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실적 시각

 

 

자유, 평화, 사랑으로 가는 길은 고통을 깊이 들여다보는 데서 시작된다. 이는 비관적

인 시각이 아니라 현실적인 시각에서 고통을 바라봄을 의미한다. 불교가 비관적이라는 생각은 서양 문화에 만연하는 둑카를 부정하기 때문에 생긴 것이다. 병자는 병원에 노인은 양로원에 집어넣고, 망자는 장례식장으로 보낸다. 사후세계나 환생에 대한 종교적이고 영적인 믿음이 죽음과 힘든 삶의 현실을 차단하는 방패로 작용하기도 한다. 고통스러운 현실을 외면하려는 서양 문화의 경향을 따르면 삶과 죽음이 비관적으로 보인다. 유럽의 대성당과 박물관들을 방문하면 예수와 성인들이 고통받는 장면을 묘사한 종교적 작품을 많이 볼 수 있다. 그래서 서양의 종교는 고통과 아픔을 맹목적으로 숭배하는 것처럼 보이기도 하는데, 동양에서 평화로운 붓다와 보살들의 이미지가 많은 것과 심한 대조를 이룬다. 누군가가 지적했듯이 하느님과 연결되어 평화와 사랑으로 빛나는 평화롭고 행복한 예수와 성인들을 묘사한 작품이 더 많았다면 좋았을 것이다. 그렇지만 동시에 예수와 성인들의 고통을 검토해보지도 않고 거부한다면 삶의 고단함과 죽음의 현실을 부정하는 서양 문화를 드러내는 것이다. 이런 작품들은 고통에 대한 불건전한 환영을 반영하기도 하지만, 이 모든 고통의 묘사는 초월적인 의미에서 나온 것이며 궁극적으로는 고통을 겪더라도 삶은 좋다는 확신을 주기 위한 것이다.
우리는 둑카에 직면하면 대체로 부정적인 반응을 보인다. 고통을 다른 사람들에게 털어놓으면 그들은 매우 염려하는 태도를 보인다. 그들은 “오히려 더 잘 될 거라고 난 확신해”라는 상투적인 말을 하거나 하늘에 맡기자는 식의 충고를 하거나 또는 긍정적으로 생각하라고 훈계할지도 모른다. 우리는 둑카를 우리가 마땅히 그래야 한다고 생각하는 완벽하고 쉽고 편안한 삶을 방해하는 비정상적인 것으로 생각한다. 그래서 둑카가 나타나면, 누군가의 잘못의 결과라고 생각한다. 긍정적으로 생각하지 못하고 지나치게 부정적이어서 우리는 고통받는 사람들조차 비난할 수도 있다. 그리고 누군가가 죽으면 그 죽음이 전혀 뜻밖의 비정상적인 일인 것처럼 반응한다. 우리에게는 누군가
비난할 대상이 필요하다. 의사나 병원, 가까이에 있는 그 누구라도 좋다.
하지만 둑카는 뜻밖의 일이 아니라 삶의 일부분이다. 둑카의 실제 상황을 받아들이면 마음이 편해진다. 심리적 방어 기제를 가동하여 의식을 왜곡할 필요가 없다. 삶을 있는 그대로 온전한 전체로 보아야 한다. 진실을 있는 그대로 인정하지 않으면 우리는 절대로 삶을 긍정할 수 없다. 둑카가 자연스런 삶의 일부분이란 사실을 이해하는 사람에게 슬픔을 털어놓는다면 큰 위로가 될 것이다. 이런 사람들은 상투적인 말로 대충 얼버무리려고 하지 않는다. 설명하려고 하지도 비난하거나 왜곡하려고 하지도 않는다. 이런 사람들은 인간의 슬픔이라는 성스러운 진리 앞에 경외심을 갖게 하며 우리와 조용히 함께 할 뿐이다. 그 진리를 말할 수 있다면 그 자체로 벌써 위안이 된다. 가식적으로 행동할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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