것이다.
욕망을 버린다는 말은 우리가 무관심해진다는 의미가 아니다. 집착을 버림으로써 우리는 삶의 좋은 것들을 훨씬 더 즐길 수 있다. 이제 잃는다는 두려움이 없기에 더 즐길 수 있는 것이다. 우리 삶에서 배우자의 존재를 진정으로 기뻐할 줄 알게 된다. 존재가 무상하다는 사실을 알면 그 존재를 당연하게 생각하지 않고 마음속 깊이 더 소중하게 여기게 된다.
누군가 도박 빚으로 집을 잃거나 과도하게 마약을 복용해서 죽었다면, 주식시장에서 무모하게 투자를 하다가 돈을 모두 날렸다면 그런 고통이 욕망의 결과라는 사실을 쉽게 알 수 있다. 그러나 욕망에 대한 붓다의 가르침에는 배우자에 대한 애착과 같이 우리가 대부분 당연하게 생각하는 미묘한 형태의 집착도 포함된다. 때로는 이런 미묘하고 당연해보이는 집착이 알아차리기 더 어렵기 때문에 훨씬 더 치명적이다. 이런 집착에도 적용되는 원칙은 같다.


더 깊이 살피기: 욕망의 본질
불교 경전들은 문자로 쓰이기 전 수 세기 동안 구두로 전해져왔다. 말로 쉽게 전달하기 위해 한 단어가 때로는 같은 범주에 속하는 단어들을 대표하기도 했다. 그래서 욕망은 『옷감에 대한 비유의 경The Parable of the Cloth Sutra』에 열거된 다른 불건전한 정신 상태 목록을 대표하여 사용되기도 했다. 불건전한 정신 목록에는 적의, 화, 원한, 위선, 악의, 질투, 탐욕, 사기, 속임수, 고집, 건방짐, 자만, 오만, 과장, 나태(Rahula 1974)가 있다. 이러한 미숙한 정신 상태는 슬픔의 원천이기도 하다.
둑카는 삼독三毒, 즉 탐욕, 어리석음, 성냄에서 비롯된다. 이 세 가지 독의 뿌리는 어리석음, 즉 지혜의 결여다. 사물이 지닌 무아와 무상의 본질에 비추어보면 집착이란 의미가 없으며 궁극적으로 고통으로 이어진다. 이러한 사실을 인식하지 못하고 어떤 것에는 집착하고 다른 것을 거부하는 것은 바로 지혜가 부족하기 때문이다. 우리가 탐하는 것은 구하고 싫어하는 것은 피한다면 영원히 헛된 싸움에 빠져 현재의 순간에 마음을 열고 깨어 있지 못하게 된다. 탐욕과 성냄은 고통스러운 정서 상태를 초래하는 주된 원인이다.
로마 황제이면서 스토아 철학자인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는 이것을 깜짝 놀랄 만한 이미지로 표현했다. 영혼의 구(球)는 어떤 대상을 향해 뻗어가거나 오므라들거나 흩어지거나 가라앉지 않고, 오직 빛에 휩싸일 때, 그 자체의 완전한 형태를 유지한다. 그 빛 속에서 영혼의 구는 자신과 모든 사물 안의 진리를 본다. (Mark Forstater 2000, 162~63) 어떤 대상을 향해 뻗어나감으로써 둥그런 형태나 완전함을 잃은 영혼은 탐욕을 나타낸다. ‘오므라듦’은 성냄, 즉 불쾌한 것에서 물러남을 의미한다. 완전하고 둥글며 왜곡되지 않은 것, 즉 빛에 휩싸이는 것은 마음을 챙기며 탐욕이나 성냄의 어리석음으로 왜곡되지 않은 의식을 묘사한다. 탐욕은 즐거운 일을 하고 싶은 일상의 근질거림, 근본적으로 가만히 있지 못함, 불만족에서 미묘하게 나타난다. 이것은 현재의 순간과 현재 환경에서 만족과 행복을 느끼지 못하게 하는 모든 상태를 의미한다.
둑카를 이해하는 것은 이 모든 상태를 철학적으로 밝히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직접 둑카가 어떻게 작용하는지 명확하게 보는 것을 의미한다. 지혜가 부족해서 사물이 분리되고 영원한 것처럼 행동하기 때문에 탐욕과 성냄 그리고 모든 불건전한 정신 상태가 생겨나는 것이다. 이러한 사실을 반복해서 깊이 들여다보면 불교에서 말하는 윤회라는 고통의 악순환을 끝낼 수 있게 된다.
이 점에서 붓다는 병과 병의 원인을 밝히며 약왕보살藥王菩薩, 즉 중생에게 좋은 약을 주어 몸과 마음의 병고를 덜어 주고 고쳐 주는 보살로서 자신의 역할을 다했다. 여기서 병이란 바로 둑카다. 둑카는 탐욕, 성냄, 어리석음에서 비롯된다. 원인이 제거되면 병은 자연히 치료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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